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자. 여기선 게임을 진행할 거예요. 얼른 들어오세요.”
정말 오늘은 햇병아리들 소풍이구나.
먼저 도착한 팀인지 안쪽 벽을 따라 열댓 명의 인원이 어색하게 서 있다. 그리고 그 맞은편 벽은 주하얀의 조가 차지했다. 온통 머뭇거리고 갈피를 못 잡는 사이에서 야광 노랑 조끼를 입은 진행위원만 신이 나 교탁의 마이크를 쥐고 게임의 규칙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후론 한참이고 정신없는 시간이었다. 야심차게 준비한 것처럼 소개한 게임은 카드 뒤집기였다. 각 팀별로 양면 카드의 색을 부여받아 정해진 시간 내에 자기 팀의 색을 더 많이 보이도록 뒤집으면 되는, 김샐 정도로 쉽고 시시한 게임이다.
주하얀은 시작 휘슬과 함께 하나같이 카드에 달려드는 인파 안에서 적당히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느긋이 움직이다, 코앞에서 자신이 뒤집은 카드가 다시 뒤집히는 광경을 거듭 목격하고 나선 저도 모르게 손을 빨리 움직였다. 결국 처음 각오와 달리 게임이 끝났을 때는 바로 입었던 패딩을 다시 어깨너머로 벗어내야 했다.
“그럼 먼저 온 조는 이동할게요! 저 따라오세요.”
그렇게 서로 뒤엉켜 정신없는 한 판을 하고 나선 주하얀의 조가 안쪽 벽으로 이동했다. 조금 쉬기 무섭게 도착한 다음 조와 다시 게임 한 판, 그 후 다른 건물로 이동해 다른 게임을 진행하고, 또 계단을 두 개 올라가 짧은 동영상과 함께 학교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미 처음의 짝은 의미가 없어졌다. 옆 사람과 말이라도 해볼라치면 다음 일정으로 진행되어 진행위원을 따라가기도 벅찼다.
정문 앞 신식 건물 뒤 곧바로 이어진 큰 경사로 때문에 고단함이 더했다. 학교 건물이 통로와 엘리베이터로 연결되어 있어 평소엔 이동에 큰 불편이 없다고 하던데 오늘 같이 많은 인원이 많을 때는 어림없는 소리다.
결국 대략적인 순서를 마치고 소강당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가 지쳐 의자에 늘어졌다. 주하얀은 진즉 벗은 패딩을 무릎에 걸쳐두고 맨투맨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리고 손 부채질을 했다.
“안녕하세요, 학우님들. 전 이번 OT 진행을 맡은 학생회장 노아영입니다.”
짧은 인사를 건넨 학생회장을 고개를 숙였고 드문드문 박수가 터졌다.
“여기까지 올라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저희 학부가 인원이 많다 보니 부득이하게 소강당을 쓰게 됐는데 정말 죄송하게도 이곳 지대가 좀 높습니다.”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꺼낸 이야기에 곳곳에서 힘에 부친 탄성이 흐른다. 고생 많으셨냐는 질문에 적극적으로 “네.”하고 대답하는 이도 몇 있었다.
예상했던 반응인지 웃으며 자신도 힘들었다고 너스레를 떤다. 벌써 몇 년째 다니는 곳인데 아직도 힘들다고, 아마 졸업할 때까지 경사에 고통받을 것이라고 경고인지 장난인지 모를 말을 했을 땐 객석에서도 작게 웃음이 터졌다.
물 흐르듯 이어진 분위기는 간단한 학과 소개를 마칠 때까지도 부드러웠다. 간간이 손뼉을 치거나 작게 호응을 하면서도 주하얀은 학생회장의 넉살에 감탄했다. 겨우 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 신기할 정도로 어른 같다.
“종이 한 장씩 가지고 뒤로 넘겨주세요. 못 받으신 분은 손 들어주세요.”
넘겨받은 종이는 학생 정보 수집용 서류였다. 학생회장은 학적부 입력 외의 용도로 쓰이지 않는다며 강조했지만, 애초에 다른 용도로 쓸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빈칸마다 정보를 빠르게 써 내려간 후 펜을 내려놓았다. 남는 시간을 어찌 보내나 멍하니 있는데 돌연 옆에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오른쪽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애였다. 부슬부슬한 파마머리의 남자는 이쪽을 보고 웃고 있었다. 아니, 그냥 웃는 상인 건가. 미묘하게 끝이 올라간 입술을 보며 주하얀도 뒤늦게 인사했다.
“오늘 진짜 정신없죠. 올라오면서 게임을 몇 개나 한 건지.”
“…네. 그러네요.”
“그래도 재밌긴 했어요. 힘들어서 그렇지.”
처음 인사는 말을 늘어놓겠다는 선전포고였나보다. 어색하게 상체를 조금 뒤로 물린 주하얀을 알아채지 못한 건지 파마머리는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다 돌연 놀란 듯 눈을 맞춰온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표정 한번 다채롭다.
“혹시 현역이에요?”
“네.”
“그럼 스무 살?”
“네. 그렇죠.”
“나랑 동갑이네! 다행이다. 그냥 말 편하게 해. 어차피 같은 과 학운데.”
“아… 어.”
같은 과 ‘학우’라는 게 반‘친구’쯤 되는 호칭인가. 애매하게 대답을 흘리는 것으로 반응했다. 물론 상대방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고등학교는 다 동갑이었는데 대학교는 동갑 일지 아닐지 몰라 어렵다고 투덜거린 파마머리는 갑자기 몸을 주하얀 쪽으로 쭉 내밀었다. 의도를 알고 팔로 슬쩍 종이를 가렸으나 이미 늦었을 때였다.
“주하얀? 본 적 있는 이름인데. 혹시 단체방에 있어?”
“어. 말은 잘 안 하는 데 있긴 해.”
“어쩐지! 나도 거기 있거든. 이렇게 보니 반갑네. 난 강신우야. 혹시 알아?”
“강신우 알지. 많이 봤어.”
강신우.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있겠나.
사실 파마머리가 자신의 서류를 훔쳐보자마자 주하얀도 경쟁적으로 상대방의 서류를 훑어봤다. 그리곤 이해했다. 얘구나. 강신우라면 단톡방에서 매일같이 떠들어대던 몇 명 중 하나였다. 이제 보니 입꼬리가 올라간 게 아니라 입이 근질거려서 씰룩이고 있었나 보다.
“와. 대박. 맨날 폰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보니까 신기해.”
“그러게.”
“사실 단체방에 우리 과 절반 정도밖에 없잖아. 한 명이라도 찾으면 대박이라고 생각했는데, 심지어 옆자리야!”
“나도 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 걱정했는데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 있어서 다행이다.”
기쁨의 역치가 낮은 건지 강신우는 금세 신이 나 떠들어댔다. 다행히 주위도 작성을 끝내고 슬슬 옆 사람과 대화를 시도하는지 객석 쪽이 조금은 소란스러워 크게 눈에 띄진 않았다.
초반부터 감당 안 되게 구는 친화력은 조금 버거웠지만 어차피 가져야 하는 친구, 주하얀에게도 나쁠 게 없었다. 오히려 상대 쪽에서 나서 주니 고마워해야 할 판이었다. 게다가 쾌활할 뿐 막무가내로 굴진 않는다. 물론 어디까지나 만난 지 이십 분째 됐을 때의 인상이다.
“야 좀 조용히 해. 네가 제일 시끄러워.”
“오, 진영. 뒤에 있었냐? 아까 말하지.”
강신우는 진짜 정신이 없었다. 주하얀과 대화를 하다가 불쑥 끼어든 뒷자리 사람과 친하게 인사를 나눈다. 멀거니 대화를 듣고 있다 뒷사람과 눈이 마주친 주하얀이 고개를 꾸벅여 묵례하려다 그냥 “안녕.” 짧은 인사를 건넸다.
“안녕. 강신우가 괴롭히는 건 아니지?”
“아 뭐라는 거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내가 뭘.”
“이 김에 둘도 인사해. 이쪽은 주하얀, 얘는 윤진영. 우리 다 동갑이야.”
“주하얀? 이름 되게 특이하다. 반갑다.”
“나도 반가워. 그런 얘기 종종 들어.”
윤진영 역시 단체방의 식구라고 했다. 거기다 처음 조별 활동을 할 때 우연히 같은 조가 되어 친해졌다고.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친해지다니. 역시 친화력이 대단하다.
얼결에 인사를 나눈 후에도 둘의 대화는 이어졌고, 주하얀은 간간이 호응을 하는 식으로 함께 했다. 그러다 진행위원이 작성을 마친 서류를 걷어가고 다시 행사가 이어질 때쯤 윤진영은 뒤로 물러났다. 다시 강신우와 주하얀의 대화가 길어졌다. 자리를 옮겨 다 함께 수강신청을 할 때도, 다시 소강당으로 돌아와 행사를 마칠 때까지 둘은 붙어있었다. 마침 똑같이 전철을 타고 집에 가야 하는 통에 귀가까지 함께 하게 됐다. 얼추 타 과와 비슷하게 끝난 행사에 사람이 몰려 버스를 탈 수가 없어 더 그랬다.
“넌 어떻게 할 거야? 자취해? 그냥 통학?”
“일단은 통학하지 않을까. 근데 오늘 보니까 진짜 힘들긴 하더라.”
“야. 방 구하려면 빨리해야 해. 더 늦어지면 구하고 싶어도 방이 없어요.”
“넌 그럼 자취해?”
“아니. 나는 집이 그리 멀지 않아서 통학. 아무튼 얼른 구하라고. 맨날 술 마시다가 막차 시간 보고 일찍 들어갈 거 아니면.”
“그건 그런데….”
일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 차마 토로하지 못한 어려움을 속으로 삼키며 주하얀은 입에 문 사탕 막대를 도르르 굴렸다. 행사가 끝나기 전 나눠준 기념품 사이에 끼어있던 것이다. 강신우는 진즉 다 깨물어 먹고 막대만 쭉쭉 빨다 근처에 쓰레기통이 보이자 빈 막대를 휙 던져버렸다.
“왜. 부모님이 자취는 절대 안 된대?”
“꼭 그런 건 아니고.”
“난 자취보단 독립을 하고 싶어. 얼른 혼자 살아야지.”
특히 아빠랑 성격이 너무 안 맞아. 서로 스트레스야. 불만이 어지간히 쌓였는지 강신우는 고개까지 저으며 말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뭘 그렇게까지.”라고 얼버무린 주하얀도 그리 다르진 않았다. 딱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자식이 나가는 게 아니라 부모가 나갔다는 정도.
“성인이 됐으면 혼자 살아도 봐야지.”
그런 마음가짐이야 이쪽이야말로 만만했다. 그저 두루뭉술하게 바라는 게 아니라 그를 위해 예산까지 따로 빼놓았을 정도로.
문제는 이 마음을 신이혁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였다. 언젠가 독립을 하겠다고 미리 이야기를 걸어놨으나, 함께 산 지 한 달도 안 돼 “내가 그랬었잖아.”하고 나가기엔 다소 찔리는 구석이 많았다.
그의 의도, 자신의 상황.
쉽게 생각하자면 한없이 쉽지만 꼬이려면야 얼마든지 어려워질 수 있는 관계에 주하얀은 옴짝달싹을 못 하는 중이다.
“난 전철 위로 가야 되는데 너는?”
“난 아래로.”
“그래. 그럼 잘 들어가라. 새터에서 보자.”
“응. 연락할게.”
내내 떠들며 걷다 보니 금세 목적지 앞이었다.
역에 도착하기 무섭게 전광판을 확인하더니 자신이 타야 할 전철이 들어온다며 뛰어간 강신우의 등 뒤로 인사를 건넸다. 시끄러운 발소리와 함께 계단 아래로 형체가 사라지면, 주하얀은 하루의 반절만에 다시 홀로 남았다.
“기 빨린다.”
재밌고 좋은 애 같긴 한데 아무래도 친해지면 여간 정신없을 것 같다. 무의식 중에 후, 한숨을 쥐며 고개를 저은 주하얀은 방금 전 뜀박질하던 누구와 달리 차분하게 개찰구를 통과해 반대 방향에 있는 계단을 내려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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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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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