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어 마이 세큐리티-37화 (37/61)

37화

“한숨 잘 거라고 했잖아. 들어와.”

“아니요. 저는 안 졸린데요.”

“그럼 주인 없는 집에서 혼자 뭐 하게. 그냥 같이 자. 일어나서 얘기해.”

엄밀히 말하면 주인 없는 집이 아니라 주인 자는 집인데. 게다가 자신은 이미 그가 없는 집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다.

“그럼 저는 제 방에서 잘게요.”

“하얀아.”

먼저 이불 속으로 들어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신이혁이 아직도 멀찍이 떨어져 선 주하얀을 보고 웃었다.

“이 집에 네 방이 어디 있어. 다 내 방이지.”

“어….”

“어차피 내 방에서 잘 거면 그쪽 말고 이쪽 내 방에서 자.”

친절히 이불까지 들춰 자리를 만들어주자 주하얀은 곤란한 듯 침음을 냈다.

사실 남자끼리 같이 자는 거야 문제가 없었다. 침대는 그의 방 사이즈만큼 컸고 각자 한편을 차지하면 닿을 일도 없어 보였다. 옛날에 이종훈의 집에서 잘 때 굳이 둘 다 침대에서 자겠다고 서로 부대껴 불편하게 잤던 때와는 사이즈부터 달랐다.

하지만 그거야 오랜 친구 사이의 일이고. 무엇보다 그는 지난 만남에서 자신을 그……렇고 그런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 짓도 안 해. 걱정하지 마.”

어린 애가 머리를 굴려봐야 뻔하다. 눈에 그려지기까지 하는 고민을 그는 쉽게 부정했다.

“그냥 사람이 옆에 있어야 잠이 잘 와서 그래. 체온을 좋아한다고 했잖아.”

“음….”

“하얀이가 혈기왕성한 나이라 뭘 기대하는진 알겠는데.”

“아니거든요!”

짐짓 불쌍한 척을 하더니 이젠 생각을 매도하기에 얼른 말을 끊었다. 입을 닫은 신이혁을 주먹까지 꼭 쥐고 바라보던 주하얀은 결국 침대에 다가갔다.

여기서 더 버티다간 자신이 애먼 상상이나 하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래, 같은 남자끼리 고작 한 자리에서 자는 건데 뭐.

“손 안 댈 테니까 걱정 마.”

이불을 높이 들어 자리를 내어주며 친절하게도 말한다. 자리에 눕자마자 그 이불을 잡아채 덮곤 바로 눈을 꼭 감았다. 얼마간 그러고 있다 눈을 뜨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시선이 마주쳤다. 당장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버렸다.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났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곧 그도 바로 눕는지 부스럭거리며 침대가 요동친다.

졸리지 않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막상 편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니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근육들이 이완되는 느낌에 베개에 볼을 비볐다.

부드러운 시트와 포근한 이불, 몸을 움칠거릴 때마다 나는 서걱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다. 점점 몽롱히 차오르는 잠에 느리게 숨을 내쉬던 순간, 허리에 닿는 감촉에 숨을 훕 들이켰다.

“아!”

무겁게 감긴 눈을 번쩍 뜨고 몸을 뒤채기도 전에 허리 옆으로 파고든 손은 배를 단단히 끌어당겼다. 깜짝 놀라 뒤로 젖히려던 상체는 등 뒤로 가까이 닿은 판판한 몸통에 가로막혔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체온이 닿아야 잠이 잘 와.”

“아니, 잠깐. 이것 좀 놓고.”

졸지에 몸이 묶여 어깨로 밀어내도 꿈쩍하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목이 뻐근하도록 고개를 휙 돌린 주하얀은 코가 스치도록 가깝게 자리한 얼굴에 놀라 얼른 몸을 바로 했다.

“…!”

“왜. 마주 보고 자고 싶어?”

“아, 아니요!”

잘 자려는 사람을 당황시키고 태연한 것도 모자라 몸을 제 쪽으로 돌리려는지 둘러 안은 팔에 힘을 주기에 놀라 얼른 이불 위로 팔을 붙잡으며 등을 말았다.

그가 힘주어 끌어당기자마자 순간 침대에서 들썩 떠오르는 부유감에 절로 말이 더듬어 나왔다.

“아, 안 만진다면서요!”

“내가 언제.”

“아니 분명 아까.”

“미안한데 내가 기억력이 좀 안 좋아.”

거짓말을 뱉으면서도 천연덕스럽기만 하다. 덕분에 기가 차 말문이 막힌 건 주하얀뿐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계약은 꼭 자료를 남겨야 하는 거야.”

“….”

“아쉽게도 말로 한 약속은 효력이 없어.”

단단히 죄이던 팔에 힘이 풀리고 손이 마른 배 위를 도닥인다.

“자. 이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 바로 뒤에서 들린다.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져 목을 움츠리자 손이 올라와 눈가를 덮듯이 훑었다. 그 결에 잠시 눈을 감았다 곧 다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큰 손이 가슴 아래를 두드린다. 타격도 없을 만큼 가벼운 손길이다. 주하얀은 당황 때문인지 둥둥거리는 심장을 들킬까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방금의 소동은 순전히 장난이었는지 편히 자세를 잡자 그는 더 치근거리지 않았다. 도리어 본격적으로 잠에 들 태세를 취해 더 이상 반항하기도 민망해졌다. 불시에 포옹 당해놓고 항의도 못하게 생겼다.

“….“

말소리가 멎자 고요해진 침실은 규칙적인 숨소리만 울린다.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내쉬는 소리와 머리칼에 닿을 듯 말듯한 숨결이 느껴진다. 다시금 안온함이 덮쳐온다. 먼저 잠에 들었는지 미동 없는 남자의 숨소리에 맞춰 호흡을 내쉬며 곧 주하얀도 눈을 감았다.

“으음….”

눈을 떴을 때는 어둠과 주황색 노을빛이 딱 절반씩 방을 차지한 때였다. 옆으로 웅크리고 잔 탓에 뻐근한 몸을 쭉 편 주하얀은 비어있는 옆자리에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반강제로 끌어들였기로서니, 한 침대에서 누워 잠을 자다니. 뒤늦게 자신의 아둔함에 한숨을 내쉬곤 손바닥으로 마른 얼굴을 비볐다.

목이 말라 먼저 부엌에 가 물을 마셨다. 곁눈으로 살핀 거실은 비어있었다. 어디 있을까. 손님을 두고 집을 비웠을 리는 없고. 아니, 그라면 가능한 이야기이긴 했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입안 가득 물을 물고 있는데 침실 옆 방의 문이 열리더니 신이혁이 나왔다. 잠기운 하나 없이 평소와 같은 모습이다.

“뭐해. 일어나자마자 귀엽게.”

여전히 볼을 부풀리고 동선을 따라 눈을 움직이는 걸 보더니 콕 집어 말한다. 다음 순간 주하얀은 단숨에 물을 삼켜버렸고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이리 와. 이제 할 얘기 해야지.”

신이혁이 손에 든 종이를 까딱이며 말했다. 비록 부엌에선 방향상 인쇄되지 않은 뒷면만 보였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방금까지도 느슨히 풀어졌던 몸이 꽉 죄어온다.

“고객님은 이쪽에 앉으시고.”

심장이 오그라들어 불편하게 쿵쿵댐을 무시하고자 물 한 모금을 더 마시고 다가가 손끝이 가리킨 소파에 앉았다. 먼저 놓인 서류 일체와 만년필 옆으로 물기 맺힌 잔을 내려두었다.

“설명 필요한 부분이나 조약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의 높임말이 낯설고 어색하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지금 목전에 두고 있는 행위가 무엇인지 일깨워주었지만, 한편으론 과장된 연극 투로 들려 현실감을 흐리게 했다. 평소 짓궂던 그의 성정으로 봤을 때 언제든 종이를 뺏어 들고 장난이었다고 선언할 것 같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자신의 바람이겠지만.

대출 거래 약정서

본 적 있는 글자이다. 최초로 돌아가 그와 처음 만났던 날. 집에 쳐들어온 사채업자가 눈앞에 내밀었던 서류다. 절로 입이 말라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상단에 크게 쓰인 제목을 훑은 주하얀은 총 세 장으로 이루어진 서류를 훑어보았다. 맨 처음, 아마 개인정보를 적어 넣을 공란을 제외하곤 모두 어려운 말투성이다. 아니, 사실 거래 전 유의사항에 해당할 두어줄 빼고는 서류 전체를 이해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대출 과목, 변동금리 대출, 유동 수익률, 지연배상금률. 불친절한 단어들과 나열된 조항을 훑다 고개를 들었다. 기가 질린 눈이 일상인 듯 평온한 눈과 마주친다.

“어려운 부분은 말씀하세요.”

언뜻 목소리에 즐거운 기색이 서렸나 싶었다. 친절한 말투였지만 어쩐지 ‘전부 다’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학교에선 나름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는데…. 갑자기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다. 하지만 학교에선 이런 걸 가르쳐주지 않잖아. 자기변명이 튀어나온다.

“…아니에요.”

비록 멍청하게 감당 못할 짓을 저질렀지만 그 추레한 아빠도 했던 일인데, 자신이 버벅거린다는 걸 말한다면 ‘들킨’ 느낌이 들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속이 신이혁에겐 훤했다. 그는 주하얀을 처음 이 소파에 앉혔을 때부터 유쾌하게 올라오는 속을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친절하되 꽤 사무적인 목소리를 내려 목을 가다듬었다.

“고객님이 이쪽 거래를 잘 모르실 것 같아 기재하실 사항들 연필로 써두었습니다. 읽어보시고 괜찮으시면 그대로 따라 쓰시면 됩니다.”

적극적인 배려의 말에 서류를 뒤적여보던 주하얀이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미리 뚜껑까지 열어 건넨 펜을 조심히 손가락 사이에 끼워두고 서류를 읽고 또 읽었다. 좀체 펜촉이 서류에 앉을 기미가 안 보인다.

이 정도의 곤란함과 망설임은 예상한 바이다. 하지만 조금 다독인다해서 나쁠 건 없겠지. 음. 결국 골몰한 소리를 낸 신이혁은 상체를 앞으로 구부렸다. 겁을 먹고 움츠린 상대는 일단 달래는 게 먼저다.

“주하얀.”

“….”

“마음이 안 좋으면 안 해도 돼. 그래도 도와줄 거야.”

다정한 목소리에 주하얀은 서류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양손을 깍지 껴 무릎 위에 얹은 그는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띠었다.

긴장에 사로잡힌 아이는 과도하게 꾸며낸 친절을 구분하지 못했다.

“서류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거지만 당사자가 내키지 않는다면야 강요할 마음은 없어.”

“….”

“애초에 다른 뜻이 있는 거래도 아니고. 물론, 사심은 좀 있지만.”

쉽게 지난 발언을 상기시킨 후 어깨를 으쓱이며 긍정한다. 주하얀은 불현듯 자신이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만남 이래 쭉 자신을 위해주었다.

과장해 낯간지럽게 표현한다면 한 줄기 희망 정도는 아닐지라도 따듯하게 맞아준 사람이다. 무엇보다 지금 거래를 통해 그가 건넬 재화는 분명한 한 줄기 빛이 되어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호의를 받기만 하고 심지어 의심하다니.

“내가 설마 너에게 해가 되는 걸 할까.”

잠시 눈을 깜빡이다 시선을 내렸다. 언제부터 들렸는지 모를 책상 두드리는 소리가 마음을 급하게 한다. 서류의 글자들은 여전히 뜻 모를 나열이다.

아래 살이 비치는 손톱이 조금 빠른 속도로 유리 테이블을 치는 걸 힐끔 눈으로 흘긴 주하얀이 만년필을 고쳐 잡았다. 흑연으로 쓰인 옅은 회색 글자 위로 펜촉이 덧대어진다.

귀를 불편하게 건드리는 소리에 따라 심장이 박동하는 것 같다. 긴장한 탓일지도 모른다.

쓰윽. 쓱. 서류 마지막 장 하단의 서명란에 어설픈 싸인을 남긴 후엔 자신도 모르게 긴 숨을 내뱉었다. 조금, 호흡이 딸리는 것도 같다.

탁-

할 일을 끝낸 만년필을 던지듯 내려놓자마자 큰 손이 다가온다. 익숙한 손길이 익숙한 세기로 머리를 쓸어 넘긴다.

“잘했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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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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