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어 마이 세큐리티-40화 (40/61)

40화

“그래. 가족도 아닌 남이랑 산다는 게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지.”

“….”

“게다가 빚쟁이와 매한가지인 사람의 뭘 보고.”

“아니, 그게 아니라.”

맞는 말이면서도 묘하게 자기 비난적인 말을 다급히 막은 주하얀이 제 머리를 헤집었다. 자신의 머리가 더 좋았거나, 말을 조리 있게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의 말은 반박할 여지 없는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자신이 밤새 고민한 지점은 그게 아니었다. 물론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긴 했으나 그걸 고민하기엔 이미 진즉 글러먹었다. 그것보다 주하얀이 주저한 것은.

“저는 더 이상 누구에게 기대고 싶지 않아요.”

학생이자 미성년자였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가족’과 ‘가정’에 매달려야 했으나 지금은 다르다. 성인이 된 자신은 비로소 조금 더 자유롭게 설 수 있게 되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가족이라는 썩은 줄에라도 매달려야 하는 처지였다면 이젠 그 줄에서 내려와 두 다리로 설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주하얀은 꽤나 오래 바라왔다. 누구의 구애도 간섭도 없이 자신만으로 완성일 수 있는 때를.

그의 집에 들어온다면 물론 많은 면이 주하얀에게 득이 되겠으나 진정 바라던 독립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또 다른 비빌 언덕을 찾아 옮길 것뿐, 진정한 독립이 될 수 없다.

“이미 많은 도움을 받아놓고 이런 얘기 어이없이 들릴 수도 있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새로 집을 얻겠다고. 마침 돈도 생겼으니 타이밍이 좋네.”

“…….”

“돈을 빌려주지 말걸 그랬나.”

잠시 고민하듯 손가락 등으로 턱을 쓸어내린 신이혁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주하얀은 얼른 덧붙였다.

“바로 나가겠다는 건 아니에요. 어제 동의한 거 당연히 기억하고요.”

물론 상황상 물 흐르듯 거절하지 못했던 점이 절반 이상이겠으나, 그렇다고 책임을 회피할 뜻은 없다. 그랬다면 애초에 그와 나란히 반지하 방에 가 하등 쓸모없는 물건들을 뒤적여 짐을 정리하는 일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가 얘기한 부분에 대해선 지킬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말하는 건…. 더 이후의 일이에요. 언제까지고 사장님께 의지할 수는 없잖아요. 언젠가 제가 준비가 되면, 사장님이 허락할 때요.”

“나중의 일.”

“네. 그때까지는…. 염치없는 건 알지만 말로라도 분명히 해두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심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나중의 일.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혼잣말인 듯 조곤조곤했지만, 시선이 마주친 상태였기에 주하얀 또한 다시 “네.” 작게 답했다. 나중이라는 말이 얼마나 먼 훗날을 기약할지 가늠해보는 듯했다.

“그런 거라면 뭐라고도 못하겠군.”

“…….”

“너무 기특해도 탈이네.”

턱을 괴지 않은 손이 다가와 머리를 쓸고 간다. 아까 전과 같은 무표정이었으나 미묘하게 풀어진 표정으로 그의 기분이 나아졌음을 알아채고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모르는 사이에 긴장했던지 어깨가 풀린다.

“키스에 홀렸다고 엄살을 피웠어도 귀엽긴 했을 텐데 말이야.”

“네?”

“농담이야.”

종잡을 수 없는 발언에 주하얀의 시선이 단번에 신이혁에게 꽂혔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어느 쪽이든 곤란해 눈만 굴리는데 흰 눈으로도 얼굴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왜, 왜….”

“화해의 의미로?”

그와 자신이 싸웠던가? 그렇다기엔 자신만 일방적으로 곤란한 구도였던 것 같은데. 하지만 여기서 꼬투리를 잡자니 다시 돌아갈 대화 주제가 영 건전하지가 않았다. 결국 주하얀은 가까워진 인영에 시야가 흐릿해질 때쯤 눈을 감았다.

* * *

[데리러 갈게.]

벌써 다섯 번은 들여다본 메시지를 다시 확인한 주하얀은 답장을 보내는 대신 핸드폰을 패딩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가요.”

“네.”

먼저 주방을 빠져나와 홀을 살피는데 막 불을 끄고 나온 직원이 등을 툭 두드렸다. 오후부터 저녁까지 손님이 몰리다 못해 마감하는 틈틈이 시달린 통에 등을 치고 간 손도, 그 손에 맞은 몸도 힘이 없다.

“지난주엔 감사했어요.”

“저번 주요? ”

“금요일에 알바 빠졌던 거요. 사장님이 도와주셨다 해도 힘드셨을 텐데.”

“아아. 다른 사정도 아니고 부모님 관련인데요 뭐. 사람이 인정머리가 있지.”

당연한 소리를 한다며 타박하는 직원의 말에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뭉그적댔다. 가까운 병원에 옮겨두고 관심을 끊은 자신은 인정머리가 있는 쪽일지, 없는 쪽일지.

가로등과 불 켜진 사무실로 밤임에도 골목이 밝다. 열쇠로 문을 잠그고 혹시 몰라 닫힌 문을 흔들어 확인한 후에 둘은 양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지친 인사를 나누고 직원이 멀어지는 동안 주하얀은 가게 앞에 세워진 차에 다가갔다.

도로가에 세워진 차가 한 대뿐이어서도 있지만, 이젠 번호판을 외워 차만 봐도 알 수 있다.

“뒤로 타.”

다가가 조수석 문을 열자 차 안에서 목소리가 말했다. 빼꼼 고개를 숙여 안을 살피자 운전석에 앉은 사람은 신이혁이 아니었다. 내킬 때마다 운전기사를 대동했기에 언제나 복불복이다.

“안녕하세요.”

“고생했어.”

방금의 실수 아닌 실수로 머쓱하게 차에 오르자 언제나처럼 나태하게 앉은 남자가 반긴다. 갈퀴처럼 편 손이 머리를 쓸고 가 어깨에 닿는다. 필시 얼른 등을 시트에 붙이지 않았더라면 손이 더 아래로 내려갔으리라.

“안 불편해? 가까이 와.”

사실 편하기로 치면 중앙을 띄고 각자 한 좌석씩을 차지하고 앉은 게 제일 편하다. 하지만 그런 당연한 사실 따위 모른다는 듯 신이혁은 자꾸만 주하얀에게 가까이 오라고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은근슬쩍 감싼 어깨를 당기는 통에 기우뚱한 허리가 아파 결국 엉덩이를 들썩였다. 더 와. 더 와도 괜찮아. 허벅지가 서로 붙기 직전이 되어서야 재촉이 멈추었다. 졸지에 좌석 중앙 언덕에 앉게 된 주하얀만 자세가 영 불편해졌다.

“불편해요.”

“괜찮아.”

“제가 안 괜찮은데요.”

“난 괜찮아.”

“혹시 추워서 그렇게 붙어 앉으신 건가요?”

불편을 호소해봐도 들은 척도 않는 상대방이 답답할 따름이다. 심드렁한 대꾸에 받아치려는데 앞자리에서 불쑥 질문이 끼어든다. 덕분에 주하얀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아까 전 직접 대면까지 했으니 새삼스럽게 끼어든 존재감 때문은 아니고, 꼴사납게 붙어있는 걸 들킨 느낌이라 그랬다. 부끄러워. 순전히 주하얀만의 몫일 감정이다.

“일은 어땠어. 오늘도 바빴겠지.”

“네. 손님이 안 끊겨서 계속 일만 했어요.”

“그래 보이네. 눈이 반쯤 감겼어.”

그의 말에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주먹을 쥐고 눈두덩이 위를 둥글게 문지르는데 시야가 차단된 사이로 손에 온기가 닿는다.

“비비지 마. 눈 다쳐.”

부드러운 힘에 이끌려 손을 내리자 까맣게 흐려졌다 돌아온 얼굴이 성큼 내려온다. 그리곤 한층 가까워진 거리 때문에 갈 곳을 잃고 눈을 굴리는 주하얀을 가만히 살핀다.

“그새 빨개졌다.”

“아.”

“졸리면 자. 도착하면 깨워줄게.”

그의 손은 눈가를 다 덮을 정도로 컸다. 조심스러운 힘에 눌려 머리가 기울자 귀 옆으로 도톰한 옷감이 닿았다.

“곧 있으면 사장님 댁에 도착합니다.”

타인의 존재는 아무리 지우려 해도 껄끄럽게 남기 마련이다. 애써 잊을 즈음이면 존재를 상기시키는 목소리에 주하얀이 어정쩡하게 기댔던 몸을 일으키려 하자 신이혁이 눈을 가렸던 손으로 얼굴을 눌러 저지한다.

“김 팀장님 기쁜 일 있었나 봐요. 오늘따라 말이 많네.”

“그래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애매하게 자면 더 피곤하니까 걱정이 되어서,”

“더 걱정했다간 고백이라도 하겠네요. 미리 사양하겠습니다.”

귀찮은 일을 대하듯 불퉁한 목소리로 말을 쳐내며 신이혁은 다시 손을 눈가로 가져갔다. 둘의 사이에 끼어 어쩔 줄 몰라 실눈을 떴던 주하얀은 다시금 어두워진 시야에 슬금 눈을 감았다.

“타지 생활이 고돼 그런지, 요 근래 감정 기복이 생긴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어느 분과 달리 전 가급적 빨리 제 집으로 돌아가고 싶기 때문에 자꾸만 부름을 무시하시는 게 답답해서…….“

“알겠으니 운전이나 하세요. 남은 하소연은 내일 들어줄 테니까.“

아마 김 팀장이라는 사람과 다투기라도 했나 보다. 아니, 다툼이라고 치기엔 한쪽이 일방적으로 시달리는 모양새이니 적절하지 않은가. 그는 종종 자신을 잔소리의 방패막처럼 쓰곤 했다. 타인의 존재가 입을 다물 키가 된다는 걸 아는 거다.

“차 가지고 퇴근하세요. 내일 시간 맞춰 집으로 오시고요.”

“그냥 택시 타고 퇴근하겠습니다.”

“늦지 않게 오세요.”

집에 도착한 후, 신이혁은 김 팀장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차를 떠넘겼다. 일찍 오라고 강조했지만 사실 더 늑장을 부리는 건 언제나 그이다. 그건 팀장도 알고, 그도 알았다. 둘의 다툼을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예상과 달리 나이에 안 맞게 유치하다 싶기도 했다.

방으로 올라와 짐을 내려놓고 곧장 샤워를 했다. 피로한 몸에 따뜻한 물을 끼얹자 절로 등이 굽고 단 숨이 터져 나온다. 노곤하게 데워진 채 욕실을 나온 주하얀은 느그적거리며 1층으로 향했다. 빈 거실을 가로질러 소파에 반쯤 눕듯이 앉아 티브이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안 자?”

“자야죠. 졸려요.”

말과 달리 리모컨을 꼭 쥐고 TV에 시선을 고정한 주하얀의 옆에 방에서 나온 신이혁이 와 앉는다. 가깝게 붙어 앉아 실크 잠옷이 살에 달라붙는다. 처음엔 미끄러운 감촉에 영 적응이 안 됐는데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곧 열두 시야. 피곤하다며.”

“네에.”

저지할 틈도 없이 머리를 끌어안아 관자놀이 옆으로 입을 맞추기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피곤하지만 않았어도 하지 말라고 부산을 떨었을 텐데.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꺼풀이 끈적하게 붙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대로 잠들기엔 아쉬워 자꾸만 미련을 떨게 된다.

지금도 평소엔 별로 관심도 없던 애견 프로그램을 보며 시간을 끌다가 쩍 하고 하품을 했다.

“개 좋아해?”

“개……. 라기엔 강아지에 가깝지 않나요.”

화면엔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강아지 5마리가 한 데 뭉쳐 밥을 먹고 있었다.

“그래 강아지.”

“뭐. 귀엽죠. 작은 애들은.”

“한 마리 키울래?”

“개 좋아하세요?”

“딱히, 동물은. 그래도 하얀이가 좋아하면.”

“저도 이렇게 보는 것만 좋아해요. 아니, 보는 것도 특별히 좋아한다고까지는….”

이제 강아지 5마리는 밥을 다 먹고 마당을 뛰어다녔다. 화면에 비친 강아지들은 충분히 귀여웠지만 딱히 눈앞에서 직접 보고 싶다거나, 키우고 싶다는 감상을 끌어내진 못했다.

무엇보다 주하얀은 무언갈 돌보는 입장이 될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온전히 자신에게 매달린 생명이라니 추를 단 것처럼 무거울 것 같다.

“하긴. 그런 게 있으면 깡깡대며 방해나 하겠지.”

“으.”

“이런 것도 마음 편히 못 하고.”

신이혁은 제 행동을 ‘이런 것’으로 뭉뚱그리며 주하얀의 얼굴을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힘을 준 손에 볼이 눌려 앞으로 툭 튀어나온 입술을 제 입술로 괴롭힌 후 손에 들린 리모컨을 빼앗아간다.

모든 동작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기 때문에 주하얀이 축축해진 입술을 말아 물었을 때는 티브이의 전원이 꺼졌다.

“오늘 놀이는 끝. 이제 방에 가서 자.”

툭. 리모컨을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먼저 일어난 신이혁이 주하얀의 손목을 잡았다. 스킨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이 마냥 의연해졌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의 행동은 언제나 자연스럽고 대범해서 도리어 주하얀을 삐걱거리게 했다.

팔 한쪽만 덜렁 들린 채 앉은 걸 보며 신이혁은 눈으로 웃었다.

“더 놀고 싶으면 내 방으로 와. 아니, 지금 가자.”

당장이라도 잡아끌 것처럼 몸을 기울이자 그제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주하얀이 잡힌 손 위로 다른 손을 얹었다.

“저는 이만 자러 갈게요.”

졸리네요. 네, 졸려요. 눈도 감기고. 혹여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기라도 할까 얼른 말을 덧붙인 주하얀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떠 끔뻑거렸다. 신이혁은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저었지만 다행히 얼굴 만면엔 웃음을 띠운 채였다.

“하얀이 꼬시기 쉽지 않네.”

둘은 계단 앞까지 함께 당도했다. 한집에서 배웅이라면 웃기지만 꼴이 딱 그랬다. 2층까지도 같이 올라갈 기세의 신이혁을 달래 저지했고, 대신 짧은 키스를 나누었다. 밀어붙이는 힘에 휘청이는 주하얀을 끌어안은 신이혁이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

숨이 질척해질 때쯤 입술을 뗀 신이혁은 목덜미에 잠시간 더 고개를 파묻은 후에야 마른 몸을 놓아주었다. 머뭇거리는 손으로 씻고 나와 아래로 처진 앞머리를 쓸어준 주하얀은 계단을 올랐다. 허둥대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히 방에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곧장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의 앞에선 애써 달랬던 가슴이 포근한 공간 안에서 둥둥 울려댄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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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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