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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56화 (56/61)

56화

손님이 몇 없어 한산한 편의점 구석을 차지한 주하얀은 고민스럽게 진열대를 들여다보았다. 냉기를 뿜는 냉장고 앞에 서 줄지은 음료를 심각하게 살핀 게 벌써 몇 분 째, 주머니에서 지잉 하고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언제 오냐? 자리 맡아둠]

강신우의 메시지다. 고맙다고 답을 보내고 시계를 확인하니 수업까지 십 분밖에 남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결국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500ml 우유 두 종류를 전부 집어 든 주하얀은 가뿐한 발검음으로 카운터에 가 계산을 마쳤다.

[감]

편의점의 위치가 강의동 1층이었기에 지각의 염려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또 발걸음이 빨라진다. 결국 강의실이 있는 4층에 도착했을 때는 달음박질을 친 사람처럼 숨이 달렸다.

편의점 바로 옆에 계단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음엔 돌아가더라도 엘리베이터를 타야지. 어쩐지 계단을 오르는 내내 겁 없는 신입생 말곤 마주친 사람이 없다 했다.

“왔냐?”

“어. 죽겠다.”

강의실에 도착해 강신우를 찾아내자마자 옆자리에 쓰러지듯 앉았다. 든 것 없이 가벼운 가방을 벗어던지고 입고 있던 패딩도 어깨 뒤로 휙 젖혔다. 힘들고, 덥다. 방금 산 우유 중 가까운 손에 들린 것을 건네주고 제 몫은 바로 뜯어 한 모금을 쭉 들이켰다.

“땡큐. 뛰어왔냐?”

“… 후, 계단으로 올라왔어.”

안 그래도 심장이 온몸에서 뛰는 것 같은데 우유를 마시느라 숨을 참았더니 말이 절로 허덕이며 나온다. 급히 음료를 들이켜느라 챙겨 와 놓고 쓰지도 않은 빨대를 이제야 꽂아 한결 가벼워진 우유갑을 책상 귀퉁이로 밀어두었다. 그 옆에서 강신우도 빨대를 쭉 빨아올린다.

1학년 1학기는 주로 짜인 시간표대로 돌아가서 그런지 강의실 군데군데 아는 얼굴이 보였다. 뒷자리엔 새터에서 같은 방이었던 친구가 앉아있어 인사도 했다. 개강 첫날이라 그런지 앳된 면면엔 어색함과 설렘, 걱정, 기대 따위가 교차하여 보였다.

주하얀은 자신의 얼굴도 그럴까 싶어 땀을 닦는 척 볼을 쓸어내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수업을 몇 분 앞두고 강의실로 들어선 교수님은 나이가 지긋했으며 온화한 얼굴을 한 분이셨다. 개강일 1교시임을 모르더라도 어색한 얼굴만 봐도 새내기 첫 수업인 게 티가 난다고 장난을 친 교수님은 이름과 얼굴을 매치해야 한다며 출석을 부를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 숙이길 반복하셨다.

“맨 앞에 앉은 애들 졸라 부담스럽겠다. 그치.”

“그러게.”

“내가 자리 잘 잡았네. 고맙지?”

“어. 다음에도 부탁한다.”

출석을 부르느라 주위가 산만해진 사이를 못 참고 생색을 내겠다고 소곤거리는 강신우에게 은근슬쩍 주먹 쥔 손을 내밀었다. 물론 또 덕을 보려는 술수가 먹히지 않아 되려 팔뚝을 얻어맞았다. 장난스럽게 친 것 가지고 아프다고 엄살을 떠는데 앞자리에서 강의계획서가 넘어왔다.

“뭐냐 이거.”

16주 강의에 중간고사, 기말고사. 달에 한 번꼴로 있는 리포트 제출, 발표. 빡빡한 일정에 주하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게 정말 이 수업의 강의계획서가 맞나 싶어 앞 장을 다시 살폈지만 강좌명이 맞았다.

교수님 인상이 좋아 보여서 방심했다. 아니, 다시 보니 안경을 코끝까지 내려쓴 게 온화하긴 커녕 깐깐하고 빡빡해 보였다.

출력물을 배부하고 자료를 화면에 띄우기 위해 컴퓨터를 조작하시는 교수님을 올려보던 주하얀은 한숨을 푹 쉬었다. 진즉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에 몸을 기댄 강신우처럼 몸을 찌그러트렸다.

“자. 다들 강의계획서 받으셨죠. 못 받으신 분은 손 들어주세요.”

물론 그것도 잠시지, 수업 시간에 집중하던 버릇 때문인지 교수님이 말을 시작하자마자 자세를 바로 잡았다.

오리엔테이션 주간인만큼 수업은 강좌 소개와 강의계획서 소개로 이루어졌다. 아까 전 충격을 먹은 과제 부분을 설명해주실 때는 곳곳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모두 같은 마음인 모양이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다르다더니, 이런 게 다른 점이라면 딱히 좋은 것도 아니잖아. 괜히 심술이 나 리포트 제출 밑에 밑줄을 몇 겹이나 쳤다.

“첫 수업이니까 일찍 마쳐줘야겠죠?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엔 정상 수업합니다.”

“감사합니다.”

전자교탁을 정리하는 교수님에게 인사한 학생들이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난다. 가방을 들고 온 보람도 없이 달랑 종이 두 장을 든 주하얀도 걸치고 있던 패딩을 바로 입으며 일어났다.

수업을 시작한 지 겨우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끝이 났다. 이게 바로 대학생의 삶인가. 이건 나쁘지 않은데? 불과 한 시간 전 구시렁대던 투정을 호떡 뒤집듯 바꿔버린다. 옆자리의 강신우도 같은 마음인지 수업 내내 죽상이던 표정이 살아나 있었다.

“근데 이제 뭐하냐.”

“몰라. 세 시간이나 남았어.”

12시에 끝나는 수업이 10시도 되지 않아 마치자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떠버렸다. 점심을 먹으러 가기도 이른 시간에 강의실을 나와 복도를 방황하던 둘은 결국 고민 끝에 과방을 찾았다. 오티 때 위치를 설명받긴 했으나 찾아가는 건 처음이다. 조심스럽게 학과가 쓰인 팻말을 찾았는데 다행히도 좁은 과방 안엔 같은 수업을 들었던 새내기들이 시간을 죽이기 위해 모여있었다.

친구 만들기가 학교 생활의 제일 과제인 새내기답게 어색하게 눈치를 살피면서도 대화는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아직 서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에 각자의 이야기만 하더라도 시간은 금세 갔다. 그러다 주제가 떨어질 때면 과방 안팎으로 붙어있는 동아리와 학회 홍보지를 살피거나 강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됐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진 대화는 자연스럽게 점심까지 연결되었다. 과방에 있던 인원 중 따로 약속이 있는 몇을 제외한 여섯 명이 떼를 지어 이동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광경이 누가 봐도 ‘나 새내기요.’하는 꼴이었으나 막 입학한 신입생에겐 이것마저 대학생활의 묘미처럼 느껴졌다.

“너 이따 입학 행사 갈 거야?”

“아니. 거길 왜 가.”

“거기서 나눠주는 떡 맛있대.”

“그냥 내가 하나 사줄게.”

주하얀이 당장 사러 갈 기세로 지갑을 찾아 주머니를 뒤적이자 강신우는 말을 말자며 어깨를 옆으로 떠밀었다. 둘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뒤에 붙어 걸어오던 동기가 웃음을 터뜨렸고, 주하얀은 머쓱하게 머리를 매만졌다.

“다들 뭐 먹을 거야?”

“글쎄. 처음이니까 일단 기본 먹어봐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맛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며 이끌고 간 학교 앞 덮밥집에서도 여섯 명의 새내기는 굳이 테이블을 붙여 어깨가 밀착되도록 모여 앉았다. 저들끼리 떠들다 음식을 고르다를 반복하느라 주문하는 데만도 한참의 시간을 소요했다.

“윽, 배부르다.”

다행히도 음식은 정말 맛있었고, 대학가답게 가격도 저렴했다. 삼십 분도 되지 않아 음식을 모두 해치운 후엔 바로 옆에 붙은 카페로 이동했다. 각자 주문하기 바쁜 사이에서 주하얀은 커피가 아닌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각자 커다란 일회용 컵 하나씩을 들고서야 다음 강의실로 향했다.

시간표가 다른 둘을 제외한 네 명은 앞뒤로 자리를 잡고 앉아 떠들다 정작 수업 시간엔 식곤증이 밀려와 꾸벅꾸벅 졸았다.

삐뚤빼뚤. 배부받은 강의시간표에 교수님의 전달 사항을 적는데, 글씨가 엉망이다. 눈이 감길 때마다 음료를 마셨더니 음료엔 어느새 얼음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교재는 교내 문구점에서 구매를 ̄….”

쪼록-

그나마 녹아 바닥에 고인 얼음물을 빨아 마신 주하얀은 피곤으로 깊게 쌍꺼풀이 생긴 눈을 깜빡였다. 옆에 앉은 강신우는 진작에 턱을 괴고 잠에 들었다. 이따 저녁에 있을 약속을 위해 체력을 비축해두겠다는 핑계를 대고 당당히 졸더니 결국 출력물을 보는 척 고개를 푹 숙인 게 수업 시작 십 분 만이었다.

저녁 약속은 나도 같이 나가는데 왜 저 혼자 졸고 있는지. 이러고 나중에 알아둬야 할 점이 있었냐고 물을게 뻔하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이번 수업 역시 정해진 시간을 반도 채우지 않고 끝이 났다. 예상대로 수업 종료를 알리자마자 강신우는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불리 먹고 자서 그런지 뺀질하게 부은 얼굴에 주하얀은 대놓고 비웃음을 날려주었다.

수업이 모두 끝난 6시엔 새터에서 같은 방이었던 조끼리 모임이 있다. 이미 얘기된 일정이었고, 참여 의사를 밝혔으니 주하얀은 필참이었다.

개강 첫날부터 술이라니. 1교시 수업을 위해 8시에 집에서 나왔는데 자정 전엔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도 지금이나 해볼 수 있는 거겠지.

아. 재밌다. 대학생활.

주하얀은 다시 슬금슬금 감기는 눈꺼풀을 세게 비볐다.

* * *

아. 죽겠다. 대학생활.

주하얀은 피로로 건조해진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몽롱한 정신은 뒷골까지 싸했고, 누군가 툭 치기만 해도 쓰러져 잠들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개강하고 며칠 동안은 참 좋았다. 수업이 겹치며 안면을 익힌 동기와 말을 텄고, 과방에서 우연히 마주친 선배에게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넓은 학교의 강의동을 뛰어다니면서도 대학생활을 만끽함에 즐거웠다.

“위하여!”

“위하여!”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 새로운 관계. 수업이 끝난 후 약속은 하루가 멀게 있었다. 약속 시간까지 시간을 때우려 도서관에 가기도 하루 이틀이지, 카페에서 멍을 때리거나 남자 휴게실에 가 낮잠을 자면 금세 저녁이 되었다. 학교 앞 저렴한 식당에서 배를 채운 후엔 자연스럽게 술집으로 이동했다. 애초에 만나길 술집에서 하기도 했다.

연초의 기운으로 대학 가는 어디든 북적거렸고, 그 안에 당연히 주하얀도 있었다.

“주하얀? 이름이 주하얀이야? 이름 예쁘네!”

“신입생 중에 잘생긴 애 있다더니. 진짜 잘 생겼다.”

“여자 친구는 있어? 당연히 있으려나.”

간혹 술자리에선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에 진땀을 뺐다. 그럼 선배들은 바짝 얼어붙은 게 재밌는지 가둬두고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뭐라고 대답해도 이상한 상황이라 탈출구로 술을 마시다 보니 그런 날이면 더 빨리, 많이 취해버렸다.

아무튼, 그런 패턴으로 이주를 꼬박 살았더니 체력이 축나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특히 이번 주는 과 내 학회의 설명회를 돌았는데 모르는 선배와의 술자리가 많았던 탓인지 정신적 피로감이 만만찮았다. 오죽했으면 사람 좋아하는 걸로 으뜸인 강신우마저 힘들다면서 희망하던 학회의 설명회 참석을 취소했을까.

“야. 정신 차려.”

주하얀은 전날 술자리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자신의 앞에 앉아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는 강신우를 보며 제 몫의 마시다 만 숙취해소제를 비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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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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