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평온한 와중에 주하얀만 분주하다. 그리고 그 허둥대는 분주함은 다음으로 이동한 장소에서도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어….”
백화점을 나서자마자 지쳐 늘어질 시간도 없이 이끌려온 곳은 소위 말하는 ‘비싼 식당’이었다. 아니, 단순히 ‘식당’이라고 칭하기에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입구에서 자리를 안내해준 서버는 시종 테이블 옆에 서 있었고, 부담스러워 얼른 눈을 돌린 메뉴판엔 한글로 쓰이되 한국어가 아닌 글자들만 가득했다.
“어, 그….”
아는 단어를 찾겠다고 몇 번이고 메뉴판을 뒤적이는 걸 알아챘는지 신이혁이 주하얀의 몫까지 주문을 하고서야 몰래 숨을 푹 내쉬었다.
친절한 직원은 메뉴가 하나 나올 때마다 설명을 해주었지만 어차피 반은 못 알아들었다.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큰 접시에 작게 나오는 음식을 눈으로 살피다 서버가 물러나면 한입에 털어 넣었다. 물론 말이 털어 넣었다지만 적당히 눈치를 보며 한 입씩 아껴먹은 것에 가까웠다.
먼저 음식을 비울 때면 타이밍 좋게 다가오는 서버는 매번 접시를 치우고 식기를 새로 놓아주었다. 이렇게 하면 설거지거리 장난 아니겠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생각을 누르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새로 나온 스푼을 손에 쥐었다.
당연하겠지만 음식은 여태 살며 먹었던 것관 차원이 다르게 맛있었고, 분위기는 여유로웠으며, 흐르는 음악은 잔잔했다. 그 사이에서 주하얀만이 점차 긴장에 절여져 갔다.
여유로움 속에 어우러지는 척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맞은편을 곁눈질하고, 고민하느라 머릿속이 내내 복잡했다. 살며 했던 식사 중에 이렇게 어려운 식사는 처음이다.
“음식은 입에 맞아?”
“네. 맛있어요.”
하지만 그런 과정을 감안하더라도 용서가 되다 못해 흥겨울 정도로 맛있었다. 역시 비싼 건 값을 하는구나. 아낀다면 한 달 식비도 될 금액이 녹아있다고 생각하니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크게 자른 고기 조각을 입에 집어넣는 주하얀을 보며 신이혁은 물 잔을 들었다. 차를 가져왔다며 와인을 거절한 신이혁은 주하얀에게 한잔할 건지를 물었지만 주하얀도 고개를 저었다.
그가 술을 마시지 않는데 자신이 마시는 것도 그림이 이상할뿐더러, 최근 음주의 기억이 썩 개운치 않아 조금 멋쩍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음?”
“아까 보니까 여기 엄청 비싸던데….”
“난 또 뭐라고.”
아까부터 말할 타이밍을 잡기 위해 눈을 데룩데룩 굴리던 주하얀이 작게 인사를 건네자 이쯤 인사치레가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대수롭잖게 반응한다.
“옷도 사주시고.”
“고마우면 자신한테 해. 대학 붙은 기념이니까.”
“그래도요.”
“감사 인사받다 하루 다 가겠네.”
당사자의 거절에도 제법 집요하게 굴어 신이혁은 한숨 같은 웃음을 흘리며 턱을 만지작댔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주하얀이 접시에 남은 고기를 포크로 찍었다. 바닥에 남은 소스까지 야무지게 묻혀 한입에 넣었다.
시선이 얼굴에 닿았다. 어딘가 골몰한 듯 지긋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살짝 식었음에도 입안에 퍼지는 변함없이 고소한 맛을 음미하느라 바빴던 주하얀은 별다른 대꾸를 하진 않았다.
한참 오물거리던 음식을 목 아래로 넘겼을 때는 타이밍 좋게 서버가 다가왔다. 아까와 같이 테이블을 치우고 세팅하는 손이 기계적으로 오갈 동안 멀거니 앉은 주하얀이 신이혁에게 눈을 두었다. 당연하게 마주친 시선은 서버의 간략한 설명이 시작될 때야 떨어졌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어느새 제 앞에 놓인 작은 스푼을 들어 레몬 셔벗을 한 스푼 떠먹은 주하얀은 턱이 아리도록 시큼한 맛에 찡긋 눈을 깜빡였다. 그 앞에서 진즉 셔벗엔 관심도 주지 않은 신이혁이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고마우면….”
“네?”
“뱉으면 땡인 고맙다는 말보단 행동으로 보이는 쪽이 나로선 더 좋은데 말이야.”
한참 이어진 정적 끝에 뱉은 말은 아리송했다. 주하얀은 잠시 고민한 후에야 아까 전 이야기의 연장선임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뿐이다. 고개를 살짝 기울여 바라보며 무언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음.”
신이혁은 말을 꺼내는 데 신중했다. 어떤 말을 할지보다는, 어떻게 말을 할지에 골몰한 듯했다. 잠깐의 고민 끝에 나온 얘기는 장난 같기도, 진심 같기도, 어쩌면 양쪽 모두 같기도 했다.
“여기서 차로 5분만 가면 호텔이 하나 있어. 묵어보진 않았지만 나름 이름 있는 호텔 체인이니 하루 보내기엔 나쁘지 않겠지.”
“…네?”
“집으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많이 늦었잖아.”
“….”
“하얀이가 같이 가준다면 나도 감사할 것 같은데.”
말을 맺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같아진 눈높이에 주하얀이 퍼뜩 튀어 오르듯 목을 바로 했다. 눈이 어지럽게 테이블 위를 방황한다. 신이혁의 손은 물 잔의 다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주하얀은 순간, 어쩌면 저 물이 와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직 8시밖에 안 됐는데….”
“그래서?”
“집에 가기에 늦은 시간이 아닌 것 같은데요….”
허둥지둥 뱉은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다 종내엔 웅얼거린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넘기려고 했는데, 기민한 눈치는 원망스럽게도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게 했다. 절로 의식하는 말투가 나온다.
“내가 너무 피곤해서. 알잖아, 오늘.”
모르겠다. 아니, 알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하얀의 기준이고. 신이혁의 체력은 겨우 점심 나절 몸을 움직였다고 고갈될 정도의 것이 아니다. 그걸 가장 잘 알 사람은 뻔뻔한 말을 던져놓고 태연했다. 이제야 겉이 녹은 셔벗을 살짝 떠먹어보더니 인상을 찡그리며 금방 수저를 내려놓는다.
“더 안 먹어?”
“… 먹어요.”
혹여 다 먹었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자고 할까 얼른 스푼 쥔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퍼먹었다. 다행히, 일부러 느리게 먹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셔벗은 무척 셨다.
주하얀이 느그적대며 셔벗을 다 비우고, 신이혁의 앞엔 커피가, 주하얀의 앞엔 초콜릿이 놓일 때까지 ‘호텔’이라거나 ‘자고 가자’ 따위의 말을 재차 꺼내는 일은 없었다. 둘은 간간이 다음 주의 일정 따위로 대화를 나눴고, 대화는 끊겼다 이어지길 반복했다.
“감사합니다.”
레스토랑 입구에 나와 신이혁의 뒤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주하얀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카드를 돌려주는 직원에 어수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배부르다.”
“아까 보니까 잘 먹던데.”
“네. 음식이 조금씩 나와서 걱정했는데 막상 먹어보니 만만찮네요.”
식당을 나오기 무섭게 얼마나 먹었는지 배가 다 나왔다며 납작한 복부를 문지르는 주하얀의 머리를 큰 손이 한번 쓸어내리고 간다. 마치 눈치를 보듯 위로 뜬 눈이 신이혁의 얼굴에 닿았다 떨어지고, 신이혁은 그를 알아챘지만 구태여 시선을 주지 않았다.
결국 차에 올라탈 때까지 아닌 척 동태를 살피던 주하얀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집으로 갈 거죠?”
예상했던 물음인지 주하얀을 돌아보는 눈이 천연하다. 아니, 어쩌면 아예 생소한 이야기를 들은 듯도 했다.
“음?”
“이제 밥 다 먹었으니까 집에….”
아직 채우지 못하고 손에 쥐고만 있는 안전벨트를 꼼지락거리며 묻는다. 신이혁은 눈만 내려 그 손을 확인하곤 다시 어색한 표정의 주하얀에게로 시선을 들었다.
“하얀아.”
“네?”
“키스해도 돼?”
“네?”
“조금만 할게.”
짐짓 정중한 듯 말했으나 그의 몸은 문장 하나를 끝마칠 때마다 주하얀에게 기울어졌다. 결국 완전히 말을 마쳤을 땐 이미 입술이 스치도록 가까웠다. 주하얀이 저도 모르게 턱을 들자마자 얇고 여린 살결이 비벼진다. 그는 더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깊이 입 맞췄다.
툭. 뒷머리가 받침에 닿고 차 안의 정적에 숨소리가 섞인다. 턱과 귀를 덮은 손이 끌어당기고, 손에 힘이 빠져 놓쳐버린 안전벨트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힌다. 운전석 쪽으로 몸을 튼 주하얀의 위로 몸이 드리운다. 팔이 감긴 허리가 뻐근하다.
“음.”
숨이 모자라 다급히 들어 올린 손 끝이 입술을 더듬는다. 신이혁은 자비롭게 조금의 틈을 만들어주면서도 물러날 줄은 몰랐다.
“내가 아무리 나 좋을대로 하고 싶대도 싫다는 너를 끌고 갈까.”
차창으로 스미는 도로의 소음, 주차장 근처 풀숲에서 나는 벌레 우는 소리, 정신을 흐릿하게 하는 젖은 물 소리. 그 모든 것이 잠잠해진 후에 신이혁은 입을 열었다. 쓰러지듯 시트에 기댄 주하얀과 시선이 마주친다.
“아니. 설령 내가 끌고 간다고 해도 당장 신고하겠다고 나서야지. 왜 귀엽게 쳐다보기만 해.”
“….”
“말리려는 건지 부추기는 건지 헷갈리게.”
검지를 퉁겨 콧잔등을 때렸다. 아프진 않았으나 뒤늦게 자신을 놀리려 했다는 걸 알고 주하얀이 입을 작게 벌렸다 곧 딱, 다물어버린다.
“누가 장난을 그렇게 진지하게 쳐요!”
“내가?”
“씨.”
“그러게 밥 먹는데 왜 자꾸 쳐다봐. 난 또 신호라도 주는 줄 알았네.”
“그건 제가 잘 몰라서….!”
“뭘 몰라. 수저 쓸 줄 알고, 포크랑 나이프 쓸 줄 알면 된 거지.”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발끈한 주하얀이 이윽고 신이혁을 노려봤을 때 그의 입가엔 미미한 웃음이 번져있었다. 또 놀리는 거다. 그 얄미운 모습에 주먹을 쥐어 어깨를 때렸지만 바람이라도 스친 듯 미동도 없다. 더 약 오른다. 괜히 한 대를 더 때렸다.
“그래도 반은 진심이었는데.”
“….”
“아직 하얀이한텐 이르겠지.”
이번에도 주하얀은 뜻하는 바를 손쉽게 이해했으나, 답을 하진 않았다. 그저 눈가의 힘을 풀고 신이혁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구태여 이해하지 못한 척을 하진 않았지만, 알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 속내를 아마 알아챘을 신이혁은 잠시의 대치 후 손을 털곤 좌석에 바로 앉았다. 주하얀도 삐딱하게 앉았던 몸을 바로 했다.
“늦었다. 벨트 매.”
“네.”
“집으로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네.”
습관적으로 감사하다고 말하려던 주하얀은 그 말로 말미암은 상황을 떠올리곤 겨우 “네.”하고 대답했다. 눈길을 돌려 주하얀을 힐끗 쳐다본 신이혁은 곧 차를 출발했고, 주하얀은 잔상을 남기며 스치는 가게의 불빛과 간판의 네온사인을 눈으로 훑었다. 무릎 위로 올린 손을 맞잡아 꼼지락거린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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