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약속대로 가볍게 입술이 맞닿았다. 초반부터 밀어붙이던 처음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러기 위해 신이혁은 자신의 부족한 자제력을 끌어와야 했다. 살면서 해본 키스 중 가장 장난스럽고 간지러웠지만, 나쁘지 않다. 어떻게든 따라와보려는 엉성한 움직임도 기특하고 미처 힘은 주지 못하고 목에 둘러진 팔도 귀엽다.
“쪽.”
긴 키스가 끝났을 때 주하얀은 소파에 누워있었다. 몸을 그에게 맡기고 있던 어느 순간부터 등에 푹신한 감촉이 닿았던 것 같다.
신이혁이 상체를 세우고 주하얀을 내려보았다. 두 번째 키스도 역시 제법 힘이 들었는지 발갛게 오른 얼굴과 흐트러져 내린 머리칼, 가쁘게 숨을 토해내는 입술까지 눈으로 훑다 급히 몸을 숙였다. 더 이상 나아갔다간 아무래도 주하얀을 힘들게 하지 싶었다.
“내일 바로 집으로 들어와.”
“……. 네.”
그는 눈앞머리에 입술을 묻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주하얀은 숨에 섞인 대답을 토하듯 뱉어냈다.
마치 처음처럼 얼굴에 닿는 대로 입을 맞추던 그는 곧 세 번째, 입술을 찾아들었다.
* * *
“준비 다 했으면 나가자.”
드레스룸에서 코트를 걸치고 나오자마자 먼저 현관으로 나서는 등을 따라 주하얀도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고요한 집이 어색해 되는대로 틀어뒀던 티브이를 끄고 현관 쪽으로 향하자 이미 신발을 신은 신이혁이 기다리고 있다.
“하얀아.”
“네?”
서둘러 신발을 찾아 눈을 굴리던 주하얀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기 무섭게 양볼이 잡혔다. 그대로 끌려가 뽀뽀를 한 신이혁은 아직 어안이 벙벙한 채 뒤늦게 제 입술을 가리는 것을 보곤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천천히 나와.”
웃음기 가득한 말투는 태연했고, 얼굴을 붉히는 건 주하얀뿐이다. 꾸물꾸물 발을 꼼지락대며 신발을 신다 손 아래 숨긴 입술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자꾸 신경 써서 그런지 꼭 부어오른 것 같다.
어제저녁 수차례 이어진 키스 이후로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입술을 들이밀었다. 사실 이전에도 몸을 지분댄다거나 애먼 곳에 입술을 대는 식의 스킨쉽이 있었지만, 지금관 상황이 달랐다.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아까 전 오전에도 아침을 먹고 늘어져 쉬고 있는 걸 끌어당겨 제 무릎에 앉혀두고 깊게 입 맞췄다. 그리곤 어제처럼 힘에 부친 주하얀이 어깨를 통통거리고서야 놓아주었다.
“벨트 매고.”
주하얀은 괜히 울렁거리는 마음을 잠재우며 안전벨트를 가슴 앞으로 둘렀다. 어제 계약서가 기점이 된 건지, 여태 잘 감추고 적당히 모른 척했던 것이 무색하게 신이혁은 원하는 바를 숨기지 않았다. 지금도 혹여 그의 손이 다가올까 서둘러 벨트를 채우곤 손바닥으로 무릎을 문질렀다.
짐을 챙긴다는 명목으로 들렀으나 딱히 가져갈 만한 것이 있진 않았다. 대부분의 짐이랄 것들은 아파트에서 월세방으로, 지상에서 반지하로 옮기며 버린 게 허다했다. 서랍장을 뒤져 빈 통장과 도장, 합격통지서를 챙겼다. 겨우 사진첩 하나로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흔적은 가방 제일 안쪽에 밀어 넣었다. 평소 잘 입던 옷들도 하나씩 꺼냈으나 이내 저지당했다. 어차피 새로 사 줄 테니 꼭 필요한 것만 챙기라는 이유였다. 결국 아직은 버리기 아까운 교복만 챙겨 들었다.
그래도 2년이 넘게 산 집인데 짐은 책가방 하나를 겨우 채울 정도였다. 미련인지 불안인지 가방 지퍼를 올리고도 매 분마다 집안을 한 번씩 훑어보던 주하얀은 그렇게 삼십 분을 더 미적거린 끝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언젠간 할 일이었고 의연히 해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현실은 상상과 달랐다.
“다음에 한 번 더 분류해서 가져다줄 테니까 그때 자세히 봐. 정 버리기 아까우면 방 하나 창고로 둬도 되고.”
“네.”
“이왕이면 하얀이 방을 창고로 쓰면 되겠네. 짐에 밀린 방 주인은 나한테 오고.”
가벼운 우스갯소리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가방끈만 돌돌 말고 있자 손이 다가와 머리를 쓸고 간다.
그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네 마트 옆에 딸린 365일 은행 코너에 들렀다.
어제 계약서를 쓴 직후 돈을 송금했다는 말이 떠오른 탓이다. 주하얀은 통장을 펼쳐 들고도 기계 앞에 잠시 서 있었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면 실체 없는 무언가가 현실이 될 것 같았다. 모서리가 해진 통장을 만지작거리던 주하얀은 숨을 고른 후 버튼을 누르고 음성안내에 따라 통장을 기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잔액 11,903,524원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누가 볼세라 얼른 취소 버튼을 눌러 통장을 뽑아내 손에 꼭 쥐고 유리문을 박찼다.
“확인했어?”
“네.”
무얼 걱정하는지 미적거리며 차를 내리더니 상기된 얼굴로 돌아온 주하얀을 신이혁은 웃으며 맞았다. 팔을 뻗어 볼에 손등을 댔다. 닿은 손이 차가워 주하얀은 그제야 자신의 얼굴이 빨개진 걸 알았다.
“그래. 똑바로 앉아. 다른 볼일은 없고?”
“네……. 감사합니다.”
혹시 잃어버릴까 꼭 쥐면서도 구겨질세라 힘도 주지 못하는 손을 내려봤다. 납작한 종이 몇 장일 뿐인 통장이 이렇게 귀하고도 무겁게 느껴지는 게 이상하다.
“나한테 감사할 일은 아니지. 거저 준 것도 아니고.”
들뜬 듯 몽롱한 듯 건넨 인사를 신이혁은 대수롭잖게 넘긴다. 그는 이따금씩 타인의 사의를 달갑지 않게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도리어 도움의 의도를 순수히 보이게 한다는 걸 알까. 주하얀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며, 그의 호의에 의탁하고 있음을 둘 모두 알고 있다.
가슴이 부풀 정도로 들이쉬었던 숨을 내쉬며 시트에 등을 깊게 기댔다. 창문 밖으로 줄지은 가로수가 빠르게 스친다.
단지 소유한 주머니의 크기로 이렇게 평화로운 기분을 느껴도 되는 건지, 평소라면 비웃었을 그 간사함이 마음을 둥글게 만든다.
“졸려?”
자신은 있는지도 몰랐던 번화가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오느라 시간은 이른 오후였다. 식곤증 때문에 몰래 하품을 두어 번 했는데 그걸 알아챈 모양이다. 조금 민망해져 일부러 눈을 크게 떴다.
“아니요. 괜찮아요.”
“집에 들어가서 좀 자.”
부자연스럽게 커진 눈을 깜빡이는 주하얀을 곁눈으로 살핀 신이혁이 말했다. 역시 안 통하는구나. 뻐근하게 힘 준 눈가를 풀었다.
삐, 삐, 삐. 차가 후진할 때마다 울리는 시끄러운 센서음에 잠이 조금 물러나는 느낌이다. 주차를 마치곤 차고 내부와 연결된 간이 현관으로 집에 들어섰다. 이젠 익숙하게 현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제풀에 묘했다.
“다녀왔습니다.”
빈집에 대고 조용히 인사한 주하얀이 곧장 2층으로 가는 계단을 밟았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매고 있던 가방을 던져두고 외출 전 벗어 침대에 널어두었던 홈웨어를 집어 들었다.
다행히 멍하던 잠기운도 물러나 정신이 조금은 맑아졌다. 타인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려면 환히 개인 머리가 필요하다. 평소라면 귀찮아서 흐늘거렸을 환복을 1분도 안 되어 마친 주하얀은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
신이혁은 아직 방에 있는지 거실에 보이지 않았다. 잠시 소파에 앉아 기다리니 그가 방에서 나왔다. 주하얀은 이제 집주인의 방을 구분할 수 있다. 방금 나온 곳은, 드레스룸.
“빠르네.”
신이혁은 소파에 앉은 주하얀을 바로 알아챘다. 당연하게도 다가와 옆에 앉더니 테이블에서 티브이 리모컨을 끌어오는 동안 주하얀은 허리를 세운채 고개만 돌려 행동을 좇았다. 시끄러운 TV 소리가 둘 사이를 메우자 조금은 입을 떼기 수월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그가 고개를 돌린다. 조금만 상체를 틀어도 몸이 닿을 만큼 가까웠기에 서로를 바라보는 게 마주 앉았을 때만큼 편치 않다. 대신 신이혁은 상체를 비틀며 등받이 위로 팔을 걸쳤다. 꼭 그의 영역 안에 자리 잡은 것 같다.
“뭘 그렇게 비장하게 얘기해.”
“비장까지는 아니고.”
“뭔데. 얘기해봐.”
가벼운 재촉에 잠시 말을 고르듯 닫혀있던 입이 열렸다.
“사장님께서 저를 많이 도와주신 거 알고 있어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친한 사람 도와주기도 쉽지 않은데 여타 관계도 없는 타인을 도와주신 거니까, 음…. 그 점 너무 대단하시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감사하기도 하고요. …제가 하려는 말은…. 절대 싫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오해 없으셨으면 좋겠는데요.”
분명 머릿속으로 정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은 온통 변명이다. 핵심을 벗어난 채 답답하게 빙빙 돌기만 하는 대화에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아무래도 사장님께 계속 신세 지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 말재주가 없다는 게 이렇게 아쉽기는 처음이다. 나름 말을 맺어야겠다고 생각해서 결론을 꺼내놓고 눈을 꼭 감았다 떴다. 제가 보기에도 너무 급작스럽고 앞뒤 없는 마무리였다.
음. 듣는 사람 배려 없이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툭 뱉어내곤 입을 다문 주하얀 앞에서 신이혁은 골몰하듯 가만히 목을 울렸다. 검지로 관자놀이께를 짚은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맹랑한 아이를 살폈다.
“그러니까. 나랑 같이 사는 건 싫다?”
자신이 하고도 정리가 안 되는 말을 다행히 이해한 건지 그가 핵심을 짚어낸다. 주하얀의 생각보다 더 과격하며 냉정한 표현이긴 했으나 비슷은 했다.
“싫다기보단….”
“분명 어제는 이 집에 들어오는 것에 동의했던 걸로 아는데.”
“그때는….”
지난밤을 떠올리자마자 자동적으로 딸려오는 다른 기억에 당황스레 눈을 굴리던 주하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잘 익은 딸기 같은 얼굴을 보고도 신이혁은 평소와 달리 고개를 조금 기울일 뿐이다.
“아. 그때는 키스 때문에 얼결에? 내가 키스를 꽤 만족스럽게 했나 봐.”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저런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신이혁의 몫일 수치까지 자신이 다 뒤집어쓴 것 같아 주하얀은 얼른 앞으로 손바닥을 내밀어 말을 막았다. 그는 원래 그러려고 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지만 주하얀은 후에도 한참이고 뜨끈한 얼굴을 식혀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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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