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놓고 가시는 물건이 없는지 확인해주세요.>
안내멘트와 함께 초기화면으로 돌아간 기계 앞에서 주하얀은 잠시 서 있었다. 사람이 많지 않은 평일 낮이라 다행이다. 딱히 팡파르가 터진다거나 벅찬 음악이 흐르는 것 따위를 바란 건 아니지만 단조로운 기계음과 함께 지나간 순간이 묘하다. 허무하다기보단 실감이 나지 않는 쪽에 가깝겠다.
여름엔 시원하게, 겨울엔 따듯하게 유지되는 은행 건물을 빠져나오는데 띠링, 알림이 울렸다.
[[한국대학교] 20XX학년도 등록금 입금 확인되었습니다. 영수증 출력은 홈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문의는 해당 번호로.]
짧은 문자를 세 번 읽은 후에야 여태 손에 쥐고 있던 명세표를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 사이 문자를 한 번 더 읽었다. 반대 주머니에 핸드폰까지 집어넣으려던 주하얀은 멈칫 손을 멈췄다.
“음….”
잠시 골몰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고민 끝은 짧았다. 길거리였기에 애써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지금 당장 이 기쁜 소식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저 등록금 냈어요.]
무작정 본론만 던져놓고 보니 메시지가 너무 불친절한가 싶다. 뒤늦게 뭐라도 덧붙일까 싶어 키패드를 올렸다가 다시 내리고 대신 화면을 서성이던 엄지를 아래로 쭉 그어 내렸다.
‘신이혁사장님’
딱딱한 이름을 한 사람과의 대화는 드문드문했지만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주하얀이 집에 들어온 후 데리러 간다거나 늦는다는 연락을 주고받던 게 비단 일주일 만에 꽤 일상적으로 바뀌었다.
[데리러 갈게. 조금 늦으니까 안에 있어.]
[네.]
[서재에 있는 컴퓨터 써도 돼요?]
[써도 돼.]
[무슨 케이크 좋아해?]
얼마 전엔 대뜸 좋아하는 케이크를 묻더니 홀케이크를 세 개나 사 가지고 왔다. 생일날에도 하나를 겨우 받을까 한 케이크가 앞에 놓이자 주하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결국 초콜릿 케이크 하나를 남겨둔 나머지는 이종훈과 아르바이트하는 카페에 줘버렸다.
스크롤이 길지도 않은 대화창을 훑어보는데 창 아래로 새로운 메시지가 밀려 올라온다.
[고생했어.]
간결한 문장을 읽기 무섭게 다시 메시지가 왔다.
[기념으로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생각해놔.]
제 스스로 한 일도 아니고, 그에게 축하받을 만큼 큰일도 아니라 조금 머쓱하다. 주하얀은 화면을 두드려 ‘네’ 짧은 답을 보내곤 양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밖에 좀 서 있었다고 그새 손이 시리다.
목을 움츠려 패딩 안으로 입을 숨기면서도 주하얀은 고민했다. 무엇을 하자고 하면 좋을까. 행복한 고민이다.
“진짜 이거로 되겠어?”
핸들을 잡은 신이혁이 묻자 안전벨트를 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의 제안에 주하얀이 내놓은 대답은 외식이었다. 평소에도 잘만 하는 외식이었기에 상대는 의아해했지만 주하얀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사실은 입학 기념으로 하고 싶은 것을 물은 사람이 이종훈이었다면 더 거창한 대답을 했을 것이다. 멀리 여행을 간다거나, 졸린 눈을 비비며 밤새워 논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 걸 신이혁에게 하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무언가를 기념하는 것 같으면서도 일상적인 일 중 나름 고민해 고른 것이 외식이었다.
“잘 잤나 보네. 눈 부었다.”
아침부터 일이 있다며 먼저 집을 나섰던 신이혁덕에 주하얀은 해가 뜨거워질 즈음에서야 눈을 떴다. 그나마도 혹시나 해 전화로 깨워줬으니 망정이었다.
늘어지게 잔 탓에 팅팅 부은 얼굴을 훑어본 주하얀의 턱에 손바닥을 댔다. 엄지와 검지로 볼을 누르자 살이 눌려 툭 튀어나온 입술에 쪽, 입을 맞추고서야 주하얀을 놓아주었다.
부드럽게 차고를 빠져나온 차가 도로로 접어들 때까지 주하얀은 부어오른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하얀이 그럼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니?”
“네. 시간이 모자라서.”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연락을 받고도 침대에 비비적거리며 늑장을 부리느라 그런 거지만.
“예약은 저녁으로 해뒀으니까…. 도착하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걸 찾아보자.”
“아. 괜찮아요. 지금 배도 딱히 안 고프고.”
“지금은 몰라도 돌아다니다 보면 금방 체력 떨어질걸.”
“저희 지금 어디 가는거예요?”
지금 시각이 오후 2시니 저녁을 위해 나서기엔 이른 시간이다. 아까 전 연락을 받았을 때도 외식을 위해 나오라고만 했지 그 전에 어디를 간다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 방금의 말로 유추했을 때 조금 궂은일을 앞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답 없이 웃기만 하는 신이혁의 면면을 뜯어보던 주하얀은 결국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따듯한 햇살과 코를 간질이는 히터 열기에 꾸벅꾸벅 졸다 부름에 깨어났을 때 이미 차는 주차까지 마친 후였다.
“일어나 하얀아.”
“으응…. 안 잤어요.”
조느라 꺾인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 주하얀은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 모습을 보고 픽, 웃음을 흘린 신이혁이 먼저 차에서 내리자 손가락등으로 눈을 비빈 주하얀이 뒤를 따랐다.
차가 줄을 이은 주차장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챘다.
“여기엔 왜….”
실내로 들어오자마자 따갑도록 눈을 때리는 조명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하얀이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있는 백화점이었다. 총 면적의 대부분이 주택단지인 우상동은 오락거리가 부족해 제대로 놀려면 익히 이 지역까지 오가곤 했다. 물론 정확한 목적지는 백화점이 아닌, 백화점 주위의 상가 밀집지역이었다.
그나마도 주하얀과는 먼 얘기라 십수 년을 우상동에서 살며 10번도 와보지 않은 곳이다. 그것도 항상 지하철로만 다녀 차가 가는 방향을 보고도 알아채지 못했다.
“왜 왔을 것 같은데?”
“어…. 뭐 사실 거 있으세요?”
“살 거야 많지. 근데 내건 아니고 하얀이 거.”
“제 거요?”
주하얀은 신이혁의 뒤만 따라 걷다 놀라 주위 매장을 둘러보았다. 손님보다 점원이 더 많은 것 같은 매장은 척 봐도 비싸 보였다. 옷이라면 동네 마트에서, 그것도 세일 코너에서밖에 사보지 않은 주하얀에겐 무리였다.
“아니요, 전 괜찮은데요. 원래 입던 옷이랑 어, 사장님이 사주신 옷도 많고.”
동네 마트에서 백화점이라니. 몇 단계나 뛰어넘은 기분에 지레 겁을 먹은 주하얀이 얼른 손목을 잡고 늘어졌다.
“음?”
그 결에 걸음을 멈춘 신이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생각이 빤히 보이는 어린 얼굴에 눈을 가늘게 떴다. 좁아진 눈 끝에 웃음기가 맺힌다.
“짐 옮길 때 웬만한 옷은 다 버리고 오지 않았나.”
“그래도 지금 당장 입을 건 다 있어요.”
“옷은 많을수록 좋잖아. 이젠 교복을 입는 것도 아니고.”
“필요하면 제가 다음에 알아서 살게요.”
“온 김에 사.”
“아니…….”
말을 더 하려는지 입을 뻐끔대다 마는 것을 보곤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딱. 큰 마찰음에 주하얀의 시선이 위로 올라간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입학 선물이라고 생각해.”
“…….”
“어차피 옷장에 있는 옷 몇 벌 더 느는 것뿐이잖아.”
분명 성인이 되어 대학교에 입학하는 일이 축하할 일은 맞았으나 그 축하를 그에게 받으려니 마음이 미묘했다. 밥을 사는 정도는 지인 간에도 할 수 있다 치겠지만 본격적으로 선물을 사주는 건 주하얀의 입장에선 친밀한 관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물건을 사는 장소가 백화점이라니. 이건 마치 둘의 사이가 매우 가깝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단순히 채권자와 채무자가 주고받기엔 도움이 과하다.
애써 단순한 단어로 끼워 맞췄던 관계가 자꾸만 틀어진다. 마음이 편치 않다.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다. 오늘 주하얀의 하루는 온통 그의 호의와 친절로 채워졌다. 그의 집에서 눈을 떴으며, 사준 옷을 입고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이동했다. 쇼핑이 끝난 후엔 그에게 밥도 얻어먹을 예정이었다.
자신의 상황을 돌이켜보고 염치없이 머쓱해져 다급하게 잡아챘던 손목을 놓아버리자, 이번엔 그가 손을 붙잡았다. 힘도 다 주지 못하고 헐겁게 잡은 게 겨우였던 주하얀과 달리 단단히 마주 잡는다.
다시 걷는 신이혁을 따라 얼른 발을 재개 움직였다. 괜히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푸하.”
주하얀은 입술을 파묻고 있던 아이스크림 콘을 내려놓고 막혔던 숨을 내쉬었다.
방금까지 물었던 곳만 아이스크림이 녹아 맨질거렸고, 체온에 녹은 액체는 그대로 입술에 묻었다. 입술 주변까지 온통 딸기 아이스크림의 분홍색이 번들거리는 꼴을 보고 신이혁은 일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애들은 알 수가 없다니까. 한숨 같은 말과 함께 건넨 냅킨을 받은 주하얀은 혀로 입술을 쓸곤 입 주위에 남은 것은 냅킨으로 닦아냈다.
“그냥 숨 안 쉬고 얼마나 먹을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신기한 생물체라도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상대에 웅얼대며 변명하곤 아이스크림의 녹은 부분을 크게 베어 물었다.
달달한 맛이 입에 감도니 기운이 좀 나는 것도 같다.
“쇼핑이 쉬운 일이 아니네요.”
4인 테이블의 빈 의자마다 올려진 쇼핑백을 훑어보곤 피로한 발을 동동거렸다.
신이혁은 매장에 들어갈 때마다 기본 세 착장을 내밀었다. 옷 세 개가 아니라 완성된 착장으로 세 벌. 덕분에 몇 번이나 탈의실을 오가며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계절에 맞춰 두꺼운 겨울옷을, 곧 다가올 봄과 여름을 위해 얇은 옷을, 그에 맞춘 신발과 가방, 심지어 시계까지 사니 양손이 가득 차 쇼핑백을 들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무슨 소리. 돈 쓰는 것만큼 쉬운 일이 없는데.”
의자에 늘어지듯 기댄 주하얀을 보던 신이혁이 제 몫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곤 중앙에 놓인 와플 접시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먹어. 따듯할 때.”
“네.”
“너무 많이 먹진 말고.”
“네.”
“그리고 하얀이는 체력을 길러두는 게 좋을 것 같네.”
막 트레이에 있는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어 와플을 자르던 주하얀은 움칠 손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자 마찬가지로 접시에 가있던 시선이 올라온다. 눈이 마주친다.
“네?”
“이 정도면 심각하지. 나이도 어린데.”
태연한 힐난에 주하얀은 괜히 나이프로 접시만 긁어댔다. 여기서 나이 얘기가 왜 나온담. 아니, 그런 면으로 치면 어린 사람이 더 나은 것 아닌가.
“그래도 저 정도면 체력 좋은 편인데요.”
“비교 대상은?”
“…학교에서?”
거짓말은 아니다. 1년에 한 번 하는 체력장마다 주하얀은 대체로 모든 종목에서 상위권의 기록을 냈다. 딱히 어디서 자랑할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을 영 실속 없이 보는 시선에 대한 반박 정도는 될 것이다.
“지역이 문제인가.”
한번을 그렇구나 하고 넘기지 않음에 항의하듯 조각 낸 와플을 공격적으로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애먼 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얄밉기 그지없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의 몸을 트집 잡으려 해도 어디 한 곳을 꼬집을 수가 없다.
쉬는 날이라고 평소와 달리 편한 니트를 입은 신이혁은 척 보기에도 몸이 좋았다. 아마 누구든 스치듯 보아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적당히 넉넉한 코트 아래로 반쯤 드러난 가슴팍이 니트를 판판히 받쳐준다. 목선은 두툼했지만 과하지 않았고, 웃을 때면 작게 패이는 보조개와 잘 어울렸다. 그와 이어지는 넓은 어깨선까지 훑은 주하얀은 테이블에 기대느라 구부정한 어깨를 바로 폈다.
“뭐, 본인이 괜찮다면 더 할 말은 없지. 그냥 나랑 어울려줄 정도만 하면 돼. 그 이상은 안 바라.”
주하얀이 그를 살피는 동안 똑같이 주하얀을 훑어본 신이혁이 깔끔히 말을 끝맺었다. 그리곤 들고 있던 잔의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옷매무새를 만지더니 지체 없이 몸을 일으킨다.
“슬슬 움직이자. 체력 좋은 하얀이라면 무리 없겠지.”
“네?”
“일어나. 얼른. 이러다 늦겠어.”
와플에 올라간 딸기를 포크로 찍다 말고 고개를 들어 올려 벙벙한 표정을 지었지만 신이혁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딸기 반쪽을 입에 넣곤 울상으로 따라 일어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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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