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어제 기억 안 나?”
“네?”
“어제. 밤에.”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자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조금 더 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어젯밤에? 그래도 입을 다물고 대답을 하지 않자 서운한 체하며 입술을 내민다. 말투엔 안심한 기색을 다분히 낀 주제에.
“자는 사람한테 변태라길래 기억나는 줄 알았더니.”
어제라면 기억이… 나긴 했다.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고, 그 후엔 바다를 보러 갔다. 숙소에 들어온 후론 가물가물했으나 짧게나마 남은 기억에서 그의 얼굴이 크게 보이는 걸로 봐서 잠든 사람의 얼굴에 대고 뽀뽀나 했겠지 싶었는데.
“뭐 했어요.”
“응?”
“어젯밤에 뭐 했냐고. 기억 안 나니까 말해줘요.”
의뭉스럽게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주하얀이 추궁해 물었다. 수상한 태도를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어도 있었던 모양이다. 정작 행위 당사자는 모르는 일이!
나름 단호함을 보이고자 고개를 바로 들고 턱을 아래로 깔아 쏘아보았건만, 역시나 그에겐 잘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까는 기억이 안 나냐 묻더니 정작 무슨 일인지 말해달라니 입을 닫은 신이혁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으로 주하얀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아무 일 없었어. 술 취해서 휘청대는 거 부축해서 데려왔고, 씻기고, 눕혀서 재운 게 다야.”
“거짓말하지 마요. 그럴 리가 없지.”
“사실인데. 안 믿어주니 서운하네.”
물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온전하다곤 못해도 부분 부분 잘라보자면 다 있었던 일이니까.
이쯤 하면 대충 넘어갈 줄 알았는데 이미 신이혁을 겪어봐서인지 주하얀은 호락호락 넘어가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시 더 그렇게 시치미를 떼던 신이혁은 딴엔 무서운 표정이라고 미간을 찡그린 주하얀을 보고 볼 안으로 혀를 굴렸다. 사실대로 말을 해, 말아. 어떤 진실은 모를 때 더 빛을 발하는 법인데. 아직 어려서인지 사회의 진리를 잘 모른다.
“음….”
뭐. 진실을 말하고 화가 난 토끼처럼 날뛰는 주하얀을 보는 것도 재미있긴 할 텐데.
따지고 보면 솔직히 말한다 해서 그가 손해를 볼 건 없었다. 부끄러움이 든다 해도 제 몫은 아닐 것이다.
잠시 고민하는 척 말을 끌다 결국 입을 뗐다. 부디 너무 극렬한 반응에 일이 성가셔지지만 않길 바랄 뿐이다.
* * *
“이것도 먹어.”
“싫어요.”
신이혁이 맛이 괜찮은 찬그릇을 가까이 밀어주었지만 주하얀은 대번에 말을 끊어버리곤 보란 듯이 다른 음식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러며 맞은편으론 시선 한번 주지 않는 것이 꼭 부루퉁해져 온몸으로 삐쳤다는 티를 내는 어린아이 같다. 덕분에 신이혁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주하얀은 호텔에서 나온 후 내내 이런 태도였다. 더 정확하게는 신이혁이 어젯밤의 일을 실토한 이후로.
「 ……―그 정도? 자는 걸 방해할 순 없으니까. 」
최대한 진실에 가까우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말했건만 보람 없이도 주하얀은 당장 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로 놀라버렸다. 순식간에 침대에서 일어나 멀찍이 떨어진 몸에 신이혁의 미간이 불만스레 일그러진다. 재빠르게도 옆 침대로 올라가 이불까지 뒤집어쓴 주하얀과 허하게 비어버린 제 품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턱 아래까지 이불을 덮어 몸을 가린 주하얀은 크게 벌어진 눈과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따졌다.
「 미친 거 아니에요? 이거 신고 가능한 건이에요! 」
「 어제 본인 입으로 만져도 괜찮다고 했잖아. 」
「 기억 안 나요! 아니.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술 취한 사람이 뭘 알아요. 그걸 진짜 행동으로 한 사람이 문제지! 」
「 그래도 도중에 멈췄다만. 」
「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
바락바락 소리를 치며 수시로 이불을 끌어올린다. 기껏 잠옷까지 입혀줬더니 나체라도 된 듯이 몸을 숨기는 꼴에 허, 하고 헛숨을 내쉬었다. 정신이 나가서 그런지 겁도 상실하고. 신이혁의 눈썹이 들썩인다.
「 그러게 왜 기억도 못 할 만큼 술을 마셔. 책임도 못 질 거면서. 」
「 지금 제 탓하는 거예요? 」
「 그리고 분명히 해두는데. 너도 좋아했어. 분명히 그때―……. 」
「 으아! 그런 얘기 하지 마세요! 」
못 들을 걸 들은 것처럼 귀를 막은 주하얀이 이불에 고개를 푹 묻어버린다. 이젠 얼굴도 가려버리네. 눈앞의 머리꼭지가 절망에 젖는 게 보였지만 그는 굳이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사실인 걸 어떡해. 원래 진실이란 아픈 법이다.
이런 얘기를 한다면 분명 절망하겠지만, 오히려 이쪽은 많이 자제하는 중이었다. 지금만 해도 저 콩벌레처럼 구긴 몸을 다시 눕히고 어제 치다 만 손장난의 끝을 보고 싶어 자꾸만 눈이 가느스름하게 떠졌다. 아예 시작을 안 했으면 모르겠지만 개운치 않게 마무리한 행위에 마음도 찝찝하겠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말간 얼굴에 회가 동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급한 대로 아랫도리만 벗겨 엎어두면 큰 이불을 끌어안고 낑낑대는 게 꽤 볼만 할 테다.
점차 음습해지는 상상을 저지할 생각도 없이 팔에 턱을 괴고 있던 신이혁은 뒤늦게야 중앙에 가르마가 콕 박힌 정수리가 떨리는 것을 알아챘다. 단순히 숨을 크게 쉰다기엔 어깨도 크게 들썩인다.
「 흐으, 진짜, 언젠가 이럴 줄, 알았어. 여기도, 킁. 괜히 와서… 내가 미쳤지…. 」
「 …하얀이 우니? 」
「 그, 래도 그렇게. 크흡… 남을 막 함부로. 흑. 난 기억, 도 안, 나는데. 내 잘못이라고, 흐, 흐앙…. 」
어정쩡하게 상체를 세웠던 신이혁은 웅크린 몸 밖으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듣고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다가가 얼굴을 숨긴 이불을 잡아끌었으나 미동도 하지 않았다. 되려 손대지 말라며 버둥거리다 몸까지 기우뚱하는 꼴이 꽤 절박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신이혁은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자존심 따위 고려해줄 남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주하얀의 힘은 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기어코 팔을 걷어내고 양볼을 감싸 고개를 들게 하자, 그 사실마저 약이 오르는지 주하얀은 숨을 쉭쉭 거리며 신이혁을 쏘아보았다.
「 하얀이 울어? 」
「 보면 몰라요?! 」
큰 손에 양볼이 눌린 채로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 말대로긴 했다. 짧은 사이에 꽤 울었는지 얼굴은 눈물로 번들거렸고, 코도 빨갰다. 숙취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배어 나온 땀에 앞머리는 이마에 달라붙어 있다. 분에 찬 눈빛을 해봐야 눈물이 그렁그렁해 위협은커녕 비 맞은 강아지 같다.
「 미안해. 하얀아. 울지 마. 」
「 놔요. 누가 나 만지래! 」
「 말을 잘못했어. 하얀이 탓 아니야. 다 내 탓이야. 」
젖은 얼굴을 보자마자 작은 몸을 답삭 안은 신이혁은 가쁘게 들썩거리는 등을 쓸어주었다. 잠시 버둥거리던 주하얀은 몸을 안은 팔에 힘이 빠질 줄을 모르자 곧 포기했는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넓은 어깨가 금세 젖어든다.
「 나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어떻게… 어떻게. 」
「 그러게. 내가 너무 앞서갔어. 놀랐지. 」
그래. 주하얀은 놀란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 수시로 하는 예쁘다는 말의 의미를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에게 말했던 같이 하고 싶다는 이런저런 일이 무엇인지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과 눈앞에 닥쳐 피부로 느끼는 건 너무도 큰 차이다.
울음 섞인 말로는 어젯밤 기억도 나지 않는 사건의 책임을 회피하는 신이혁을 탓했지만 마음속에선 그보다 더 복잡한 감정이 뒤엉켰다. 자신도 모르게 일이 벌어진 데에 대한 무서움,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비로소 놀라움과 함께 새삼스럽게 찾아온 현실감. 이제야 실감이 든다.
“후우.”
대화 없이 기계적으로 수저를 움직이려니 자연스레 아까 전 생각이 난다. 문득 어깨가 무거워지는 느낌에 한숨을 푹 쉬었다.
앞자리에서 신이혁은 안 그런 척 심각해진 얼굴을 힐끔거렸다. 나름대로 숨긴다고 한 모양이지만 미세하게 들썩이는 입꼬리만 봐도 그가 웃음을 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어른들이란 하나 같이 도움이 안 된다. 자신은 이렇게 고민이 깊은데.
“하얀이 더 떠줄까?”
“…네.”
선뜻 묻는 말에 잠시 눈을 부라리며 버티던 주하얀은 곧 앞접시를 내밀었다. 미소를 지으며 국자를 드는 신이혁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지만 그냥 모른 척해주었다.
근 한 시간 전, 호텔에서 눈물 찍어대는 주하얀을 어르고 달랜 신이혁은 늦은 아침을 먹자며 웬 횟집에 데려갔다. 어제 간 곳과 달리 허름하고 테이블이 많지도 않았다. 속 푸는 데엔 맑은 탕이 제일이라는 그를 아저씨 같다고 마음속으로 나무랐는데, 막상 음식이 나오니 맛이 나쁘지 않았다. 결국 신이혁이 탕에 든 생선 쪼가리를 발라 먹는 사이 주하얀은 벌써 국물을 세 접시나 들이켰다.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자 식욕이 더 돌았다.
“자.”
“감사합니다.”
건네주는 네 번째 접시 역시 받자마자 연거푸 국물을 퍼먹었다. 슬슬 속이 풀리다 못해 물배가 찰 지경이다.
금세 절반가량이 준 접시를 숟가락으로 휘적거리던 주하얀은 문득 눈을 굴려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 사장님.”
“응?”
처음 이야기를 전해 듣고 차올랐던 흥분이 가라앉고 머릿속이 차분해진 후로 내내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물론 그런 것치곤 꽤 뜬금없었지만, 더 늦어 용기가 사라지기 전에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내는 게 가장 적합할 듯했다.
“한 가지만 약속해주세요.”
“그래.”
“… 뭔지 안 들어보세요?”
“뭐든 들어줄게. 얘기해봐.”
물론 지금 할 얘기를 그가 받아들여줬으면 했지만 이렇게 덮어놓고 수용적인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 거창한 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잠시 민망해져 귀를 긁적이던 주하얀은 한참이나 고민스레 입술을 달싹인 후에야 본론을 꺼냈다.
“키스는 괜찮아요.”
“음?”
“제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는 키스 이후의 것은 참아주세요.”
대뜸 꺼낸 첫마디가 키스 얘기라니. 의아한 표정을 짓던 신이혁은 이어진 말을 듣고서야 “아.”하고 짧게 말했다. 열심히 국물을 떠 마시면서도 눈빛이 멍하기에 무슨 생각을 저렇게 골몰하게 하나 했다. 조심스럽게 말을 붙이기에 무슨 얘기인지 들어보자 했는데, 막상 듣고 보니 그리 심각할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저런 부탁을 할 때는 키스까지 싫다고 해야 하지 않나. 그렇게 말하면 상대는 키스는 괜찮다는 뜻으로 이해할 텐데. 이와중에도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을 솔직하게 정하는 게 주하얀다워 귀엽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로서는 일이 번거로워지겠지만 오늘 아침부터 이어진 아이의 반응을 본 후에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뒤로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감사합니다.”
신이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하얀은 크게 안도하여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뺨을 때려도 모자랄 판에 제 부탁을 들어줬다고 감사인사나 하고 있다는 걸 인식도 못하고 있다.
지금 주하얀의 머릿속은 증빙으로 녹음이라도 해두고 싶은데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 보일까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이것도 그에게 배운 방법이었다. 결국 수선 떨기를 포기하고 신이혁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 눈엔 어떤 결연함마저 엿보였다.
주하얀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스킨십 휴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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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