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죽겠어. 졸려.”
“어제 몇 시에 잤냐?”
“몰라. 새벽 2시?”
둘째 날의 일정은 더 빡빡했다. 사실 외부로 나가는 시간은 별로 없고 내내 체육관과 강당을 돌아다니며 학과 행사에 참석한 것뿐이지만 피로감은 만만찮았다. 첫날밤의 숙취로 인상을 구기고 다니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오전엔 볕이 잘 드는 강당에 모여 학과와 중앙동아리 홍보를 듣고, 밤엔 체육관에 모여 틈나는 대로 주입당한 단과대 응원가를 목청 터져라 불러야 했다. 초대가수의 공연에 흥분한 강신우에게 끌려 인간 바리케이드 앞에 달싹 붙어있다 숙소에 돌아와선 데자뷔처럼 술병을 늘어놓았다.
“속 울렁거려.”
“나도. 아, 죽겠다.”
당연하게도 돌아온 아침에 인원의 절반은 시체 꼴을 면치 못했다. 주하얀은 메뉴에 딸린 콩나물국을 두 번이나 들이켰다.
퇴소식 후 버스를 탔을 때는 또 옆자리 사람이 바뀌었다. 올 때와 달리 반갑게 말을 거는 통에 당황했는데 다행히 출발한 지 오래지 않아 옆 사람은 잠에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버스 안의 인원 대부분이 쓰러지듯 잠들어 주위가 조용했다.
불편한 자세에 자다 깨다를 반복 했다. 숙취와 멀미가 겹쳐 살살 머리가 아파오려는데 무릎에 올려둔 코트가 진동한다. 정확히는 코트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언제쯤 오시나.]
첫날 애인이 있다는 모함 아닌 모함을 당한 이후 핸드폰만 만지작거릴라치면 애인과 연락을 하냐며 약 올리는 강신우 때문에 연락도 잘 못했다. 아마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부정은커녕 맞다며 나서겠지. 흥미로워할 모습이 당장 그려진다.
[1시간 후면 학교 도착할 것 같아요]
[데리러 갈게.]
도착시간을 물을 때부터 이럴 줄 알았다. 평소라면 괜찮다고 한사코 거절했겠지만, 체력이 달린 지금은 그런 친절이 달가웠다. 자칫 아직도 부모가 싸고도는 애새끼처럼 보일까 싶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는 부모가 아니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선택은 아주 바람직했다. 대학교 내 대운동장에 줄지어 선 버스에서 하차했을 때는 무거운 피로를 넘어 탈력감마저 들었다. 별도의 소집 없이 버스에서 내리는대로 해산하라는 공지에 주섬주섬 가방을 고쳐 매고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하암. 졸려. 잠이 덜 깼어.”
“와아 죽겠다. 이러고 다음 주에 개강이야.”
“체력 아껴둬. 난 집에 가자마자 뻗을 거야.”
“나도.”
강신우와 새로 친해진 동기 두 명과 함께 학교를 빠져나왔다. 사람이 몰려 붐비는 인도를 느그적느그적 내려온다.
[정문 앞에 있어.]
[어디쯤?]
[저 이제 내려가요]
문자에 답장을 보내는데 어깨로 무거운 게 툭 떨어진다. 강신우가 팔을 걸쳐 기대듯 몸에 힘을 실어온다.
“다들 집에 어떻게 가냐?”
“정문 앞에서 버스 타면 바로야.”
“난 지하철 타.”
“버스 개부럽. 넌 주하얀이랑 나랑 같이 역으로 가면 되겠다.”
걸친 팔에 힘을 줘 제 쪽으로 당긴다. 팔이 목에 걸려 숨이 막힌 주하얀이 팔을 세게 내려치자 뒤늦게 미안하다며 팔에 힘을 푼다. 두어 번 기침을 한 주하얀이 목을 문지르며 말했다.
“난 오늘 지하철 안 타.”
“어? 왜.”
“차가 데리러 와서. 그거 타고 가.”
“와 씨 얘가 제일 부럽다.”
벌써 저 앞으로 정문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 줄지어 서 있는 차들도. 주하얀은 그중에서 신이혁의 차를 손쉽게 알아차렸다. 밤중에도 한눈에 알아봤는데 환한 대낮에 찾아내기는 식은 죽 먹기다.
“부모님이 오신 거야?”
“아니 애인이.”
“아아… 엉?”
“나 먼저 간다. 잘 들어가라!”
새터 내내 그렇게 우려먹던 방식대로 대답한 건데 강신우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거짓말인데. 바보들. 상대가 말을 이해할 시간도 주지 않고 앞으로 튀어나간 주하얀이 손을 흔들며 달음박질을 치자 뒤늦게야 뒤에서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야! 주하얀! 뭐? 누구 차?! 어딜 도망가!”
하지만 이 상태에서 잡히면 엄청 시끄러운 추궁과 호들갑을 듣게 될 걸 아는 주하얀은 뒤를 돌아 팔을 휘젓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차에 다가갔다.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조수석의 문을 열자 당연하게도 운전석에 앉은 신이혁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 하얀이.”
“안녕하세요.”
“재밌게 잘 놀아 왔어?”
“네. 근데 엄청 피곤해요.”
“그래. 얼른 집으로 가자.”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차를 출발시킬 때까지 내내 코트 주머니가 울었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여러 가지로 놀랐을 놈들의 추궁 가득한 메시지겠지.
“전화 안 받아도 돼?”
“아. 전화 아니에요.”
화면이 꺼질 틈도 없이 계속 울리는 진동에 주하얀은 얼른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꾸었다. 시끄러운 대화방에 들어가 메시지 옆에 뜬 숫자 1만 없애고 나오자 반응은 더 격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하얀은 핸드폰을 아예 코트 안에 넣어버렸다.
옆자리에서 의아한 시선이 스쳤지만, 구태여 묻진 않는다. 그에게는 시끄러운, 심지어 지금은 멎은 소리보다는 옆에 앉은 주하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는 게 더 중요했다. 손길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뜬 주하얀은 시트에 몸을 묻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눈을 붙일 요량이다.
* * *
이미 정해진 일임에도 자꾸만 손이 굼뜨게 움직인다. 날짜도, 장소도 모두 자신이 골랐다. 비록 신이혁에게 세 개의 선택지를 받아 그중 하나를 꼽은 게 다였지만, 어쨌든 일의 진행에 주하얀의 책임도 있다는 말이다.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그 사실을 자꾸만 거부했다. 아까부터 핸드폰 충전기의 케이블만 만지작거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동글게 잘 말곤 마음에 안 든다며 풀기 벌써 네 번째다.
“하얀아.”
“…네!”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주하얀은 손에 든 충전기를 언제 애지중지했냐는 듯 대충 가방에 쑤셔 넣었다. 방을 나서 계단 난간에 기대자 1층 가까이 신이혁이 보인다.
“준비 다 했어?”
“으음…. 네.”
“그래. 이제 내려와. 필요한 거 있으면 거기서 사면 되니까.”
위층까지 소리가 닿도록 크게 말하는 그의 손엔 검은색 가방이 들려있다. 그 모습이 새삼스레 낯설다. 가끔 출근할 때 서류가방을 든 걸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건 가방이라기보다는 복장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나왔을 때와 똑같이 방으로 뛰어 들어가 가방을 들고 왔다. 계단을 내려가자 그 사이 움직였는지 신이혁은 현관 근처 거실에 서 있었다. 아무 무늬가 없으나 비쌀 것이 분명한 검은색 니트에 회색 패딩점퍼를 걸쳤다. 평소엔 정장 코트를 입은 모습만 보아왔던 터라 그 모습이 조금 신기했다. 다가가며 티 나지 않게 차림을 살펴보는데 그가 돌연 낮게 웃는 소리를 냈다.
“뭘 그렇게 따뜻하게 입었어.”
주하얀은 충전제가 빵빵하게 들어가 겨드랑이를 붙이는 것도 빠듯한 숏 패딩을 입고 있었다. 털신발까지 신으면 딱 한겨울 집 앞의 눈을 쓸러 나가는 사람 같은 차림이다.
“겨울 바다는 추워요.”
물론 자신도 잘 모르는 일이다. 그냥 검색 결과가 그러했다. 사실 아까 목도리도 챙길까 하다가 너무 수선을 떠는 것 같아 말았었다. 잘한 선택이었나 보다.
“그래. 이따 나 추우면 옷이나 벗어줘.”
“그러다 감기라도 들면요.”
자고로 없는 사람은 몸이 자산인 법이다. 더구나 곧 일을 구해야 하는데 골골대면 곤란하다. 놀리는 말투에 삐죽하고 대답한 주하얀이 현관으로 내려갔다. 공간이 좁진 않았으나 옷의 부피가 커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벙벙한 팔뚝이 그의 가슴팍을 툭 쳤다. 엄연한 실수였고, 솜방망이질이 아플 리도 없는데 신이혁은 휘청거리는 척을 했다. 입에 건 웃음을 지우지도 않고 장난을 치다 허리를 숙여 얼굴 앞으로 불쑥 다가오더니 이마를 덮은 머리칼 위에 입 맞춘다.
“가자.”
방금까지 엄살을 부려놓곤 번쩍 몸을 바로 세운 신이혁이 먼저 현관을 나선다. 온기가 스쳤던 흔적도 남지 않은 머리를 괜히 만지작거리다 곧 뒤를 따랐다. 그의 말대로 너무 두꺼운 옷을 골랐나.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 주하얀은 갑자기 더워하며 맨투맨의 목덜미를 펄럭거렸다.
바다는 멀었고 기다림은 지루했지만, 여행이 불러온 설렘은 모든 걸 상쇄해주었다.
점심식사 겸 쉬기 위해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에선 양손이 무겁도록 음식을 샀다. 그래 봐야 고작 소시지 핫바나 통감자 따위가 다라서 신이혁은 몇 번이고 배가 고프지 않겠냐고 되물었지만 주하얀은 괜찮다고 고집을 부렸다.
“자. 마셔.”
“감사하미다.”
입 안 가득 뜨거운 감자를 씹느라 발음을 뭉갠 주하얀은 건네받은 레모네이드를 단숨에 들이켰다. 입안을 적시는 찬 음료와 함께 감자를 목구멍으로 꿀떡 삼키고 숨을 푹, 내쉰다. 이제 겨우 커피 한 모금을 마시던 신이혁은 그 모습을 보곤 입꼬리를 한번 들썩이며 웃었다.
“천천히 먹어.”
“맛있어요.”
“다행이네.”
주하얀이 휴게소 주전부리로 배를 채울 동안 그는 해장국인지 국밥인지 뚝배기에 담아 나오는 음식을 주문했다. 아저씨 같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이어진 설렘 때문인지 평소라면 속으로만 했을 농담을 던졌고, 신이혁은 이 나이면 아저씨가 맞다며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들썩이고는 말았다.
“갈 때 뭐 더 사갈까.”
“음. 호떡 먹어도 돼요?”
“마음대로 해. 카드 줄게.”
처음엔 자신이 먹을 것이니 제가 계산하겠다고 나서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생각보다 고분고분 카드를 받아 든다. 아마도 휴게소 음식 정도면 어른에게 얻어먹어도 될 금액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카드의 주인으로선 말을 더 하지 않아도 돼 다행인 셈이다.
다른 음식을 먹을 생각에 신이 났는지 크게 소시지를 베어 먹은 주하얀의 입가에 머스터드 소스가 묻었다. 신이혁은 오물거리는 입술 옆의 소스를 엄지로 닦아 제 입으로 가져갔다.
“천천히 먹어. 체해.”
손에 묻은 소스를 쪽 빨아먹으며 말하는 신이혁에게 일상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주하얀은 자연스럽게 흘러간 일련의 행위의 이상과 지금의 낯선 공간을 뒤늦게 상기하곤 눈을 커다랗게 떴다.
타이밍이 얄궂게도 건너 자리에 앉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단순히 주위를 살피다 시선이 맞은 느낌이었지만 괜히 혼자 뜨끔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신이혁은 젖은 손을 티슈에 닦고 있었다.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되어 얼른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밖에서는 그러지 마세요.”
“뭐?”
“묻은 게 있어도 말씀해주시면 제가 직접 닦을게요.”
“아.”
대단한 비밀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곤조곤 속삭이는 주하얀의 말을 들은 신이혁은 어렵지 않게 이 뜬금없는 말의 맥락을 알아챘다.
스킨십이 너무 익숙해진 건지 닦아주어야겠단 생각에만 집중해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입가에 묻은 걸 손수 닦아준 게 문제였는지, 닦아낸 소스를 스스럼없이 핥아먹은 게 문제였는지. 아니면 둘 다였는지 주하얀은 멋쩍은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는 제 입술 따위를 닦아주지 못하도록 한 입을 먹을 때마다 티슈로 입을 닦았다. 그 예민하고도 하찮은 모습이 귀여워 불쑥 짓궂게 굴까 싶다가도 지레 겁먹은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굴어 골치가 아파질까 아쉬운 마음을 접었다.
주하얀이 이 여행을 신경 쓰고 있음은 아침 내내 어설프게 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여행지가 먼바다인 것도, 여행의 일정이 1박 2일인 것도 이유일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1)============================================================
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