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온 신이혁이 서류와 펜을 가져가는 동안 그저 멍하니 앉아있었다. 머리칼 위로 입술이 내려앉아도 아득하기만 하다.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그가 아까 전 나왔던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못 박힌 듯 멈춰있던 주하얀은 방문이 닫히자마자 몸을 소파 위로 허물어뜨렸다.
지익. 뒤로 쓰러져 기운 몸이 제법 큰 소리를 내며 가죽 위로 무너진다.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긴장 때문에 몸을 앞으로 바싹 당겨 앉았나 보다.
“하아.”
방금까지는 신경 줄이 당겨 모든 환경이 크게 닿았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멍멍하다. 순식간에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잘 모르게 됐다. 펜을 쥐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어디엔가 싸인을.
양팔을 아무렇게나 뻗고 있던 자세를 바꿔 한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마찬가지로 바닥을 긁던 다리도 끌어올려 팔로 안았다.
이제 다 된거다. 그토록 바라던 대학도 가고, 지긋지긋한 가족과 생활이 된 가난에서 한 숨 돌릴 수 있을 거다. 그래. 잘한 일이다. 모두 잘 될 거다.
수런한 마음을 달래며 초점을 잃어 흐릿하게 뜬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왜 그러고 있어.”
흐릿하게 실루엣만 훑던 시야로 불쑥 밝은 색의 물체가 끼어든다. 머리꼭지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며 눈을 몇 번 깜짝였다. 마치 장막이 거치듯 뚜렷해진 시야에 언제 돌아왔는지 모를 남자가 서 있다.
머리를 훑고 내려가 볼을 감싼 손이 엄지로 눈가를 쓸고는 멀어진다.
“본인 서류니까 잘 챙기고.”
콩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 바로 앉은 주하얀이 건네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아까 전 자신이 서명했던 계약서였다. 여태 한참이나 봐 놓고 다시 한번 글자를 읽어 내리는 동안 신이혁이 소파에 앉았다. 아까 전 거리를 두었던 자리가 아닌 바로 옆자리에.
“집은 어떻게 할 거야?”
“네?”
“여기 들어와 살 거면 굳이 남겨둘 필요 없잖아.”
뜬금없는 데다 확정적인 투로 하는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절로 좁혀지는 미간으로 돌아보자 그는 도리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추억이 많은 집인가? 아니면 특별히 소중한 점이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집을 처분하기 아쉬워하는 것 같아 보여서 하는 말이야. 어차피 본인 집도 아니잖아.”
둘은 잠시 서로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대화의 핀트가 맞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자신이 왜 그의 집에 들어온단 말인가. 맹세코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없었다.
“제가 왜 여기 들어와 살아요.”
결국 눈싸움인지 기싸움인지 모를 것에 밀린 주하얀이 먼저 입을 뗐다. 의도한 바는 아닌데 자신도 모르게 따지는 투로 나온다.
“하얀아. 방금 서명했잖아.”
“네?”
“계약서 잘 안 읽어봤어?”
뾰족한 주하얀의 말끝과 달리 신이혁의 말투는 부드러운데도 옅게 낀 책망이 느껴졌다. 주하얀은 서둘러 테이블에 내려두었던 서류 일체를 집어 들었다.
계약서에 관련 조항이 있었던가? 사실 잘 모르겠다. 어려운 단어로 이해하지 못한 문장이 8 할은 되었다. 몇 번이나 읽고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 갑자기 읽힐 리 없다.
“어, 어디 있는데요. 그 내용이.”
“여기.”
당황스레 종이뭉치를 내밀며 물으니 계약서 한 귀퉁이를 검지로 콕 집었다. 작은 글씨가 빼곡히 차있는 조약들 중 하나였다. 태연한 상대의 태도에 다급하게 글을 읽었다. 문제는 읽기만 할 뿐, 도통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장엔 주하얀이 거주하는 반지하 셋방을 처분한다거나, 신이혁의 집에서 동거를 한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름도 갑을로 지칭하는 계약서인데 비슷한 의미를 다른 고상한 단어로 대치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그의 당당한 태도에 말려들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계약은 형식적이라고 하셨잖아요. 그, 실제는 그렇게 안 할 거라고.”
마지막 발악이라고 해도 분명 그가 한 말이다. 이거다 싶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정말 그 집이 애틋한가 봐. 아니면 아직 동거는 이르다?”
“아니 그 말이 아니,”
“어차피 주길우 씨는 퇴원해도 그 집으로 못 가.”
대개 자신을 대할 때 그렇듯 부드러운 표정을 얼굴에 바른 것처럼 내세우던 신이혁이 이젠 다소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니까 둘 다 아니라니까. 금방이라도 그의 말을 끊을 기세로 입술을 달싹이던 주하얀이 뒤따르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 네?”
“주길우 씨는 퇴원하자마자 회사 아래 있는 현장으로 보낼 거야.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갚아야지. 안 그래? 내가 신경 쓰는 건 주하얀까지지, 주길우 씨는 아니니까.”
사실관계를 분명히 짚는 목소리는 말끝마다 단호함을 내비쳤다.
“아, 물론 불법적이거나 착취적인 건 아니야. 그냥 일용직 같은 거지. 숙소도 따로 있으니 앞으로 얼굴 볼 일은 소원할 거고. 하얀이도 바라던 일 아닌가?”
“…….”
“주길우 씨 같은 중증 도박중독은 몸을 굴려야 헛생각을 안 해. 돈도 갚고, 치료도 하고. 일석이조지. 오히려 감사해야 할 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주하얀의 태도가 비난적 이기라도 했다는 양 짐짓 억울한 체했다. 하지만 자신은 결코 그의 호의를 당연하게 바란 적이 없다.
“어차피 성인이 되면 바로 독립하려고 했잖아. 그 독립 이쪽으로 해. 월세도 안 내고 이 정도 집이면 꽤 괜찮은 거 같은데.”
그러며 팔을 들어 손끝으로 허공을 그어 집을 훑는다. 그를 눈으로 따라가다 다시 시선을 옆으로 돌렸을 때 신이혁은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의도를 밝혔고, 너는 그에 응했어.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습관적으로 맞잡은 손을 꼼지락댔다.
그의 말이 맞았다. 사실 신이혁은 말로 명시하기 꽤 이전부터 자신의 생각을 은연중에 드러내 왔다. 뚜렷이 주장하지 않음으로써 주하얀에게 어물쩍 넘어갈 틈을 주었을 뿐. 세상에 의도 없이 투명한 친절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 신이혁은 자신의 속내를 밝혔고, 주하얀은 끝내 그를 끊어내지 못했다. 무지해서 결백한 주변인을 위장하기엔 이미 한참 늦은 거다.
“잘 모르겠어요.”
꺼질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까이 다가온 사람에게만 겨우 닿을 만큼 조심스럽다.
“나에 대한 게, 아니면 너에 대한 게?”
“…….”
“만약 모르겠다는 게 나에 대한 거라면. 분명히 해두는데, 나는 너랑 많은 걸 할 생각이야. 네 상상력의 범위 이상의 것까지도.”
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들킨 기분이다. 정작 자신의 입으로 그런 것을 원한다고 선언한 사람은 거리낌이 없는데 주하얀만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당황으로 깜빡거리는 눈을 보고 신이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 지는 꽤 됐지. 예상하자면 어느 시점부턴 상대도 알아챈 것 같고.”
“…….”
“결과적으로 내가 점수를 좀 따야 하는 상황이거든. 안락한 주거환경과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는 정도야 나한테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그래서 이렇게 애원하는 거고.”
끝말은 장난스러운 기운이 서렸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가장 잘 함축했다고 생각한다. 손에 힘을 주자 여즉 쥐고 있던 종이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리고 하얀이에 대한 건, 글쎄.”
잠시 고개를 기울여 관찰하듯 살피던 신이혁이 다가오는 게 시야 옆으로 보인다. 절로 목을 움츠려 얼굴을 숨겼으나 곧 턱이 잡혀 고개를 들었다.
“싫으면 밀어내도 돼.”
속삭이는 숨이 얼굴에 부딪혀 흩어진다. 주하얀은 곧 일어날 일을 안다. 눈앞이 흐리도록 가까워진 인영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쪽. 가벼운 입맞춤이 눈가에 내려온다. 양쪽 눈두덩이를 문지르고 지난 입술은 주름진 미간을 꾹 눌렀다. 눈 밑의 애교살과 광대, 볼을 간질이고 코끝에도 닿았다.
“아…….”
자꾸만 덜그럭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었다. 작게 열린 잇새로 숨 조각을 겨우 내뱉는 동안 볼을 쪼아대던 입술이 턱에 닿았다. 그리곤 당연하다는 듯 아래로 향했던 방향을 바꿔 입술에 맞닿았다.
“음.”
주하얀은 꽉 쥐고 있던 손을 발작적으로 털어내곤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반사적으로 옷자락을 틀어쥐는 손이 다급하다.
얼굴 곳곳을 지분댄 입술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살이 부대껴 겹쳐지기 무섭게 입맞춤이 깊어진다. 색색대는 숨을 내쉬려 벌어졌던 틈이 손쉬운 진입로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놀라 그를 밀어냈지만 요동조차 없다. 뒷목이 붙들리고,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턱이 들렸다. 크게 벌어진 입이 불편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흐, 잠…. 아.”
이 행위와 상황에 대해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자꾸만 생각이란 게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숨 죽어버렸다. 되려 무시하려 할수록 질척히 닿은 것에만 신경이 쏠린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도 잡지 못한 채 호흡곤란에 시달려 간간이 어깨만 떨던 주하얀은 그가 집요하게 턱을 까딱거렸을 때쯤 인내를 다 써버렸다. 아니, 그보단 생존의 위협이 강했다.
바투 붙은 몸을 닿는 대로 가격하며 고개를 털어낸 주하얀이 턱 끝까지 찬 숨을 콜록거리는 동안 신이혁은 등을 쓸어주었다. 달래는 목소리에 기꺼운 기색이 서린다.
“저런. 괜찮아?”
기침을 하느라 붉게 열이 오른 볼에 입술을 비비적대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던 가슴팍이 조금 진정되자마자 다시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방금의 경험으로 몸을 움츠리는 주하얀을 살살 달랜다.
“천천히 할게.”
“하아, 하….”
“아까는 미안. 이번엔 그렇게 안 할 거야.”
억울한 표정을 지은 주하얀이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입꼬리가 처진 입술을 엄지가 가만가만 매만진다.
“하얀아.”
“……. 천천히.”
“그래. 천천히. 계속 숨 쉬고.”
“…네.”
그는 혹여 주하얀의 숨이 다시 버거워질까 입꼬리 안쪽으로 엄지를 비집어 넣어 숨 쉴 틈을 만들어주었다. 아직 진정되지 못한 더운 숨이 손가락을 간지럽히며 부서진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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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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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