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끝 한마디 정도를 입에 넣어 손톱과 표피를 혀로 몇 번이고 쓸었다. 축축한 입안의 감촉에 놀라 급히 손을 빼려고 했으나 붙잡는 힘이 더 강했다. 그가 두 손가락 사이를 샅샅이 핥는동안 주하얀은 놀라 의자 등받이에 답삭 달라붙어버렸다.
“달아.”
입 안에서 손을 씻었다 할 만큼 한참이나 손가락을 핥은 후에야 신이혁은 입을 뗐다. 말 그대로 단물은 모조리 빨아먹고 뱉어준 거다. 타이밍 좋게 상영관의 조도가 낮아진다. 온통 어둠에 잠식된 공간에서 그의 얼굴 반쪽에 빛이 든다. 시끄러운 광고 소리에도 그가 속삭이는 소리가 선명하다.
비록 10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다른 관객이 있다. 당장에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장소의 특성상 큰소리도 못 낸 주하얀이 축축한 손을 품에 안고 입만 뻐끔거리자 신이혁의 얼굴에 유쾌한 기운이 서린다. 그리고 붉어졌을 것이 분명한 얼굴선을 눈으로 훑는다. 가늘어진 눈이 실루엣을 타고 흐른다.
“얼굴이 잘 안 보여서 아쉽다.”
“아니, 지금… 그, 손가락을… 아니.”
“쉿. 영화 시작한다.”
주하얀이 조용히 따지고 들려하자 신이혁은 제 입술에 검지를 댔다. 이 상황을 불러일으킨 사람치곤 뻔뻔한 태도다. 이러려고 데려왔구나. 이럴 줄 알고. 참지 못한 주하얀이 남자의 뜻을 무시하고 작게 윽박이라도 지르려는데 영화의 앞에 딸린 제작사 광고가 끝나고 어둑하던 조명이 완전히 꺼졌다. 영화가 시작되려는 거다. 이젠 정말 따지고 싶어도 못한다.
주하얀은 놀라고 약 올라 속이 울렁거리는데 옆자리의 남자는 태연하기만 하다. 상영관이 암전 된 틈을 타 머리를 쓰다듬고 멀어지는 손에 주먹을 쥐어 어깨를 때렸다. 윽. 엄살을 피며 앓는 소리를 냈지만 마음이 풀리진 않는다.
고개를 스크린으로 돌린 주하얀이 제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남은 솜사탕을 집어먹을까 하다가 거꾸로 들어 입안에 털어 넣어 버렸다. 오랜만에 온 영화관이고, 보는 영화인데 어쩐지 집중을 못 할 것 같았다. 몸 안에서 탱탱볼이 튀는지 어수선한 정신에 괜히 더 눈을 부릅 떴다. 입 안부터 가슴속까지 울렁거릴 정도로 달았다.
* * *
한창 고속도로를 달리는 관광버스의 앞에 달린 작은 모니터엔 철 지난 영화가 재생되고 있었으나 그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좌석 등받이나 창문에 고개를 푹 파묻고 자기 바빠 떠드는 소리도 듬성듬성 들리다 말다를 반복했다.
2박 3일로 이어진 일정은 체력 좋은 이십 대 초반을 모두 초토화시켰다. 그중 주하얀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학 전 큰 행사인 새터를 앞두고 설렘과 걱정으로 시끄러운 단체방을 보며 마음 준비를 하긴 했으나 이렇게 온갖 방면으로 정신을 빼놓을 줄 몰랐다.
주하얀은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거리며 며칠 되지도 않았건만 여러 일에 치여 벌써 멀게 느껴지는 출발일을 떠올렸다.
[어디냐? 나 도착함]
[건물 앞]
[지금 들어가]
관광버스가 테트리스 블록처럼 주욱 늘어선 대운동장을 지나 소강당이 있는 건물로 들어서자 이미 사람으로 북적인다. 입구에서 배부하는 아침대용 주먹밥과 단과대 복장일 후드티를 받아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양손이 묵직했다. 졸지에 손이 묶인 채 안을 둘러보는데 다행히도 강신우를 찾는 게 어렵진 않았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가운데 제일 시끌벅적하고 요란스러운 사람을 찾으면 그게 마침 강신우였다.
“야.”
“어. 왔냐?”
“응. 옷 지금 갈아입으래?”
“엉. 아까 학생회장이 얘기하고 갔어.”
강신우는 이미 단체복을 입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위에 앉은 사람들의 모두 같았다. 꼭 체육대회 날 반티를 차려입은 것 같다. 주하얀은 고개를 끄덕이고 짐을 맡긴다는 핑계로 손에 든 물건을 모두 강신우에게 쏟아버렸다.
“아씨!”
짐을 챙긴 가방까지 떠맡기자 짜증을 내면서도 순순히 품을 빌려준다. 양팔 가득 든 짐 중 단체복인 후드티를 쏙 빼낸 주하얀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강당을 나왔다. 화장실은 문의 바로 옆에 있었다.
“더우려나.”
반팔티 위에 얇은 셔츠와 니트를 받쳐 입었던 주하얀은 셔츠 깃을 잡고 잠시 고민하다 이내 단추를 끌렀다. 어차피 대부분 실내에 있을 텐데 두껍게 입어 움직이기 불편한 것보다야 조금 춥더라도 편한 게 나을 성싶었다.
입고 벗을 게 많아 칸으로 들어왔는데 변기와 벽을 피해 갈아입으려니 영 쉽지 않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박차듯 문을 열고 나와 후, 짧게 숨을 뱉었다.
그나마 색이 튀지 않아 다행이다. 골반까지 내려오는 회색 후드티를 만지작대며 거울을 보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미묘하게 소재에 광택이 나고 만졌을 때 싼 느낌이 나는 건 아쉬웠으나 애초에 단체복에 대단한 퀄리티를 바라는 게 무리였다.
옷을 갈아입느라 그런지 화장실엔 계속 사람이 오갔다. 오래 거울을 보고 서 있기도 민망해 대충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화장실을 빠져나와 다시 강당으로 들어갔다.
“오 잘 어울리네.”
조금은 민망하게 다가가 벗은 셔츠와 니트를 개 가방에 정리해 넣는데 옆자리의 강신우가 장난 섞인 감탄을 뱉는다.
“역시 사람은 인물이 되고 봐야 돼.”
“뭐래. 오버하지 마.”
“야. 너 저기 가서 앉아. 비교되게 옆에 있지 말고.”
“괜찮아. 넌 성격이 좋잖아.”
“아니 씨, 여기서 그렇게 나오면 안 되지. 나를 좀 옹호해줘야 할거 아니야.”
진심이 아닐 자기 비하를 하는 강신우를 보며 짐짓 안쓰럽단 표정으로 어깨를 다독이자 바로 반응이 온다.
“이럴 땐 너도 잘 생겼다고 해야지!”
발끈하며 기껏 칭찬해줬더니 은혜도 모르는 새끼라 바락 대더니, 여즉 들고 있던 짐을 던지듯 건네준다. 그리곤 복수인지 등을 한 대 치는데 소리만 요란하니 아프진 않았다. 역시 착해. 잘못했다며 몸을 웅크리면서도 주하얀은 웃었다.
첫 만남 이후로 연락을 쭉 이어가서 그런지 두 번째 대면임에도 꽤 스스럼없이 굴 수 있게 되었다. 방금까지 티격 거려 놓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둘은 저들만의 얘기를 하느라 바빴다.
“자. 저희 집합시간 넘었으니 이제 공지하겠습니다.”
저번에 단상에 올랐던 학생회장이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출발 전 간단한 일정 안내와 유의사항 전달, 새터 기획단 소개가 이어졌다. 마이크를 다시 내려놓았을 때는 벌써 1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내내 박수만 치다 이동해 드디어 차를 탈 때는 랜덤으로 짝이 정해졌다. 학우들끼리 친해지기 위함이란 명목으로 친한 사람끼리 모여 선 줄을 뒤죽박죽으로 섞어댔고, 결과적으로 정해진 짝은 동갑의 여자애였다.
“안녕.”
“안녕.”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정적을 못 이겨 잠시 대화거리를 찾아 얘기를 나눴다. 주제는 탁구공처럼 통통 튀어 다녔고 언제나 대화의 끝은 어색한 웃음이었다. 타이밍 좋게 기획단이 게임을 시작한 덕에 대화는 끊겼다.
가위바위보나 뽑기를 통해 정해진 술래로 누구는 맨 뒷자리 앉은 재학생 한 명의 소지품을 받아와야 했고, 누구는 노래를 했다. 그런 식의 주목은 질색이기에 주하얀은 눈치를 보며 슬쩍 들었던 손을 내렸다.
“자. 숙소에 짐 놓고 저녁 먹으러 이동할 거예요. 각자 조장 따라서 줄 서고!”
근 세 시간 만에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별 일 없이도 녹초였다. 원래라면 들떠 시끄러웠을 강신우도 가방 위로 엎어져버렸고, 주하얀도 벽에 등을 기댄 채 몸을 쉬었다.
“맛없어.”
“대충 먹고 1층에 있는 매점 가자.”
예상한 대로 숙소 밥은 그저 그랬다. 급식이 다 그렇지. 애초 기대도 하지 않았다. 과 순서대로, 그 후엔 조 순서대로 이루어졌기에 주변이 모두 같은 조 사람이다. 애초 새터에 온 목적대로 식사는 뒷전에 두고 친구 사귀기에 바빴다. 밥은 내내 깨작대다 시간이 제법 지났을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을 나오자마자 같은 조 사람들과 함께 매점에 가 핫바를 하나씩 사 입에 물고 방으로 돌아갔다.
[숙소 도착해서 저녁 먹었어요]
[사장님은 식사하셨어요?]
[아직.]
[하얀이가 없어서 외롭네.]
정해진 저녁시간이 끝날 때까진 달리 할 일이 없다. 매점에서 사 온 과자 몇 개를 뜯어 조원과 나눠먹던 주하얀은 막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잠시 고민하다 과자 기름이 묻은 손가락을 쭉 뻗고 약지로 액정을 두드렸다.
[ㅎㅎㅎ]
저녁 일정은 빨리 지나갔다. 숙소 뒤에 딸린 체육관에 모여 신입생 환영행사를 마쳤을 때는 벌써 해가 뉘엿하게 저물었다. 방으로 돌아와 친목을 도모한답시고 게임을 몇 판 한 후, 술을 두고 둥글게 모여 앉은 게 벌써 9시였다.
“…아!”
“오! 걸렸다! 너 처음 걸린 거지? 질문 내가 할게.”
“아씨… 쉬운 거로 해.”
“음. 살면서 차일 때 들은 말 중 가장 충격이었던 것.”
“아 미친! 뭐 그런 걸 물어봐.”
“몰라. 무조건 대답해야 돼. 거짓말하기 없기.”
처음엔 행사처럼 흘러가던 술자리가 파장에 이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늦어 취침시간이 다가오자 1차로 남녀가 각자 배정받은 호실로 흩어졌고, 2차로 주취자가 이탈했다.
결국 고작 여섯 명이 모여 앉았다. 하지만 친해지는 덴 진실게임이 최고라는 강신우의 고집에 게임을 돌린 지 세 판만에 누군가의 비명과 고성이 난무해 남은 이들은 빨리 잠들 길이 더 묘연해졌다.
“아… 아….”
“빨리 정해라. 말하든지 마시든지.”
“아 잠시만 있어봐!”
저 못된 놈. 괴로워하는 술래와 얄밉도록 신이 난 강신우를 흥미롭게 관전하다 옆에 따라두었던 콜라를 마시는데 문득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한다. 의아하게 화면을 켜 이름을 확인했다.
신이혁 사장님. 시간이 곧 12시인데 아직도 안 자는 건가.
[술 많이 마시지 마. 너 술 약해.]
아까 전 보낸 술 마시는 중이라는 메시지에 대한 답인가 보다. 자신도 아는 사실이지만 지적을 받자 괜히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짐짓 어깃장을 놓으려는데 연달아 메시지가 날아온다.
[사진]
[집이 조용해서 잠도 안 오네]
글자가 귀에 읽히는 것 같다. 술이 든 얼음잔을 비스듬히 찍은 사진을 확대해 보던 주하얀은 픽 웃었다.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일을 했다 싶다. 볼이 뜨뜻하도록 술이 오른 탓인지 웃음이 헤프게 흐른다.
아침부터 끊어질 듯 연락을 이어가는 남자는 처음 주하얀이 새터 얘기를 꺼냈을 때 다소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너처럼 자유분방한 채무자는 없을 거다.’
몰래 도망가려는 거 감시한다고 담보로 앉혀두고 매일 들여다봤는데, 이젠 저 좋을 대로 놀러 간다고 통보를 받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잠시 허공을 보며 한숨을 쉰 신이혁은 ‘새삼…. 내가 어린놈하고 무슨.’ 하고 혼잣말인지 애매한 말을 중얼거리더니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갔다 와. 연락만 잘해.’
‘네.’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곱게 대답하며 눈을 빛내는 주하얀을 보고 신이혁은 잠시 복잡한 표정을 했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얼굴을 훅 훑어내린다. 힘에 밀려 고개가 아래로 기우뚱 끌려간 주하얀이 눈을 크게 떴다.
‘술 적당히 마시고. 취해서 아무나랑 부둥켜안고 자지 마.’
‘절 뭐로 보고…!’
‘경험에 비추어볼 때, 가능성 있는 일일 텐데.’
반박하려 고개를 치들었으나 이어진 말에 도로 고개가 수그러든다.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서다. 그가 칭한 경험도 같은 것이었는지 좁아든 눈에 즐거운 기색이 스친다. 전에도 후에도 그렇게 마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려다 괜히 더 구차해지는 기분에 입술만 웅얼거렸다.
‘용돈 필요하면 말해.’
‘괜찮아요.’
‘그냥 줄 때 받지.’
‘저도 돈 많아요.’
단호히 거절하고 나서자 신이혁은 주하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을 마주 보다 문득 머쓱해져 눈을 내리깔았다. 그에게 받은 돈으로 자랑을 한 것 같아 조금 민망하다. 물론 상대방은 별 뜻이 없었는지 알겠다며 넘겼지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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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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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