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졸리면 자도 돼. 노랫소리 줄여줄게.”
“아니에요. 안 자요.”
아까 전 휴게소에서의 당황은 잊은 건지 결국 호떡까지 사 야무지게 입에 문 주하얀이 과장되게 눈을 부릅 떴다. 먼 여행길에 도맡아 운전까지 해주는데 조수석에 앉아놓고 잠을 자는 비매너를 보일 수는 없다. 운전자가 썩 기대하지 않는 눈빛으로 바라보아도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해요?”
“한 시간 반? 졸리면 자.”
“아니에요. 안 졸려요.”
처음엔 괜찮았다. 입안에 먹을 것을 야금야금 넣으며 대화까지 곁들이니 잠이 올 틈이 없었다. 이따금 음식을 입에 넣어주면 신이혁은 눈을 접어 웃었다.
하지만 휴게소에서 산 음식을 다 먹어 치운 후론 슬슬 식곤증이 밀려왔다. 이어지던 대화가 멎자 증상은 더 심해졌다. 점점 깜박이는 게 느려지는 눈꺼풀 아래로 앞의 상이 흐려진다. 핸들을 잡지 않은 오른손이 주하얀의 왼손을 잡아 엄지로 손가락 등을 매만졌다. 그 간지러움마저 평화롭게 느껴진다. 꾸벅대며 고개가 꺾이고 눈가가 달라붙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어느 결에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오감이 멀어진다.
“끄응….”
크게 덜컹이는 차에 눈을 떴을 때는 꽉 막힌 도로를 벗어난 후였다. 해수욕장 앞 주차장은 관리하지 않아 울퉁불퉁했다. 시트에 머리를 콩콩 튕긴 주하얀은 잠을 몰아내기 위해 눈을 비볐다.
“일어났어?”
“네….”
자다 깬 목소리로 힘없이 대답하며 창문을 내다보았다. 코앞에 바다가 있다. 희미하게 파도소리가 들리는 듯 해 창에 코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주차를 마친 신이혁은 그 동그란 뒤통수를 쓸어주었고, 자신을 돌아보는 주하얀에게 짧게 입 맞췄다. 손수 안전벨트까지 풀어주는 동안 아직 붕 뜨는 잠 기운을 다 달래지 못한 주하얀은 얌전히 손길을 받았다.
“그래도 많이 춥진 않네.”
“다행이에요.”
애초 겨울의 기운은 한숨 물러난 시기이다. 바닷바람이 볼을 차갑게 치고 갔으나 살이 에일만큼의 위력을 보이진 않았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 위를 앞서 걸으면 신이혁이 그 뒤를 따랐다. 서울만큼 주위가 온통 고층건물은 아니어도, 주하얀이 살던 동네에서 흙을 볼 수 있는 곳은 학교 운동장이 전부였다. 주택단지의 아파트와 자동차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보니 절로 가슴이 뻥 뚫린다. 코가 얼얼한 찬 공기마저 숨을 트이게 한다.
“좋아?”
“네. 너무 좋아요.”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다.”
주하얀이 차가워진 볼을 양손으로 감싸고 먼 수평선을 한참이고 바라보는 동안 신이혁은 그 옆을 지켰다. 밀려온 파도가 해안가 옆 바위에 부딪쳐 포말을 일으킨다. 이대로 하루 종일이라도 부서지는 파도와 반짝이는 햇살 조각을 보며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귀가 빨개졌네.”
따뜻한 손이 주하얀의 빨갛게 오른 귀를 매만졌다. 한여름에도 제법 서늘한 게 바닷바람이다. 날씨가 풀렸다곤 하나, 참을 만하다는 거지 춥지 않다는 건 아니다. 언 귀를 문질러 녹여주던 신이혁은 계속 바다를 볼 거라면 실내로 자리를 옮길 것을 권했다. 주하얀은 순순히 알겠다고 했고, 둘은 해수욕장을 둘러싸고 줄지은 카페 중 하나로 들어갔다.
따뜻한 라테와 핫초코를 들고 프랜차이즈 카페 2층으로 올라갔다. 창가 자리에 앉은 주하얀은 아예 몸을 틀어 바다를 내다보았다. 여름이었다면 옥상 루프탑으로 갔을 텐데. 파도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게 못내 아쉽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더욱 아름다웠다. 갈색 모래는 햇빛 때문에 본래보다 하얗게 보였고, 일렁이며 다가왔다 멀어질 때마다 파도는 잔 거품을 만들어냈다. 눈을 뜨고 꿈을 꾸듯 멍하니 시선을 흐리고 있다 음료에 손을 뻗었다. 어느새 차갑게 식은 음료를 드는데 눈이 마주친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금방 눈을 돌리다 마주친 것 같진 않았다.
“언제 쳐다봐주나 했는데.”
의자 팔걸이에 팔을 세워 턱을 괸 신이혁은 손목을 털어 시계를 확인했다.
“삼십 분 걸렸네.”
“아….”
“바다 안 왔으면 서운할 뻔했지.”
잠시 혼자만의 감상에 잠겨 타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바다 풍경에 특별한 감상을 느끼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오죽 지루했으면 하릴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죄송해요. 이제 나갈까요?”
“더 안 봐도 돼?”
“네, 괜찮아요. 지루하셨죠.”
“아니. 나도 바다 좋아해. 가만히 보고 있기 좋잖아.”
그러며 고개를 돌려 창을 내다본다. 창문으로 드는 햇빛에 색이 연해진 눈동자가 바다를 향한다. 구석구석을 짚듯 찬찬히 시선을 옮기다, 얼마지 않아 다시 주하얀에게 돌아온다.
“그래도 이쪽 풍경보단 못해서.”
그의 표정은 안온했다. 눈꼬리는 부드럽게 풀려있었으며, 시원한 입매는 끝이 올라가 있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장면을 목도한 것처럼. 마음의 허기를 채워줄 무언가를 발견해낸 것처럼. 내리 쐬는 햇빛마저 그를 위해 안배된 하나의 장치 같다.
이번엔 주하얀이 고개를 돌렸다. 내내 바라보던 파도와 빛무리가 거기 있다. 한 번, 두 번. 모래에 부서져 반짝이며 멀어지는 바다를 보다 앞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미소가 조금 더 짙어진다.
“이제 슬슬 나갈까?”
“…네.”
얼른 남은 음료를 마시려 머그컵을 드는데 큰 손이 다가온다. 손등을 덮어 컵을 쥔 손이 잠시 온도를 가늠한다. 다 식었네.
“먹지 마. 나가면서 하나 더 사줄게.”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이거 마실게요.”
“나가면 또 추워. 따뜻한 거 마셔.”
남은 손까지 내밀어 조심히 주하얀의 손에서 머그를 빼냈다. 더 거절도 못 하고 컵을 빼앗긴 주하얀의 손을 부드럽게 놓아주곤 머그를 트레이 위로 올린다. 신이혁이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주하얀은 트레이를 정리하겠다고 나섰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자 손이 뒷머리를 쓸어내린다.
건물을 빠져나오자 히터의 훈기가 빠지며 시원한 공기가 달라붙는다. 역시 루프탑에 올라갔으면 더 좋았을걸.
“조심해. 그러다 젖는다.”
장소를 이동하기 전에 둘은 한 번 더 바다 가까이 내려갔다. 가게를 나와서도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주하얀을 위해 신이혁이 먼저 등을 밀어주었다.
처음엔 멀찍이서 보기만 하더니 이번엔 파도 가까이 다가갔다 뒷걸음질 치기를 반복했다. 물이 쓸려내려가면 앞으로 나아가고, 파도가 다가오면 서둘러 도망치길 열 번도 하지 못해 그만 신발을 다 적셔버렸다. 당부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안아줄까?”
바지춤을 부여잡고 차가운 발을 동동거리자 신이혁은 양팔을 벌렸다. 젖었다 한들 신발이 아닌 것도 아니고 모래사장을 걸어 나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더욱이 업혀서도 아니고 안겨서는 싫다. 됐다고 거절하자 그도 크게 긍정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지 순순히 물러났다.
바다를 보고 신난 강아지처럼 달려들다 발이 젖는 바람에 다음 목적지는 숙소가 되었다. 차에 타기 전 주하얀은 모래 범벅이 된 신발에 난감해했지만, 남자는 혹여 감기라도 들까 걱정하며 깨끗한 차 바닥이 모래 범벅이 되는 데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푸흐.”
새하얀 이불이 깔린 침대를 보자마자 주하얀은 불가항력처럼 그 위로 쓰러져버렸다. 단박에 뛰어든 몸을 출렁이며 받아낸 침대에 콕 볼을 묻었다. 몸을 비비는 대로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도 좋다. 방금 씻어 물기가 덜 마른 발을 마른 이불에 문질렀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저녁 먹으러 가자.”
“네에.”
다니던 아르바이트까지 그만두고 게으른 백수 생활 중인 주하얀은 꼭두새벽이나 다름없는 이른 아침부터 이어진 강행군에 피로를 호소했다. 나름 물놀이도 했겠다, 차게 얼었던 몸이 따뜻한 실내온도에 녹아내려 절로 정신이 나른해진다. 그러는 와중 들은 말은 지금 이 순간 가장 원하던 것이 아닐 수 없다.
늘어지게 대답을 하면서도 벌써 정신이 아득하다. 몸이 잠에 짓눌려 말꼬리를 질질 끄는데 주하얀이 누운 침대 한 귀퉁이가 아래로 꺼진다. 곧 다가온 손은 미동 없는 뒤통수를 쓰다듬더니 어깨로 내려간다. 팔이 누운 몸 아래로 비집고 들어오는 듯했으나 이미 잠 기운이 짙은 주하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으으.”
“그래. 이제 자자.”
다만 목을 울려 칭얼대는 소리를 내자 그를 들은 신이혁은 성의 없이 달래는 말을 했다.
언뜻 허벅지에도 손길이 닿았나 싶었다. 그리고.
“…으앗!”
주하얀은 누운 자세 그대로 달랑 들어 올려졌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쑤욱하고 바닥이 꺼지는 느낌과 함께 몸이 허공에 떴다. 머리꼭지까지 찼던 잠이 단박에 달아나 소리쳤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버둥거릴 틈도 없이 다시 침대에 처박힌다. 어디까지나 주하얀의 감상으로, 실제는 품에 안겨 함께 쓰러진 쪽에 가까웠지만.
“지금 뭐….”
“졸리다며. 자자.”
황당함에 주하얀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는 동안 신이혁은 태연하게도 이불을 끌어와 허리를 덮어주었다.
바다 쪽으로 창이 난 호텔의 룸엔 침대가 두 개였다. 퀸사이즈는 족히 될 큰 침대 옆에 싱글 침대 하나. 지금 주하얀은 자연히 자신의 자리로 생각했던 아늑한 싱글 침대에서 들려 남자와 함께 큰 침대에 눕혀진 것이다.
“저….”
“얼른 자. 두 시간 후에 움직일 거야.”
뭐라 입을 떼기 무섭게 말을 가로채 버린다. 더불어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 자꾸 가슴팍에 볼이 눌렸다. 어찌나 꽉 안았는지 답답함에 몸을 꼼지락거리자 의미 없이 등을 도닥여주던 신이혁이 몸을 조금 떼어냈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노긋하다.
“잠이 안 와?”
천천히 뜨이는 눈과 코앞에서 마주쳤다. 빛을 등져 어둑한 얼굴에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아니면 나랑 침대에서 하고 싶은 게 있나.”
짐짓 비밀 얘기라도 하는 듯 고개 숙여 속삭이는 말이 은밀하다. 이젠 정말 몸통이 닿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다. 뒷덜미와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감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반은 농담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진심이 반이나 된다는 말과 같다. 그는 때로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방식으로 굴었고, 그럴 때는 빨리 꼬리를 내리고 눈치를 살피는 게 상책이었다. 그와의 시간에서 주하얀도 학습하는 바가 있었다.
“아니요….”
슬그머니 마주하던 시선을 내렸다. 고개를 숙이고, 풀 죽은 듯 몸을 움츠려 이마를 판판한 가슴에 댔다. 졸지에 순순히 품에 파고든 모양새가 되자 그도 더는 짓궂게 굴지 않았다. 아까처럼 숨이 막히도록 몸을 옥죄지도, 무서운 말을 하지도 않는다. 다만 툭툭, 등을 두드리는 손만 여전하다.
“잘 자, 하얀아.”
기분 좋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는다. 머리카락 위로 닿는 입술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품에 고개를 비비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면 그 만면에 띤 미소를 보곤 저도 모르게 잘 자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르겠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어색한 분위기와 밀접한 자세를 잊기 위해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렸다. 다행히 큰 노력은 필요치 않았다. 피로에 전 몸이 잠으로의 도피를 도왔다. 숨이 가로막혀 답답함에 찡그렸던 이마가 곧 살금 풀어졌다. 품 안의 숨이 얕고 규칙적인 소리를 낼 때까지 신이혁은 한참이고 도닥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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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