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어 마이 세큐리티-46화 (46/61)

46화

“대학이 여기서 멀어요?”

“네 조금요.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반 정도?”

“어우 멀다. 자취 예정이고?”

“일단 여기서 다녀보려고요. 무리다 싶으면 자취를 하지 않을까요.”

“그 정도면 당연히 무리지. 고등학교 때랑은 전혀 다르다고요.”

안 그래도 자주 들었던 말이다. 8시 등교를 당연시하던 주하얀이 요즈음엔 하루도 빼먹지 않고 늦잠을 자는 걸 보면 틀린 말도 아니지 싶고.

“좋겠다. 새내기라니. 스무 살이라니.”

“하하….”

“나도 그럴 때가 있었는데. 진짜 돌아가고 싶다.”

“그래도 아직 젊으시잖아요.”

“당연하죠. 근데 젊은 거지, 어린 건 아니잖아.”

아마 이십 대 후반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처음 인사를 할 때 서로 나이를 얘기했었지만 그때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 정도로만 생각을 해서 그런지 정확한 숫자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십 대면 아직 어린 거 아닌가. 주하얀이 조금 어색하게 웃자 그 표정을 본 직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본인도 심각한 진심을 가지고 한 말은 아닌 모양이다.

“이제 3월 되면 놀러 다니느라 바쁘겠네요.”

“하하. 그 정도까지야.”

“아닐걸요. 나 새내기 때는 한 달 만에 백만 원을 홀랑 써버린 애도 있었어. 맨날 모임이다 뭐다 불려 가서 술 마시고 밤새고, 아휴.”

“백만 원이요?”

“응. 그건 뭐 솔직히 특이 케이스고. 그래도 돈이 많이 나가긴 하죠.”

순간 아까 전 예산을 짜며 적어두었던 1학기 생활비를 떠올렸다. 머릿속에서 생활비 항목의 금액이 치솟는다. 그만큼 여윳돈은 바닥까지 줄어든다. 큰일이네. 시간표가 나오는 대로 알바부터 구해야겠다.

“하얀 씨는 그래도 아르바이트하면서 조금 모아뒀잖아.”

“네. 조금은요.”

“대단해. 나는 그때 놀기만 하고 일할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는데.”

“하하. 감사합니다.”

“아니 진짜로. 수능 끝나자마자 아르바이트한 거예요?”

“아뇨. 그렇게까지는. 비슷은 해요.”

대단하다. 대단해. 반 이상 남은 주스를 쭉 들이키곤 마치 술이라도 마신 양 “캬아” 시원한 소리를 낸다. 그 옆에서 주하얀도 음료를 조금 마셨다. 제가 퍽 부지런하다기보단 상황상 일선으로 내몰린 격이었지만 굳이 나서서 부인하진 않았다. 아니, 부인할 거리 없는 사실이긴 하지.

“부모님이 대견해하시겠네. 성인 됐으니 이제 용돈 벌이는 알아서 해라. 이런 타입이신가. 제 친구 중에도 그런 애 있거든요.”

“그건 아니에요.”

“사실 부잣집 도련님 아니에요? 입는 옷만 봐도 다 티 나던데.”

“네?”

“아니. 내가 쇼핑을 좋아해서 브랜드들을 좀 알거든요.”

그러며 검지를 들어 주하얀을 척 가리킨다. 브랜드…. 오늘 입은 상의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곧 그 손은 신발을 찍고는 사무실 방향으로 휙 돌아간다. 아마 패딩을 말하나 보다. 일반적으로 겨울옷 중 가장 값이 나갈 품목은 패딩이니까. 하지만 패딩이란 원래 비싼 외투가 아닌가.

“오늘 가져온 가방도 엄청 비싼 거죠.”

아니구나.

“전에 저 브랜드에서 미니백 사려고 했다가 한 달 월급이라 말았었는데. 뭐 그냥 그렇다고요.”

“아…. 전 그런 걸 잘 몰라서.”

“부모님이 그냥 사주시는구나. 더 부럽네. 혹시 이런 얘기 불편해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솔직할 수 없는 주제인 데다 잘 모르는 분야이기까지 해 “어어.”하고 말꼬리를 늘리는 걸로 얼렁뚱땅 반응했다.

직원은 이미 머릿속에서 주하얀을 부잣집 자제로 확정 지은 듯했다. 마지막에 소리 죽여 심산을 묻는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평생 받아본 적 없는 취급이라 당황해서 그렇지 기분 나쁠 리가 있나. 혼자 흥분해 얘기하다가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주하얀의 반응을 살핀 직원이 푹,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렇다고 주하얀 씨를 일부러 관찰했다는 건 아니에요. 옷은 워낙 눈앞에 있으면 보이니까.”

“네. 알아요.”

“혹시 불편했으면 미안해요.”

괜찮다는 말에도 미안한 표정을 짓는 직원에 주하얀이 옅게 웃었다. 그의 말마따나 좋아하는 주제에 흥분했을 뿐 다른 의도가 없음은 표정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얘기 나왔으니 말인데.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얘기하세요.”

“가끔씩 데리러 오는 남자 있잖아요. 혹시 뭐 하얀씨 전용 기사님 그런 거예요?”

“네?”

하마터면 뿜을 뻔한 주스를 얼른 삼켰다. 다행히 음료가 코로 올라가진 않았지만 잔기침이 터져 나온다. 뜬금없는 얘기에 당황해 우스운 꼴을 보일 뻔했다.

“아니. 처음엔 아빠 친구라기에 그렇구나 했는데. 솔직히 아빠도 아니고 아빠 친구가 일 끝날 때마다 데리러 오는 건 좀 흔한 일은 아니니까. 사이도 좋아 보이고.”

“하하. 그건 그렇죠.”

괜히 말끔한 입가를 닦아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신이혁의 존재를 둘러댈 때 아빠의 친구라고 했었다. 아빠도 아니고 아빠의 친구가. 자신이라도 특이하다 생각했을 법한 상황이다.

다만, 진실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를 기사처럼 부리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만으로도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그냥 직장이 이 근처세요. 일 끝나는 시간이 맞을 때 데리러 오시는 거지 기사라거나… 그렇게 보일 줄은 몰랐네요.”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 잊고 있었는데, 처음엔 주하얀을 데리러 오는 것도 일의 연장선이었다. 담보의 무사를 확인하는 업무.

“워낙 아빠랑 가까운 분이셔서 저도 자연스럽게 편히 대하게 됐어요.”

이것도 사실이다. 돈거래라는 게 보통 긴밀한 사이에서도 일어나기 쉽지 않은 일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젠 주하얀과 신이혁도 비슷해졌고.

“하얀 씨 어렸을 때부터 사랑 많이 받고 자랐겠네요. 얘기 들어보니까.”

“그래 보이나요?”

“네. 일하느라 힘들다고 매일 마중도 나오고.”

“매일은 아닌데….”

얘기를 나눌수록 자신이 정말 부잣집 도련님이라도 된 것 같다. 평생 받아본 적 없는 취급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안 온다. 단지 자신이 입은 옷과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보이는 처지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솔직히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보단 신기하다.

“하긴 이제 스무 살이면, 아직 보호자의 관심이 필요할 나이긴 하지.”

“….”

“나 같아도 하얀 씨 같은 아들 있었으면 누가 데려갈까 매일 보고 있겠다.”

자신이 말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직원을 보고 주하얀만 동의하지 못했다. 그 아빠라는 사람은 궁지에 몰리니 자식을 버리고 도망가던데요. 보호자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지금 주하얀의 보호자라고 한다면….

“….”

순간 자연히 떠오르는 얼굴에 주하얀은 미지근하게 식어 물기가 사라진 잔을 만지작거렸다.

생각해보면 직원이 말한 모든 요소는 신이혁이 준 것이다. 비싼 옷도, 안락한 환경도, 동료에게 음료 한 잔 살 수 있는 돈도. 어느 모로 보나 현재 주하얀의 보호자는 신이혁이었다. 보호해주고, 보듬 어두는 존재.

“자. 이제 마무리하고 갑시다. 음료 다 마셨죠?”

“네.”

“좀 일찍 들어가요. 그래 봐야 십 분이기는 하지만.”

“네.”

“오늘도 데리러 오신대요? 그, 아빠 친구분.”

“네?”

생각에 빠졌는지 조금은 멍하게 대답하던 주하얀이 꿈에서 깨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기억을 더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아까 보낸 메시지의 늦은 답으로 데리러 간다는 문자가 왔었다.

“네.”

“조금 일찍 오시라고 해야겠네. 으으, 피곤해. 월요일이라서 그런가.”

기지개를 쭉 켜며 마신 주스컵을 싱크대에 놓는 직원에 얼른 다가간 주하얀이 자신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다. 직원은 거절하는 대신 자신이 매장과 창고를 둘러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켰다.

마지막으로 잔에 조금 남은 음료를 입에 털어 넣곤 면장갑을 찾았다. 톡톡한 면장갑을 끼고 그 위에 고무장갑까지 낀 후에 물을 틀었다. 공격적으로 싱크대를 때리는 물과 서로 부딪히는 유리잔 소리와 함께 주하얀은 미묘히 머리를 갉작거리는 생각을 흘려보냈다.

* * *

그래도 한번 와본 곳이라고 눈에 익다. 매서운 바람이 불던 날, 논술고사를 치러 처음 방문했을 때는 줄줄이 세워진 건물에 한참이나 교문 앞에서 주춤거려야 했는데. 더욱이 교문에서 바라본 정면을 가득 채울 만큼 큰 신식 건물은 사람을 압도하는 데가 있다.

오늘은 꽤 자연스럽게 건물을 돌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비록 사람들의 무리를 따라갔을 뿐이지만, 어쩐지 능숙히 행동한 것 같아 기분이 미묘하게 들떴다. 건물 옆 잔디밭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공기처럼 깔린 웅성대는 소음과 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소리가 섞인다.

“상경대 이쪽으로 오세요!”

“무용과! 무용과!”

“사회과학대 여기로 모이세요!”

들쑥날쑥한 머리 위로 우뚝 솟은 팻말을 든 사람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단전에서부터 끌어모아 얼굴을 꽉 찡그리며 뱉어내는 말이 돌림노래처럼 이어진다.

“두 줄로 서세요. 인원 좀 더 차면 이동할게요.”

주하얀은 사람의 파도를 헤치고 나가 줄이 길게 늘어진 곳의 뒤에 섰다. 먼저 와있던 사람 옆에 어색하게 서자 줄의 끝에 혼자 선 사람이 한 발짝 물러나 자리를 만든다. 보일랑 말랑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 자리에 서는 것으로 서로를 인식했음을 어색하게 표현했다.

“간격 좀 좁혀주세요! 두 줄 서기!”

아마 한참 전부터 혹사당했을 목에서 쇳소리가 섞인다. 형광 노랑 조끼를 입은 진행요원을 안쓰럽게 돌아보다, 추위와 어색함에 몸을 옴짝거리느라 어슬렁대는 줄 쪽으로 목을 쭉 뺐다. 이 사람들이 다 우리 과 사람들이구나. 괜히 신기하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뒤로도 사람이 섰다. 내내 긴 깃대를 쥐고 팔을 흔들던 사람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수를 세더니 만족할 만한 인원이 찼는지 곧 따라오라고 소리치며 무리를 이끌었다.

“지금 보시는 건물은 국제관이고요. 옆에 계단 보이시죠.”

자신을 한 학번 위 학우라고 소개한 진행위원은 건물 하나를 지날 때마다 설명을 하느라 바빴다.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날 정도로 높은 계단을 오르자 숨이 차고 열이 오른다. 너나 할 것 없이 패딩을 젖히고 어깨에 걸쳤다.

설명에 맞춰 일제히 발을 멈추고, 손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는 게 꼭 유치원 현장학습 같다. 두 개의 큰 건물을 지나, 세 번 계단을 오른 후 도착한 대형 강의실엔 책걸상 대신 바닥에 색지 크기의 카드가 늘어놓아져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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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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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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