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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36화 (36/61)

36화

“병원 옮길 거야. 원래 살던 동네 병원으로 가는 거니까 그렇게 알아.”

말을 전한 간호사가 병실을 빠져나가고, 물러났던 주하얀이 신경질적으로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앉은 후에도 창가 병상 주위는 적막하기만 했다. 냉랭한 태도의 주하얀 때문이 아니라 온화한 표정의 남자 때문이다.

“피곤하진 않고?”

“괜찮아요.”

주길우는 그림자 져 반쪽만 보이는 TV를 보는 척 고개를 들고 있으면서도 신이혁을 힐끔거렸다. 그가 자신에게 살갑게 말을 걸며 치댈 때마다 이쪽에 와닿는 시선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무슨 상황인지 의아하겠지. 그러면서 둘의 사이나 그의 존재를 추궁할 용기도 없음이 한심했다.

간호사가 다녀간 지 딱 30분 후에 방문한 의사는 여러 어려운 말들을 덧붙이더니 곧 이송에 무리가 없을 것 같다는 소견을 밝혔다. 예상했던 말이었지만 주하얀은 곧바로 사라지는 의사의 뒤꽁무니에 대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먼저 내려가 있을게.”

“아니요. 저도 같이 가요.”

“사람 많을 것 같아서. 천천히 정리하고 내려와.”

병실을 정리한다고 서랍장을 하나씩 열어보는데 등 뒤에서 그런다. 잠시 기다리라고 손을 뻗었지만 이미 병실을 빠져나가 잡을 수도 없었다. 정작 신경 써야 하는 주 보호자는 자신인데 하는 일이 없어 조금 미안했다.

“가져갈 것도 없네.”

그래도 이주는 보냈는데, 병실을 다 털어 나온 짐은 꼴랑 사고 당시 입고 있던 옷과 간단한 세면도구, 오늘 챙겨 온 음료 세트가 다였다. 초라해 보일 정도로 간단하다.

되는대로 집어던진 옷을 끌어와 바로 개는 아빠의 모습에 속이 터졌다. 해진 옷을 더듬거리며 정리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다 점퍼 주머니를 확인한다고 꺼낸 지갑을 보곤 손을 내밀었다.

“내놔.”

“으으?”

“내놔. 내 카드.”

“…….”

“아빠가 가져간 거 다 아니까. 내놔.”

단호히 굳은 표정을 짓는 아들의 눈치를 보던 주길우는 곧 낡아 가죽이 들린 지갑을 열어 느그적 분홍색 카드를 꺼냈다. 그걸 낚아채곤 바로 등을 돌리려다가 울컥 치미는 울분에 팽하니 몸을 다시 틀었다.

“이거 내 대학 등록금이었어. 알아?”

“…….”

“평생 도움도 안 되고 가족 등골이나 빨아먹고 산 주제에, 제발 좀 살아보겠다는 자식 돈이었다고. …하긴 그런 인간이니 자식도 버리고 갔지.”

말을 하다 보니 치솟는 화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머리통이 뜨끈해지고 미간으로 열이 올라 눈을 빠르게 깜빡인 주하얀은 잡히지도 않은 팔을 뿌리치듯 침대를 세게 내리치곤 병실을 나섰다.

복도를 거슬러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카드를 든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고작 손안에서 도는 이 판판한 플라스틱 때문에. 속이 답답해 숨을 크게 내쉬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한참이나 심호흡을 하고 엘리베이터에 새겨진 문양을 의미 없이 눈으로 따라가며 마음을 달랬다.

“어딨지.”

1층 로비로 나와 수납 데스크와 의자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눈으로 훑었다. 혹시 몰라 구석 자리까지 돌아다닌 주하얀은 병원 입구 회전문 앞에서 신이혁을 발견했다. 비스듬히 등을 보이고 선 남자에게 햇살이 쏟아진다.

“…그럼 예정대로 진행해주세요.”

“아.”

“네. 끊습니다.”

조심스럽게 다가갔으나 역시 이번에도 그는 먼저 주하얀의 기척을 알아챘다. 단번에 마주친 눈이 웃음 짓는다. 딱히 놀라게 할 생각을 한 건 아니었지만 이유 없이 아쉬워진다.

“정리는 다 했어?”

“네. 돈은 어디다 내는 거예요? 그냥 직원한테 가면 되나.”

“수납은 아까 끝냈어. 올라가자.”

어깨를 감싸 이끌며 들고 있던 종이를 건넨다. 받아든 종이엔 칸이 좁은 표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뜻도 모를 어려운 글자들과 숫자들 끝으로 환자 부담액이 쓰여있다. 예상대로 백만 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주하얀에겐 부담스러운 액수였으나 그렇다고 이 돈을 그가 낼 이유는 없다. 게다가 이미 너무 많은 신세를 지고 있지 않은가. 절로 심각해진 표정으로 그를 올려봤다.

“그냥 내주는 거 아니고 빌려주는 거야.”

“…….”

“돈 빌려주면서 다시 받아낼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네.”

울적한 기분을 손쉽게 눈치챈 그가 어르듯 말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병원비를 갚는다 해도, 결국 그의 돈을 돌려주는 꼴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갚고 싶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를 여러 번 접어 주머니에 넣었고 잃어버리지 않게 주머니의 지퍼도 꼭 잠갔다.

병실에 돌아와 마지막으로 다시 자리를 확인하고 병원을 나섰다. 아빠는 사설 구급차에 올랐고, 보호자 동승을 물어보는 기사에게 거절의 뜻을 비쳤다. 아빠는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주하얀은 눈 하나 깜짝하지 못했다.

갈 때와 같이 신이혁의 차를 타고 동네에 돌아왔을 때는 벌써 몸이 피로했다. 저 원수 같은 짐덩어리 때문에 무슨 고생인지 절로 이가 부득 갈렸다.

그런 원망은 새로 입원할 병원에 도착해 입원 절차를 밟으며 더 세졌는데, 그저 편히 누워있을 자리만 옮기면 다인 환자가 괘씸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먼저 도와주겠다 나섰다지만 신이혁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몇 시간 운전은 기본에, 보호자라고 나선 아들은 어리숙해 짐짝처럼 그의 옆을 따라다니는 게 겨우였다.

“진짜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수속을 끝내고 배정받은 병실에 환자를 눕히기까지 끝낸 주하얀은 침대를 잡고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였다. 아, 안 그래도 체력이 달리는데 싫은 사람 때문에 움직이려니 더 힘든 느낌이다.

“갈게.”

“벌써? 좀 쉬다, 뭐라도 먹고 가지.”

“내가 아빠 보면서 속 터져서 뭘 먹어.”

“이 놈이 말본새 하곤….”

“난 앞으로 병원에 안 올 거야. 퇴원할 때나 불러.”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부모가 다쳐 병원에 있는데.”

“내 아빠는 죽었다고. 아까 말했잖아.”

“저런…!”

“자식 버리고 간 사람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소리 죽여 힐난하는 목소리에 버럭 목소리를 높이던 주길우는 이전 병실과 달리 사람으로 가득한 주위를 돌아보곤 입을 다물었다. 가느스름한 눈으로 그 꼴을 쳐다보던 주하얀은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렸다.

“저 이, 주하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뵙죠.”

등 뒤로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말과 정중한 목소리가 들린다. 곧장 병실을 빠져나와 천천히 복도를 걷고 있자면 키가 커 보폭이 넓은 남자가 금세 옆자리를 차지한다.

“피곤하지.”

“싫은 인간 얼굴 보고 있으려니 짜증 나긴 하는데, 괜찮아요. 오히려 저보다는….”

뒷목을 주무르는 억센 손에 가만 눈을 감았다 뜬 주하얀이 기우뚱 들린 고개로 그를 올려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뜻을 알아챈 눈동자에 옅은 웃음이 서린다.

“일단 집으로 가자.”

“집이요?”

“나랑 할 얘기가 있지 않나.”

주하얀은 막 생각난 듯 비스듬히 힘을 풀고 있던 목을 바로 했다. 그러고 보니 원래 만나자마자 할 줄 알았던 얘기다. 아침에 병원에 갈 때만 해도 언제 계약 얘기를 꺼낼까 어색해했는데 그 후엔 바삐 움직이느라 까먹고 있었다.

늘어져있던 몸을 바짝 굳히며 긴장한 것을 알아챈 신이혁은 얼 것 없다며 볼을 꼬집어 매만졌다. 둘은 병원을 나서 함께 차를 탔다. 역시나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왔으나, 이번엔 그다지 안정이 되어주지 못했다.

* * *

“졸리다. 좀 자자.”

차를 탄 내내 불안해하다 그의 집을 목전에 두곤 배가 살살 아려왔다. 불편한 속을 부여잡은 주하얀을 뒤에 두고 먼저 집에 들어선 그는 입고 있던 코트를 소파에 아무렇게나 벗어두고 말했다. 그 말이라는 게 긴장한 것이 허무하도록 기운 빠지는 것이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아침부터 움직였는데 안 피곤해?”

“아니 저는, 괜찮은,”

“그런 것치곤 차에서 잘 자던데.”

그는 손목에 찬 시계를 풀며 뒤를 돌아봤다.

병원에서 올라오는 차에서 졸았던 걸 얘기하나 보다. 아니, 졸았다기에도 좀 억울하다. 이리저리 골치 아픈 상황에 피로가 몰려와 속으로 하품을 몇 번 하고, 이따금씩 무거운 눈꺼풀을 잠시 감고 있던 것뿐이다.

졸지에 운전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잠이나 자는 매너 없는 사람이 된 주하얀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얘기는 한숨 자고 할 거야. 하루 종일 운전했더니 어깨도 결리고.”

그렇게 말하면 덕 본 입장에선 더 토 달 말이 없다. 표정을 풀진 않아도 더 꼬투리를 잡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그가 집 안쪽으로 턱을 까딱였다.

“위에 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 방으로 좀 내려와.”

방으로? 영문을 몰라 되물으려는데 이미 그는 제 방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멀어지는 등에 대고 입만 뻐끔거리던 주하얀은 금세 홀로 남은 거실을 돌아보곤 결국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올라가라기에 오긴 했지만, 옷을 갈아입을 생각은 없다. 지금이 밤이라 잘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렇게 오래 머무를 생각도 없었다. 결국 위에 걸친 패딩만 침대에 던져두고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똑, 똑.

“들어갈게요.”

주인에게 집 구조를 소개받은 적이 없어 아직 공동공간과 손님방을 제외하곤 좀 감감했다. 기억에 의존해 그가 들어갔던 방문 앞에 서 반쯤 닫힌 문에 노크를 하고 조심히 문고리를 밀었다.

“빨리 왔네.”

그의 방은 손님방의 딱 2배만 했다. 생각보다 살풍경하지도, 어수선하지도 않게 정돈된 공간을 둘러보던 주하얀은 막 상의를 벗어 맨가슴을 드러낸 모습에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부산을 떠는 게 더 유별나 보였겠다 싶어 꾸물꾸물 시선을 다시 돌렸다. 그사이 옷을 다 입은 신이혁은 벗어둔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네. 패딩만 벗어두고 와서요.”

“편하게 갈아입지, 왜.”

“이 옷도 불편하진 않아요.”

방을 가로지르는 시선이 닿아온다. 괜히 입고 있는 맨투맨의 소맷자락을 끄집어 손바닥을 문질렀다. 무표정한 시선이 발끝까지 훑어내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럼.”

“…….”

“이리 와.”

“네?”

벌써 침대 앞에 선 그가 이불을 들추며 말했다. 이리 오라고. 주하얀은 한 박자 늦게 그의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라는 권유와 제 방으로 오라는 명령의 이유를 알아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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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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