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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48화 (48/61)

48화

남은 기간은 무난히 지나갔다. 주하얀으로서는 나무늘보처럼 느리지도, 화살처럼 빠르지도 않게 느껴졌으나 타인에겐 어땠을지 모르겠다. 어차피 시간의 속도에 대한 관념은 상대적이니까. 다만 확실한 건, 시간은 착실히 간다는 거다.

“고생했어요. 이제 볼 일이 없겠네.”

“그동안 감사했어요.”

“나야말로. 아직 날이 추워. 얼른 들어가요.”

“네. 감사합니다. 주말 잘 보내시고요.”

“하얀 씨도 학교 가서도 잘 지내요.”

잠근 매장 문을 잡고도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그렇게 멀어졌다. 웃는 채로 얼어붙었는지 혼자 남고도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추운지 입술을 달달거리며 바로 앞 길가에 세워진 차로 총총거리며 다가갔다. 이젠 겨울밤의 어둠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으나, 자리는 언제나 복불복이다. 잠시 고민하다 조수석의 문을 열자 다행히 정답이었는지 운전석의 남자가 자신을 돌아본다.

“안녕. 하얀이.”

“안녕하세요.”

“춥게 왜 밖에서 얘기해.”

“안에서부터 얘기하다 나왔는데 말이 길어졌어요.”

역시 다 보고 있었구나. 자신의 퇴근을 기다리며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고 있었으니 당연하기도 했다. 신이혁은 손을 뻗어 차가운 볼을 쓰다듬더니 히터를 한 단계 올렸다.

“패딩 벗어서 뒤에 둬. 불편하겠다.”

“네. 하, 따듯해라.”

“그건 뭐야.”

옷을 벗다 말고 따듯한 바람에 손을 녹이던 주하얀은 뜬금없는 물음에 의아하게 옆을 돌아봤다. 제 무릎으로 가있는 시선을 따라 눈을 떨어뜨렸다가, 곧 아아, 하며 마저 패딩을 벗었다.

“마지막 날이라고 케이크 싸주셨어요.”

부산스럽게 몸을 들썩이며 답하자 손이 다가온다. 신이혁은 잠시 케이크 박스를 들어주다가, 주하얀이 자리에 바로 앉자 아까와 같이 마른 무릎에 박스를 내려놓았다. 벗은 옷을 뒷자리에 던져두고 몸이 한결 가벼워진 주하얀은 벌써 다섯 번은 들여다본 듯한 박스를 다시 내려보았다. 꼭대기에 작은 초콜릿 조각을 놓은 몽블랑이다.

“그동안 고생했어.”

“겨우 알바 조금 한 건데요, 뭐.”

공으로 얻은 칭찬에 입술을 잘근대던 주하얀이 문득 생각났는지 운전석을 돌아본다.

“매번 저 데리러 와주시느라 고생하셨어요. 번거로우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나름 예의를 차린다고 고개를 꾸벅이는데 앉은자리가 나란해서 자세가 엉거주춤하다. 다행히 인사를 받은 당사자의 마음엔 꼭 들었는지 신이혁은 팔을 뻗어 주하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눈에 즐거운 기색이 만연하다.

“소중한 담본데 내가 잘 챙겨야지.”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에게 붙이기엔 적절하지 않은 호칭이기도 하고. 말없이 전방을 주시하는 옆얼굴을 바라보자 신이혁은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장난이었지만 말을 거두진 않는다.

“한동안은 밤에 나올 일 없겠네.”

“아마도요. 이 동네에서는.”

“영화나 보러 갈래?”

이 밤에 뜬금없이 영화를? 묻는 얼굴을 보니 충동적인 건 아닌 것 같고. 애초 마중 나오기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영화요?”

“응. 기념으로.”

“무슨 기념이요.”

“한동안 밤 데이트 못하는 기념?”

보통 그런 데에 ‘기념’이란 말을 붙이나? 그보다 데이트라니. 이 마중이 데이트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만한 행위였던가. 어디를 먼저 지적해야 할지 애매할 정도라 주하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입만 뻐끔거렸다.

“지금 가면 심야영화 시간에 딱 맞겠다. 혹시 졸려?”

“… 아니요. 그렇지는.”

“졸려도 영화 보면서 자.”

순 자기 마음대로. 하지만 운전대는 그가 잡았고 주하얀은 그에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사실 오후 내내 서 있던 데다 마지막 날이라고 여러 사람에게 시끄러운 인사를 받은 탓에 조금 피곤했다. 뭐, 그래도 당장 쓰러져 눕고 싶은 정도는 아니니까. 정 안 되겠으면 그의 말대로 영화관에서 자도 되고. 적어도 본인이 한 말이니 나중에 표값이 아깝다며 물고 늘어지진 않겠지 싶기도 했다.

“시작부터 자도 전 몰라요.”

“어깨 빌려줄게.”

“등받이가 있는데 뭐하러요.”

“그러면 아예 무릎에 올려놓고 볼까. 편히 자라고.”

“네?”

득달같이 부정의 뜻을 담아 반응했지만 신이혁의 얼굴엔 이미 미소가 만만하다. 무엇을 상상하고 있을지 안 봐도 알겠다. 요 근래 들어 그는 제 욕심을 숨김없이 드러낼 때가 많아졌고, 매번 조금 난감해지곤 한다.

지금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허둥대던 주하얀은 이대로 두었다가 정말 영화관에서 남 보기 민망한 일을 벌일 것 같아 얼른 손을 휘저었다. 물론 그 손도 금방 잡혀버렸지만.

“사장님 제 말 듣고 계신 거죠?”

“쉿. 운전하잖아. 사고 나.”

다급해져 재촉하는 주하얀의 손을 잡아 깍지를 낀 신이혁이 검지를 제 입술 앞에 댔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곧 어이가 없어졌다. 평소엔 운전하면서도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이제와 엄살을 핀다. 결국 토라진 티를 내듯 펭, 잡은 손을 뿌리쳤다. 신이혁은 코로 웃을 뿐 손을 다시 끌어가는 일은 없었다.

“거짓말쟁이.”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주하얀은 영화를 보러 가기에 승낙한 후, 묘하게 들떠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가는 영화관이기 때문이다.

자고로 집 나가면 다 돈이다 라는 마음 가짐으로 살았으니 문화생활을 즐긴 기억이 가물하다. 마지막으로 영화관에 갔던 기억도 기말고사가 끝나고 학교차원에서 단체관람을 왔던 것이다.

“재미있을까요? 예고편 TV에서 보긴 했는데.”

딱히 무슨 영화를 보자는 예정이 없었기에 상영시간이 가장 빠른 영화를 예매했다. 영수증처럼 길게 나오는 영화표를 들고 야무지게 팸플릿까지 챙긴 주하얀은 일찍이 핸드폰으로 볼 영화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티 나게 기대하는 모습에 자신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며 웃는 신이혁을 알아챌 틈도 없었다.

“무서워 보이는데….”

“이런 장르는 잘 못 보나 보지.”

“몰라요. 봐본 적이 많이 없어서.”

영화가 어두운 분위기인 건 팸플릿만 봐도 예상이 갔다. 한참 리뷰를 뒤져보더니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걸 보고 머리 위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당장 볼이라도 더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또 기겁하며 눈치를 살피다 숨어버릴 것 같아 꾹 참았다.

“품은 빌려줄 수 있어.”

“됐어요. 아까는 뭐 어깨 빌려준다더니.”

“필요해? 빌려줄게.”

“됐다니까요.”

자꾸만 무얼 빌려준다는 말에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전엔 돈을 빌려준다고 나서더니, 이제 품이나 어깨를 내어주는 일 따위는 쉽나 보다.

다행히 장난이었는지 신이혁은 더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주하얀을 살살 꼬였다.

“영화 시작하기 전에 뭐라도 먹을래?”

“괜찮아요.”

“하루 종일 일하느라 배고프잖아. 사줄게.”

“….”

“우리 하얀이 남이 사주는 건 좋아하지. 가자.”

혼잣말인지 놀리는 건지 모르겠는 말을 하며 팔을 잡아당긴다. 손목을 잡은 손길이 부드러워 잠시 버텨볼까 고민했으나 배고픈 건 사실이었기에 곧 이끄는 힘에 못 이기는 척 발걸음을 뗐다.

스낵 코너의 천장 아래 달린 스크린을 보며 고민하던 주하얀은 무난히 통소시지를 시켰고, 남자는 콜라와 팝콘 구성의 커플세트를 시켰다. 다 먹기엔 많지 않나 싶었지만 굳이 저지하진 않았다. 다만 카운터 옆 진열대에 걸린 솜사탕까지 함께 계산해달라며 내밀었다.

“맛있어? 잘 먹네.”

계산을 마치고 잠시 기다려 받은 짐은 역시나 많았다. 둘이 양손을 무겁게 들고도 콜라 하나는 품에 안아야 할 정도였다. 영화관 로비에 있는 테이블에 음식을 늘어놓고 주하얀이 뜨거운 소시지를 조심히 먹는 동안 신이혁은 그 모습을 구경했다. 음식에 정신이 팔려 그를 알아채지 못하던 주하얀은 소시지를 거의 다 먹어갈 때쯤 묻는 맛있냐는 말에야 뜨끔하여 눈을 돌렸다.

“드셔 보실래요?”

“하얀이 먹어.”

손바닥에 턱을 괸 신이혁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애초에 뭘 먹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러면서 시키긴 왜 이리 비싼 걸 시켰대. 마지막 한 입으로 소시지를 해치운 주하얀이 콜라를 마시자 그도 따라 음료를 마셨다. 그나마도 팝콘 쪽으론 손도 대지 않는다.

급히 음식을 뱃속에 집어넣은 후에야 마음이 너그러워진 주하얀이 숨을 푹 쉬었다. 냅킨으로 입을 닦고 자리를 정리하는데 타이밍 좋게 상영관 입장을 시작한다는 직원의 소리가 들린다. 다시 짐을 한가득 품에 안고 일어서자 신이혁은 욕심 많은 햄스터 같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J열 6번…. 여기다.”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는 상영시간이 십분 남짓 남아있었다. 시끄러운 광고 소리로 꽉 찬 상영관을 빙 둘러본 주하얀이 분홍색 솜사탕을 집어왔다. 음료 테이크아웃 잔에 꾹꾹 눌러 담아 파는 솜사탕이었다. 무향에 먹기 시끄러운 음식도 아니라 골랐다.

“솜사탕.”

오랜만에 먹어보는 달큼한 음식에 말에 절로 음이 붙는다. 색이 예뻐 샀는데 달리 맛이 있을지 모르겠다. 뚜껑을 열어 윗부분을 잡아당기자 주욱 솜처럼 찢긴다. 끝부터 혀로 으깨 입에 넣으면 금세 단맛이 퍼진다. 손에 남는 끈적한 설탕물마저도 달갑다.

솜사탕이 입안에서 금방 녹아내리면 그만큼 다시 한 움큼을 찢어 입에 넣는다. 손길 몇 번에 내용물 반절이 없어진 컵에 손을 집어넣는데 아까 전부터 진득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단번에 눈이 마주친다.

“맛있어?”

“네.”

“나도 줘봐.”

이번에도 눈이 마주치면 으레 묻는 말처럼 그렇구나 하고 말 줄 알았더니, 예상 외다. 조금밖에 남지 않은 솜사탕이 아쉬웠지만 사준 사람에게 쪼잔하게 굴긴 싫어 컵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컵을 바라만 봤다.

“손이 모자라.”

먹으라는 의미로 손에 든 컵을 달랑 흔들자 신이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의 손엔 팝콘 통이 들려있었다. 사이즈가 크지만 들라면야 한 손은 무슨, 두 손가락으로도 달랑 들 수 있었다.

“먹여줘.”

“네?”

“이왕 버린 손 좀 쓰자.”

“무슨 소리예요. 그게.”

버리긴 뭘 버려. 멀쩡한 남의 손을. 주하얀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이럴 줄 알았어.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먹겠다 나선 거다. 투덜거리면서도 솜사탕의 끝을 찢어 내밀었다. 사준 사람에게 쪼잔하게 굴면 안 되니까. 대신 얄미워 조금만 찢었다.

“드세요.”

“음.”

“녹아요. 얼른.”

먹겠다고 나서더니 또 무슨 변덕인지 퍼뜩 입을 열지 않는다. 솜사탕을 든 손을 얼굴 앞에 대주어도 요지부동이다. 덕분에 버석하던 솜사탕이 체온에 녹아 손가락에 미끄럽게 눌어붙었을 때야 신이혁은 얌전히 젖은 설탕 덩어리를 받아먹었다.

“다네.”

“솜사탕이 설탕 덩어리잖아요.”

당연한 소리를 심상하게 하는 남자에 주하얀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아씨, 끈적거려. 붙였다 뗄 때마다 살이 딸려오는 검지와 엄지를 몇 번 오므렸다 폈다. 어차피 솜사탕을 먹다 보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하다. 차라리 얼른 먹고 치워버리자는 마음에 손을 다시 컵에 넣으려는데 손목이 잡혔다. 주하얀의 손을 가로막은 신이혁은 그대로 팔을 제 쪽으로 끌었다. 그리고.

“으, 뭐해요!”

대뜸 집게손가락을 입에 넣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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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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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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