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소파 위로 끌어올린 다리를 의미 없이 쓸어내리며 TV를 보던 주하얀은 탁탁. 바닥을 때리며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뭐 봐.”
“그냥 예능이요. 딱히 볼 게 없어서.”
양손에 머그잔 하나씩을 든 신이혁이 테이블을 돌아 다가오자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을 뻗은 주하얀에게 머그를 넘겨준 신이혁은 당연하게도 가까이 자리를 잡았고, 다시 가슴 앞으로 다리를 모아 앉은 주하얀도 스치는 몸을 구태여 물리지 않았다.
“시간이 이래서 그렇지.”
얼음을 넣었는지 그의 잔은 흔들 때마다 잘그락 소리가 난다. 잠시 햇살이 쏟아지는 테라스 쪽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핫초코를 한 모금 마셨다. 입 안 가득 단맛이 퍼진다.
아직 점심도 안 된 오전, 그것도 주중의 TV는 심심하다. 그나마 찾은 몇 년 전 예능의 재방송을 틀어두었으나 챙겨보던 것이 아니라 크게 흥미롭진 못했다.
“졸리다.”
“그렇게 자놓고?”
“아직 성장기라 그래요.”
아홉 시가 넘도록 늦잠을 자더니 아침을 먹은 후에도 졸리다며 소파에 등을 비비적거리는 것을 보고 낮게 웃는다. 이따 저녁 약속을 빼곤 별다른 일정이 없다며 출근을 하지 않은 신이혁은 여유롭게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조용한 거실에서 TV만 시끄러웠지만 정작 그에 집중하진 않았다. 그저 평온을 음미하며 시간을 축내는 중이다. 등받이에 목을 푹 기대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던 주하얀은 적막을 깨고 울리는 진동에 고개를 세웠다.
지잉. 지잉. 지잉. 지-….
꾸준하고도 규칙적으로 울리는 진동에 전화인가 했는데 화면엔 메신저 미리 보기 창이 떠있다. 주하얀이 핸드폰을 집어 드는 사이에도 새로운 메시지가 창을 계속 덧씌우고 있었다.
[신우:우리 예비소집일 며칠이었지?]
[you♡:몰라. 나중에 문자로 보내주지 않을까]
[김영락:굿모닝~]
[찐영:전에 어디서 봤는데 2월 17일 예정이래]
30명 남짓이 있는 단체 대화방은 한 번 이야기가 시작되면 끝날 줄을 몰랐다. 핫초코를 홀짝이며 잠시 미리 보기 창을 살폈다. 42, 43, 44…. 초마다 쌓이는 알람에 질려 얼른 대화방에 들어가 대충 내용을 훑은 주하얀은 위의 내용은 무시하고 제일 하단에 뜬 메시지에 답했다.
[17일?]
대화에 참여했다는 의미로 답장을 보내곤 곧바로 대화창을 나가 캘린더 앱을 켰다. 17일이면 당장 다음 주였다. 지금도 손 안에서 내내 떨리는 핸드폰을 쥐고 달력만 바라보는데 문득 옆얼굴로 닿는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친다.
“죄송해요. 시끄럽죠.”
“아니야. 괜찮아.”
“저희 동기 단톡방이 있는데 거기서 다 떠드느라고. 소리 안 나게 할게요.”
“괜찮대도.”
정말 별 생각이 없는지 나른한 말투였음에도 바로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꿨다. 어차피 주하얀도 슬슬 귀찮던 참이다. 이종훈이 입학 전 만들어지는 과 단체 대화방에 대해 하도 중요성을 강조하기에 들어오긴 했으나 잘 모르는 사람과 어울리는 건 언제나 어려워하는 일 중 하나다. 설정을 바꾸자마자 부르르 떨던 핸드폰이 잠잠해진다. 아예 핸드폰을 덮어 내려놓자 다시 평화로운 오전이다.
조금 식어 따뜻했던 온도만 겨우 남은 핫초코를 마시는데 시야 옆으로 성큼 다가오는 인영이 흐릿하게 비춘다. 얼굴을 덮었던 머그를 떼어내자마자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다시 눈앞이 가려진다. 당연한 수순처럼 입술이 닿았다.
“달아.”
“차가워요.”
짧은 키스 후 주하얀은 차가운 입술이 닿았던 아랫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어 물었다. 혀에 남은 단맛을 음미하듯 잠시 입맛을 다시던 신이혁은 그 꼴을 보고 피식 웃으며 음료 잔을 들었다.
“예뻐서 봤어.”
“네?”
“아까. 거슬려서가 아니라.”
“네에.”
생각지 못하게 들은 부끄러운 말에 괜히 표면이 토돌 한 머그를 만지작거렸다. 입에 머그를 대고 눈을 굴리는데 다가온 손이 머리를 흐트러 놓는다.
“오늘은 뭐 할 거야.”
“음… 그냥 좀 쉬다가 이따 알바 가야죠.”
“알바는 계속할 건가?”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이어진 질문에 잠시 눈을 굴리던 주하얀은 몸에 힘을 쭉 빼고 소파에 기대었다. 안 그래도 조만간 결단을 내야겠다 생각했던 일이다. 곧 입학할 대학은 이곳에서 대중교통으로 1시간 반은 족히 가야 할 거리였다. 주중 낮의 알바를 맞추기란 불가능했다. 다시 일을 구하더라도 그만두는 건 불가피했다.
“그만둬야죠. 어차피 개강하면 평일 알바는 무리고.”
“얘기해야겠네.”
“네. 못해도 이번 주 안엔 하려고요. 아직은 용기가….”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함을 시인하는 건 언제나 어렵다. 사실 그만두겠다 마음먹은 건 오래되었는데 여태 차일피일 미루다 자신에게 준 최대의 기한이 이번 주였다.
사람은 참 간사한 존재라, 당장 목을 조여오던 상황이 물러나자 내 몸 편한 거에 자꾸 마음이 간다. 전쟁 같은 수험생활을 끝마치고 새로운 환경에 놓이기 앞서 포상 같은 휴식을 잠시나마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드니 말이다.
“그래도….”
“응?”
“돈은 조금씩 갚을게요. 개강하면 다시 알바 구할 거기도 하고.”
“아아.”
고민을 하는지 잠시 말을 끌기에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던 신이혁은 이어진 말에 몸을 바로 세웠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꼭 생각지 못한 말을 들은 것 같다. 놀랐다기보단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아 사실관계를 다시 떠올려야 할 정도의 일.
역시 커피를 마시고 잔을 내려 양손에 가볍게 쥔 남자는 무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좋을 대로.”
가볍게 답하곤 곧장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그의 관심은 애초에 다른 쪽에 가있었나 보다.
“3월 전에 어디든 갈까.”
“어디요?”
“글쎄.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바다라거나.”
“겨울 바다는 춥잖아요.”
“그만큼 멋이 있겠지.”
겨울 바다가 어떻더라. 그냥 좀 춥고, 쓸쓸해 보일 뿐 아닌가. 곰곰이 떠올려봐도 바다를 간 지가 오래되어 명확히 생각나는 풍경이 없다. 적어도 근 5년 사이에 바다를 갈 일이 없었다는 것만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진짜 그랬다. 원래가 자영업을 하시는 부모님 때문에 가족 휴가는 잘 없는 일이었지만 집안이 기울고 나서는 방학이라고 놀러 가 본 적이 없었다. 과장을 보태자면 5년이 아니라 10년도 된 것 같다.
“그리고 핑계 대기도 좋고.”
“네?”
잠시 자신의 팍팍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한탄하던 주하얀은 이어진 말에 뒤늦게 반응했다. 맥락을 못 잡고 눈만 꿈뻑이자 신이혁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의 웃음은 종종 주하얀을 긴장하게 한다.
“네가 바다에 빠졌다고 생각해봐. 푹 젖은 옷으로 오들오들 떠는 건 그것대로 감상할 맛이 나겠지. 몸 데우는 데 체온이 제일 좋은 건 알지?”
“….”
“몸이 젖었으니 어쩔 수 없이 호텔에 갈 테고. 아쉽게 남은 방은 하나에,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방에 들어와서는 체온 저하를 막기 위해 옷을 벗겠지. 물론 나도. 하얀이를 안아주느라 나도 젖었잖아.”
“잠시만….”
“아쉽게도 여분의 옷은 없어. 가져가도 버려버릴 테니까. 대신 서로를 조금 더 잘 느낄 수 있겠지. 어떤 식으로 느낄지는,”
“잠시만이라니까요!”
다급하게 팔을 휘저어 음험한 말을 멈춘 주하얀의 얼굴은 황당 그 자체였다. 당황과 황당, 조금의 화가 섞여있었으나 얼굴색이 붉게 물들어서야 공격성이 전혀 없다. 신이혁이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듯 태연히 소파에 기댈 동안 주하얀은 입술만 꾹꾹 씹어댔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몰라서 물어?”
“그러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하냐고요.”
“하고 싶으니까.”
“뭘요!”
“알려줘?”
“아니요!”
급한 대로 버럭 거리던 주하얀이 막 말을 하려는 입 앞에 척 손을 내밀었다. 당장 입을 막기 위해 한 행동인데 되려 신이혁은 그 손을 붙잡더니 손바닥에 입술을 찍어댄다.
“키스해도 돼?”
“아니요. 아니 그보다 제가 왜 젖어요! 시작부터 이상하잖아.”
“물 보니까 신나서 뛰어들었어.”
“전 그런 짓 안 해요.”
“그럼 내가 빠뜨렸다고 하자.”
“그걸 하자는 얘기가 아니잖아요….”
분명 처음 덤벼든 건 자신이었는데 어느새 그의 말에 끌려가고 있다. 결국 주하얀은 흥분으로 경직됐던 등을 축 늘어뜨렸다.
“그래서 바다 안 갈 거야?”
“그런 짓을 한다는데 어떻게 가요?”
조금 시무룩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눈을 뾰족하게 뜨는 걸 보고 낮게 웃는다. 반쯤 일으켰던 몸을 털썩 주저앉으며 멀어진 거리를 좁히며 신이혁이 다가오자 상체를 뒤로 빼면서도 잡힌 손을 빼진 않는다. 넉넉하게 잡은 손목을 엄지로 살살 문질러 달랜다.
“물에 안 빠뜨릴게. 옷도 안 벗기고. 같이 씻는 것도 무리겠고.”
“….”
“또 뭐가 있을까. 같이 자는 거? 말해봐.”
“… 여벌 옷은 챙길 거예요.”
“그래.”
“추운 거 싫어요. 물에도 안 들어갈 거고요.”
“그냥 해본 소리야. 그러다 감기 걸리려고.”
“방도 두 개 잡아요.”
“으음.”
주하얀의 투정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여주던 신이혁이 이번 대목에선 고민하듯 목을 울었다. 그리곤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불시에 잡고 있던 팔을 휙 제 쪽으로 잡아당긴다.
“엇.”
무방비하게 옆으로 무너진 주하얀이 바로 상체를 바로 세우려 했으나 저지하는 손이 더 빨랐다. 어깨를 감싸 안은 팔이 단단하다.
“그건 조금 더 고민해보자.”
“놔주세요.”
“거기까지 가서 방을 따로 쓰는 건 정이 없잖아.”
“정이 없기는 무슨.”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 신이혁에 팔꿈치로 단단한 배를 치며 저항했다. 그 와중에 마음이 약해져 팔의 힘을 뺐는데 그는 아픈 소리를 내며 엄살을 피우면서도 주하얀을 놓아주진 않았다.
“바다에 빠뜨리지 않는다니까.”
미약하게나마 계속 발버둥 치는 주하얀에 몸이 꽉 눌리도록 세게 끌어안으며 말한다. 웃기네. 그 추운 바다에 빠트리지 않는다는 게 카드가 되다니. 당연한 얘기를. 잠시 코웃음을 쳤지만 그래도 곧 몸에 힘을 풀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버둥거린다고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아 그런다. 아니나 다를까, 몸에 힘을 풀자 그도 힘을 거두어간다. 주하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굴 뜨겁다.”
“하도 열이 받아서 그래요.”
아까 당혹감에 오른 열이 아직 다 내려가지 않았다. 더불어 방금 전 과격한 포옹에 숨이 막혀 열이 식을 틈이 없다. 부루퉁한 말을 들은 신이혁은 관자놀이에 내내 입술을 문질렀다.
“일 그만두게 되면 얘기해. 일정 맞춰보자.”
“…네.”
잠시 뜸을 들이다가도 고분하게 대답하는 주하얀에 신이혁이 웃는다. 웃음의 진동이 피부로 전해진다.
“키스해도 돼?”
“안 돼요.”
“나 갑자기 단 게 당기는데.”
“그러면 그냥 핫초코를 드세요. 제 거 드릴게요.”
“그건 너무 달아. 나한텐 주하얀이 딱이야.”
“웃기는 소리.”
고개를 숙여 어깨 아래에 이마를 묻고 얼굴을 숨긴 주하얀때문에 자연히 신이혁의 고개도 내려갔다.
귓가에 속삭이는 간지러운 말에 어깨를 비틀던 주하얀이 참지 못하고 얼굴을 들기 무섭게 입술이 닿는다. 짧게 닿은 입술 안으로 그가 또 웃는다. 이번에도 그 웃음은 주하얀에게 전달된다. 결국 주하얀도 입가를 씰룩이며 웃어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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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