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어 마이 세큐리티-53화 (53/61)

53화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요. 저는 다 잘 먹어요.”

개운하게 자고 일어난 후엔 호텔 근처 식당으로 갔다. 혹시나 하는 염려와 달리 바닷가에서 갈 수 있는 여느 횟집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메뉴판을 보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소리다. 주하얀은 그저 해안선을 따라 줄지어 들어선 횟집과 달리 깔끔한 내부를 둘러보다가 알아서 주문하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배부르니까 밑반찬 너무 먹지 마.”

당부에 알겠다고 대답은 잘했지만 메인인 회가 나왔을 땐 이미 배가 반은 찬 상태였다. 테이블이 빼곡하게 깔린 접시들은 하나씩만 주워 먹어도 꽤 양이 됐다.

“입에 맞아?”

“네. 완전 맛있어요.”

회는 자주 먹어보지 않은 음식이라 걱정했는데 두툼하게 썬 살점은 다행히 고소하고 식감도 좋았다. 어느 생선이라고 했더라. 기억은 안 나지만 음식을 잘하는 식당인가 보다.

놀러 와서 기분도 좋겠다, 음식도 맛있겠다. 주하얀은 절로 흥이 나 음식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테이블마다 머리 위까지 올라오는 가림막이 쳐져있어 마음이 더 풀어지기도 했다.

“하얀아.”

회엔 소주를 곁들여야 한다며 같이 마시겠냐는 말에 넙죽 잔을 받아 든 게 네 잔째였다. 속도를 맞추기는 진즉에 포기하고 콩알만 한 잔을 몇 번에 나눠 홀짝거리는데 대뜸 이름이 불렸다.

“우리 이사할까?”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했다.

“타지로 가는 거지만 학교 다니긴 더 편할 거야.”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신이혁과 시선을 맞추다,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닫듯 눈을 깜빡였다. 우리? 같이 가자는 걸까, 자신과.

“이사요?”

“응. 집이 마음에 안 들면 새로 구해도 되고.”

집을 구한다는 말을 마치 헌 물건 갈아 끼우듯 쉽게 한다. 그것도 본인이 아닌 타인의 만족을 위해서. 왜? 무엇을 위해? 주하얀은 복잡한 심경이 되어 맞은편에 앉아 테이블에 팔을 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대를 살피는 건 신이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거리더니 곧 지레 심각해져 생각에 빠진 얼굴을 감상했다. 어리숙한 만큼 꾸밈없는 아이는 종종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저 귀여운 머리통에서 무슨 생각이 돌아가고 있을지 빤했다.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그런가.”

손바닥에 턱이 눌린 탓에 느릿하게 웅얼거리는 신이혁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그에게 이 제안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우상동이라는 촌동네로 오게 된 귀양인지 요양인지 모를 처분의 기한이 다가올 때부터 이럴 작정이었다.

“나쁠 건 없잖아.”

굳이 주하얀에게 티를 내진 않았으나 사실 그의 핸드폰이 이만 돌아오라는 연락으로 시끄러워진지는 시일이 좀 되었다. 처음엔 사용인을 통해 점잖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고작이더니, 뜻에 따르지 않자 신 회장은 직접 나서기에 이르렀다. 이번 달에 들어선 반성은 충분하니 이만 올라오라는 연락이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았다. 오죽하면 어머니까지도 아버지가 나이를 먹어 적적한 모양이라고 전화를 할 정도였다. 보낼 때는 언제고. 그로선 기가 막힌 일이다.

물론 그뿐이라면야 꼬장꼬장한 노인네의 귀찮은 연락 정도 가뿐히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남자라고 부득불 우상동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있는지도 몰랐던 지역이다. 애정은 무슨.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단연 주하얀이겠으나 정 필요하다면 서울로 데려가면 될 일이었다. 마침 합격한 대학교가 서울에 있으니 핑계가 좋았다. 이는 주하얀이 계약을 하고 동거를 수락하기 이전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혹시 고향에 애틋한 마음이라도 있어? 아니면 동네 유지가 꿈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다 해도 같이 가. 나쁠 거 없잖아.”

사실이다. 주거환경이야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고, 알아본 바로 서울의 집과 주하얀의 학교는 대중교통으로 고작 삼십 분 거리였다. 이젠 성인이니 우물 안 개구리를 밖으로 꺼내기에도 적절하다.

“그건 그렇죠.”

주하얀은 골몰하느라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곤 회 아래에 깔린 천사채를 헤집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어차피 지금 동네와 학교 간 거리 때문에 자취를 할까 고민스럽긴 했다. 평생 살아온 곳을 떠나는 건 두려운 일이지만, 누구든 함께할 사람이 있다면 분명 의지가 될 터였다. 거기에 부유한 사람의 집이니 분명 으리으리하다 할 정도로 좋은 곳이겠지.

다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그럼 원래 사시던 곳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집으로.”

“응.”

“그리고 거기에 저도 같이….”

“그렇지.”

“아… 예….”

당연한 걸 묻는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신이혁에 주하얀이 뭐라 할 대꾸가 없어 말끝을 흐렸다. 그래. 그게 문제다. 물론 지금의 상황도 문제를 찾자면야 수두룩하겠지만 정말 그의 집으로 이사를 가 함께 살게 된다면 그건 너무….

‘빼도 박도 못하게 동거잖아.’

답을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징징 울리는 말에 주하얀은 당장 얼굴을 가려버리고 싶었다. 평소엔 애써 생각지 않던 사실을 상기하려니 절로 낯이 뜨거워질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거주 형태도 동거인 건 맞으나 심적 사정은 엄연히 달랐다. 일단 그 집은 신이혁의 집이라기엔 임시거처에 가까웠고, 여타 원인을 제하고 보자면 자신 또한 그곳에 세 들어 사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서울의 집은 달랐다. 거긴 온전한 신이혁의 공간이며, 그가 자신의 소유로 인지한 것들의 집합체이다. 그 집으로 이사를 가는 순간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거리가 허물어질 것 같았다.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어진다.

“싫어?”

미적지근한 반응에 신이혁은 고개를 기울였다. 고민할 거야 알았지만 이렇게 떨떠름해하는 건 좀 의외롭다는 눈치였다.

주하얀은 섣불리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걸리는 점이 있으나 끌리는 점이 그에 상회함을 부정할 수 없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염세적인 사람이었나. 탓을 할 뿌리를 찾아내려 가면 이제는 가물가물한 지하셋방만 떠오를 뿐이다.

그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같이 가자. 하얀아.”

그의 존재는 주하얀을 추락시키는 금빛 동아줄이다.

“같이 살기로 했잖아. 약속, 기억하지?”

그때의 일은 약속이라는 간지러운 단어로 담기엔 다소 폭력적이었다. 그때 서명했던 서류의 조항들은 하나 같이 그를 비호하고, 얼마든지 주하얀을 위협할 무기로 쓰일 수 있다. 그건 주하얀도 알고, 신이혁도 안다.

그런 주제에 다정한 목소리를 낸다.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을 타이밍을 골라, 승낙하도록 설득한다. 결과를 정해놓고 결정권을 주는 것처럼 책임을 지운다. 그 모든 점을 알고도 결국 고개를 끄덕일 걸 알았을 것이다.

“네. 알겠어요.”

“정말?”

“네. 이사 가요. 어딘진 모르겠지만.”

주하얀에게서 돌아온 긍정의 답에 그는 눈을 접어 웃었다. 그 미소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공짜를 밝히다간 언젠가 정말 대머리가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애써 다른 생각이 들지 않도록 제 기회주의적 태도를 탓했다. 아니, 그래도 눈앞의 남자보다는 못하려나. 분명 처음엔 순수했던 웃음에 다른 기색이 섞여있다. 웃느라 가늘게 접힌 눈가가 딱, 악당에 어울렸다.

“생각을 잘못했어. 룸으로 갔어야 하는데.”

한숨 섞인 혼잣말이 들릴 듯 말 듯했다. 의아한 표정을 짓자 금세 고개를 저은 신이혁이 음식을 더 먹으라고 권했다. 그럼 음식을 집는 대신 젓가락의 끝을 입술에 문 주하얀이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

“그래도 제 생각엔 변화 없어요.”

“음?”

“언젠간 나갈 거예요. 언제까지고 신세 질 수는 없으니까….”

다른 부분은 눈먼척하고 고개 돌릴 수 있어도 이것만큼은 분명히 하고 싶었다. 일종의 마지막 양심이자 선이다.

“그래.”

저 혼자 결의에 차 선언하는 걸 가만히 보던 그가 곧 가볍게 대답했다.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곤 마음대로 하라며 첨언했다. 마치 앞에 “가능하다면”이란 말을 생략한 모양새라는 게 거슬렸지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푸으으.”

이야기를 잘 마무리했더니 식욕이 더 돋았다. 어쩐지 술도 마실만 하게 느껴졌다.

“하얀이 안 춥니?”

“갠찬아여.”

밤이 되자 몰아치는 바닷바람에 코가 맹맹해지고도 주하얀은 씩씩하게 고개를 저었다. 푸우, 크게 내쉬는 숨에 섞인 술기운이 바람에 금세 흩어진다.

“후우.”

얼마나 마셨더라. 처음엔 큰 결심을 한 기념이라며 주는 대로 넙죽 받아 마셨다. 그러다 술은 술을 부르는 법이라 종내엔 스스로도 제법 따라 마셨던 것 같다. 테이블 위에 초록병이 두 개, 세 개…. 그 이후는 세지 않아 모르겠다.

식당을 나왔을 땐 오른 취기만큼 기분이 좋아져 바다를 보고 들어가자고 졸랐다. 처음엔 춥다고 달래던 신이혁도 차라리 찬바람 맞고 정신 차리는 게 낫다 싶었는지 순순히 협조했다. 그렇게 바라던 바다였는데 막상 와보니 어두워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아쉬운 대로 쭈그려 앉아 젖은 모래를 만지작거리다 그도 손이 시려 그만두었다.

“바다 보니까 좋아?”

“네.”

“술은 좀 깨고?”

“모르겠어요.”

패딩 지퍼를 끝까지 올려 한껏 목을 움츠린 채 웅얼거렸다. 찬 공기가 뺨을 때릴 때마다 정신이 드는 건 같은데 머리가 점점 지끈거려온다. 그나마 희미하게 보이는 바다 끝을 눈으로 더듬거리면 속이 좀 진정되는 거 같다.

“나중엔 바다 쪽에 집을 사야 하나.”

신이혁이 작게 말했다. 질문인 것 같진 않았다. 주하얀의 옆에 서 잠시 같은 방향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렸다. 손가락 끝에 차게 언 머리카락이 사락 스친다.

“일어나. 감기 들겠다.”

이번엔 더 고집부리지 않았다. 바다는 내일 또 봐도 되니까. 더 있다가는 그의 말대로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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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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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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