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이걸 다요?”
주하얀은 자신에게 건네지는 옷걸이를 받아 들면서도 곤란한 표정을 했다. 깃이 빳빳한 셔츠와 반듯이 눌린 바지. 그 위로 새로 얹어진 어깨 패드가 얇은 재킷을 괜히 수 세듯 검지로 매만졌다.
쉬고 싶다는 사람을 기어코 끌고 온 매장이 정장 코너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방으로 걸린 무채색톤의 정장 안에서 주하얀은 홀로 부유하는 이방인 같았다. 신이혁이 건성으로 벽에 걸린 넥타이를 살피는 동안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우두커니 옆에 서 있자 곧 시선이 돌아온다.
“뭐해 하얀아. 입고 나와.”
턱을 까딱여 매장 안쪽 탈의실을 가리키더니 짧은 고민을 마쳤는지 손에 들린 옷더미 위로 넥타이 하나를 더 걸친다.
저에게 옷을 떠넘기곤 태연한 남자와 그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있는 점원까지 돌아보았다. 점원은 시종 신이혁의 몇 걸음 뒤에서 기계적인 웃음을 띠었다. 척 봐도 쉬운 손님에 신이 난 게 다 보인다.
눈썹을 들썩이는 무언의 재촉과 점원의 단조로운 표정에 밀려 주하얀은 결국 탈의실로 들어갔다.
천천히 닫히는 문 사이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하아….”
비로소 혼자가 되자 제 손가락에 걸린 옷걸이를 들어 올렸다. 생전 입어본 적 없는 정장이 괜히 머쓱하다.
사실 교복도 따지자면 학생의 정장쯤 되겠으나 이건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건 그러니까, 진짜였다. 어른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직접 입게 되다니 절로 쑥스러워진다.
“부드럽네.”
셔츠 밑단을 바지 안으로 집어넣을 때 스쳤던 부드러운 촉감에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고등학교 입학할 당시 메이커가 아닌 동네 교복점에서 맞춘 교복은 소재가 까슬거려 심심하면 옷 위로 다리를 벅벅 긁어대야 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 낡은 교복이 맨질해지고서야 살이 빨개지도록 긁는 버릇이 사라졌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옷이 비단결이다. 벽에 닿지 않도록 팔을 휘둘러보던 주하얀은 꽉 끼거나 불편하지 않은 옷에 조용히 입술을 오므렸다.
“오.”
역시 비싼 게 최고인가. 와이셔츠는 조금 컸지만, 나머지는 치수도 딱 맞았다.
달칵-
옷을 갈아입느라 바닥에 늘어놓았던 옷가지를 어정쩡하게 주워 들고나가자 탈의실 근처 행거를 뒤적이던 신이혁이 고개를 튼다. 시선이 마주치기 직전 눈을 돌렸다. 이미 잘 갖춰 입은 바지와 셔츠를 매만졌다.
“다 갈아입었어?”
“…네.”
“잘 어울린다. 생각보다.”
가벼운 칭찬과 함께 가까이 다가와 어깨를 잡아 몸을 돌렸다. 거울로 된 탈의실 문에는 어색하게 굳은 가짜 어른과 그 뒤에 붙어 선 근사한 진짜 어른이 비췄다.
“교복 입었을 때도 괜찮았는데. 지금이 더 예쁘네.”
괜히 띄워주는 말을 하지만 사실 교복은 주하얀에겐 좀 많이 컸다. 대학 때까지 크는 사람도 있다는 말에 일부러 교복을 많이 크게 샀는데 아쉽게도 성장세는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딱 5센티가 크고 만 주하얀의 옷은 거슬릴 정도는 아니어도 몸에 맞는 사이즈는 못 되었다.
“어때 보여?”
자신의 모습을 보며 감상을 말하라니 민망함에 입을 한번 삐죽였다.
“괜찮은 것 같아요. 옷도 편하고.”
“근데 셔츠가 좀 크네.”
어깨에 있던 손이 팔을 타고 흐르나 싶더니 허리에 닿는다. 가슴 앞으로 둘러진 재킷을 들춰 속으로 침범한 손은 당연하게도 허리가 남는 천 자락을 쥐었다.
“…헙.”
제지할 틈도 없이 일어난 접촉에 놀라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그 점원은 다른 손님 응대를 위해 매장 입구 쪽으로 나가 있었다.
“이거로 갈아입어봐.”
다가왔을 때와 같이 스륵 멀어진 신이혁은 뒤쪽 행거에서 옷걸이 하나를 빼내었다. 지금 입고 있는 셔츠보다 한 치수가 작은 제품이다. 순순히 옷을 받아 들었다.
“…?”
“왜?”
“아니…. 왜 따라오세요?”
주하얀은 탈의실로 향하던 발을 멈추고 여전히 제 뒤에 바짝 붙어 선 신이혁을 향해 말했다. 분명 두어 걸음을 걸은 후였는데 처음 거울을 확인했을 때와 같이 자신의 뒤에 바특하게 붙어 있었다.
“신경 쓰지 말고 옷 갈아입어.”
“신경을 어떻게 안 써요.”
“넥타이는 안 맸네?”
“네. 맬 줄 몰라서요.”
교복에 넥타이는 한 세트였지만 그건 단순히 넥타이 모양 지퍼였고, 진짜 넥타이는 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매는 방법도 모른다.
“도와줄게. 먼저 들어가.”
“네? 아니요. 괜찮은데요.”
“맬 줄 모른다며.”
“그럼 그냥 제가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밖에서 매 주세요.”
“계속 여기 서서 떠들 거야? 다른 사람도 탈의실 써야지. 얼른 들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다급히 항변하려고 했으나 그보단 등을 미는 힘이 더 셌다. 혹시나 이 우습지도 않은 다툼을 남이 볼까 몸을 사린 탓도 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한 간격밖에 되지 않는 탈의실은 건장한 남자 둘이 들어가기엔 당연히 비좁았다. 자연히 마주 보고 선 꼴이 되어 말없이 추궁의 눈빛을 보냈으나 신이혁은 무표정할 뿐 미동조차 없었다.
“진짜 안 나가실거예요?”
“당연한 소리를 하네.”
이렇게 고집을 부릴 때 보면 누가 어린지 모르겠다. 결국 쫓아내기를 포기하고 옷을 갈아입을 심상으로 탈의실 안 옷걸이 걸개를 찾았다. 마침 제 앞에 벽처럼 선 신이혁의 어깨 뒤로 벽에 달린 걸개가 보인다.
“잠시만요.”
이 좁은 공간의 반을 차지한 남자를 가로지르려니 영 자세가 안 나온다. 심지어 키도 자신보다 훨씬 커, 결국 어정쩡하게 멀리 있는 걸개에 닿기 위해 까치발을 들었다. 잠깐만 옆으로 비켜주지. 요지부동인 신이혁에 “아잇.” 신경질적인 소리를 낸 주하얀은 겨우 와이셔츠를 건 옷걸이를 벽에 걸었다. 됐다!
“…어?”
옷을 거는 데 집중하느라 미처 자신의 턱이 남자의 어깨에 닿을 만큼 가까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주하얀은 순간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무너지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어!”
신이혁은 거칠게 부딪혀오는 몸을 가뿐히 받아내었다. 도리어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줘 몸을 밀착했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품에 안기듯 기댄 주하얀이 어깨를 짚어 상체를 떼어내자 기다렸다는 듯 손이 다가온다. 큰 손은 귀 뒤와 볼을 넉넉히 감쌌다.
“잠깐―.”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질 행위를 알아챘다.
다급히 저지의 말을 꺼내었지만, 그것도 곧 입 안으로 사그라들었다. 처음엔 눌리듯 닿기만 하던 입술이 고개를 기울여 깊이 맞물린다. 예고 없이 침범한 숨이 훅 끼쳐온다.
“잠시만….”
갑작스러운 키스에 숨이 달려 발을 뒤로 물리면 그만큼 더 다가온다. 채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등이 벽에 부딪힌다. 킁, 둔탁한 소리가 폐쇄된 공간을 울릴 때 주하얀에게 허락된 공간은 오로지 꽉 감긴 팔 안뿐이었다.
얼굴을 감쌌던 손이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어 목덜미를 잡아챈다. 고개가 들리며 잠시 입술이 떨어진 틈으로 숨이 쏟아진다. 좁은 공간이 삽시에 습하게 가라앉는 기분이다.
“잠시… 옷, 입어야….”
“아.”
“사장님…, 잠시만요…!”
쫑알거릴 때마다 입술이 간지럽게 떨어진다. 발음을 웅얼거리는 게 귀여워 호소를 무시하던 신이혁이 말을 막듯이 입 맞추었다. 젖은 소리가 뒤따른다.
“안 입어 봐도 돼. 저 사이즈가 맞아.”
“그래도 입어보는 게….”
“내가 바지랑 재킷도 골라줬잖아.”
“아.”
“그냥 키스하려고 수작 부린 거야.”
쪽.
제 검은 뜻을 내보이면서도 그는 거리낄 것 없이 굴었다. 대신 밉게 노려보는 눈가에 입 맞추고 고개를 숙여 볼을 맞대 비비적거렸다.
덕분에 추궁하기에도 애매해진 주하얀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아예 예상하지 못한 바도 아니다. 당연한 수순처럼 다시 입술이 붙었고, 내내 허리를 매만지던 남자의 손이 어느 틈엔가 닿을 듯 말 듯 아래로 내려갈 때.
똑똑.
“손님 안에 계신가요.”
닫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주하얀이 등에 반쯤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잠시 벽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문이었다. 완벽한 둘의 공간은 달라진 시야와 함께 좁은 탈의실로 바뀐다.
“네, 네! 잠시만요!”
서둘러 대답한 후 먼저 탈의실을 돌아보았다. 아까까진 분명 벽에 잘 걸려있던 옷이 발아래에 깔려있다. 옷.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당황해 신이혁을 올려다보았으나 그의 얼굴은 언제나와 같은 표정이다. 저 얄미운 미소. 태연한 눈.
“잠시만. 좀 떨어져 봐요!”
“왜?”
차마 크게 소리도 못내 작게 속삭이며 몸을 비틀자 오히려 두 팔로 허리를 안아온다. 그리곤 고개를 숙여 입술에 되는대로 입을 맞추었다. 쪽. 쪽. 작게 나는 적은 소리에도 예민해진 주하얀이 발버둥을 치다 못해 입술을 꾹 깨물자 그제야 선선히 물러난 신이혁은 항복의 의미인지 두 손을 들어 보인다.
“진짜 수작에 넘어간 내가 미쳤지.”
“뭘 또 그렇게까지.”
“뒤 돌아요. 옷 갈아입게.”
“왜? 그냥 갈아입어.”
“아, 말싸움할 시간 없어요. 얼른!”
크게 소리를 내지도 못하는 주제에 바락바락 힘을 주는 주하얀이 우스운지 웃음을 흘린다. 그리곤 곧바로 제 입을 손으로 막았지만 이미 주하얀의 눈은 문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차피 나가면 둘이 있던 거 알 텐데.”
“그건 그때고요. 아 빨리 뒤 돌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다급함이 밀려오는지 이젠 마구잡이로 어깨를 밀어내는 통에 결국 신이혁은 순순히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 봐야 눈만 돌리면 탈의실 안에 있는 거울에 다 비춰 보이는데.
“다시는 이 백화점 못 와. 진짜 쪽팔려서.”
“하얀이 생각보다 고리타분하네. 누가 보면 일 치르다 걸린 줄 알겠어.”
도리어 눈을 가늘게 뜨고 시답잖은 소리만 해대니 주하얀만 마음이 급해졌다. 무슨 정신에 옷을 갈아입고 계산을 마쳤는지 모르겠다. 점원의 친절한 미소가 모두 의미심장하게 느껴져 고개도 들지 못하고 도망치듯 매장을 빠져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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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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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