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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빈 병을 어디다 버릴지 몰라 두리번거리던 주하얀은 드르륵, 플라스틱 테이블을 울리는 소리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늘도 약속?]
신이혁이었다.
[아니요. 오늘은 일찍 가요]
[속은 어때.]
괜찮ㅇ…
문자를 입력하던 주하얀은 문득 손가락을 멈추더니 입력한 글자를 지우고 카메라를 켰다. 뚜껑 딴 숙취해소제를 든 손을 찍어 전송하면 메시지 옆에 뜬 숫자가 바로 사라졌다. 잠시 답장을 기다렸지만 응답이 없다.
“….”
혹시 화났나. 그냥 괜찮다고 할걸. 그냥 바쁜 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편할걸, 한 발 늦게 제 발이 저려와 답이 돌아오지 않는 메시지 창을 노려보았다.
「하얀이 볼이 빨갛다.」
신이혁은 개강 첫날부터 술을 마시느라 취기 오른 얼굴로 귀가한 주하얀의 얼굴을 한참이고 주물럭거렸다. 볼이며 입술에 닿는 대로 입을 맞추다 버둥거리는 반응에 낮게 웃었다. 처음 맛보는 대학생활이 어떠냐 묻고, 집에서 학교를 오가기 편한 지도 물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질 것 같으면 자신에게 전화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주하얀은 그의 말에 반쯤 풀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그랬던 반응에 못마땅함이 끼어든 건 꼬박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그 일주일이 어땠냐 하면. 자정이 넘은 시간에 막차를 타고 겨우 집에 들어와 쪽잠 자기를 5일 중 3일의 빈도로 했다. 왜 1학년 전공수업은 다 1교시인지 지하철에선 꾸벅꾸벅 조느라 학교에 오면 뒷목이 다 뻐근할 정도였다. 연락이 안 되는 건 다반사에 멀쩡한 얼굴을 보기 힘든 건 일상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그게 새내기의 대학교 즐기는 법인걸! 입학하고 처음 한 주동안의 주하얀은 자의든 타의든 풀어진 망아지가 따로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돌아온 주말. 밀린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토요일을 내리 자는 데 쓴 주하얀은 일요일에야 그나마 정신이 돌아와 어슬렁거리며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소파에 앉은 신이혁을 발견했다.
「오랜만이네. 하얀이.」
서재를 두고 거실 테이블에 서류를 늘어놓고 있던 신이혁은 주하얀의 등장에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내려놓고 상체를 세웠다. 같은 집에 사는 사람에게 들을 인사말은 아니었기에 일순 머쓱해져 옷 끝을 매만졌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가자 꼼지락대는 팔을 잡아끌었다. 피곤할 텐데 더 자라며 자신을 무릎 위로 끌어내릴 때 주하얀은 평소와 같이 유난을 떤다고 쉽게 생각했다. 그가 불편한 심기를 돌려 표현했다고는 쉬이 생각지도 못했다. 이게 다 술에 절어 머리가 둔해진 탓이다.
[오늘 일정은?]
그 후로 신이혁은 수업이 끝날 즈음 메시지를 보냈다. 하교 후 곧장 귀가할 계획임을 얘기하면 자신도 일찍 퇴근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술 약속이 있다는 말엔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거나, 늦으면 연락하라는 답이 왔다. 핀잔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다정한 내용이었음에도 그때마다 괜스레 겸연쩍어져 죄송하다는 답장을 보냈다.
“아씨.”
주하얀은 숙취로 종이 울리듯 댕댕거리는 머리를 팔에 괴며 잠잠한 핸드폰을 내려보았다. 부어라 마셔라 한 거 티 내나. 굳이 숙취해소제를 왜 찍어 보냈지 싶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술자리 참석 자체에 유감을 표하진 않았다. 다만, 술자리에서 파생되는 부수적인 것들을 염려했다. 늦은 귀가로 인해 함께 보낼 시간이 부족해져 생기는 소홀함, 혹여 발생할 수 있는 타인과의 불미스러운 일들. 건강 문제도 그러했다.
꼬박 나흘 전의 일이다. 그날따라 술이 과해 네 발로 기어 들어왔는데 결국 밤새 끙끙 앓다 토하기를 반복했다. 조용한 집을 울리는 우당탕 소리에 나와본 신이혁은 변기를 끌어안고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를 사과를 해대는 주하얀을 보며 기가 차 코웃음을 쳤다.
덕분에 그날은 밤새 간호 아닌 간호를 받아야 했다. 정신없이 눈이 핑핑 도는 와중에도 등을 두드리던 매운 손길은 당장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정신에 박혔다. 많이 힘들겠다고 달래던 목소리가 부드러웠던 걸로 봐선 나름 힘 조절을 한 게 그 정도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예쁘네.]
[일찍 들어갈게.]
새삼스레 등이 따가운 느낌에 어깨를 주무르던 주하얀은 이제야 돌아온 답장을 얼른 확인했다. 다행이다. 화가 나진 않았구나. 예쁘다는 말은 조금 뜬금없어 자신이 보냈던 사진을 다시 켜보았다. 그냥 일반적인 숙취해소제 사진인데.
아리송하게 핸드폰을 내려놓곤 앞자리에서 죽어가는 취객의 팔을 툭 쳤다.
“야. 이제 가자.”
어차피 수업이 끝난 후 찬바람이나 쐬자며 앉아있던 참이었다. 수업 내내 맞은 히터 바람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신선한 공기를 만끽한다고 굳이 교내 편의점 파라솔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물론 신선한 공기보다는 지나가는 차의 매연을 더 많이 마신 것 같지만.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겨울 공기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고 무엇보다도 얼른 집에 가서 눕고 싶었다. 눕듯이 테이블에 늘어진 강신우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학교를 빠져나왔다.
눈 한번 딱 감았다 뜨면 집이었으면 좋겠다. 만약 누가 자신의 소원을 이뤄준다면 로또 다음으로 순간이동 초능력을 빌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결국 초자연적인 힘이 아닌 제 발로 걸어 집에 도착한 주하얀은 옷을 벗을 겨를도 없이 소파에 쓰러져 버렸다. 수업을 들을 때는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숙취로 인한 두통이 아침부터 가시지 않았다.
“으어.”
매고 있던 가방을 툭 떨어트리고 다이빙하듯 달려들면 출렁, 가볍게 몸이 떠오른다. 소파에 얼굴을 거칠게 비볐다. 우상동의 집에도 소파가 있었는데. 큰 사이즈의 가죽 소파는 누우면 침대처럼 편했고 지금의 소파는 스웨이드 덮개가 씌워져 누워서 몸을 비벼대기 딱이었다.
“피곤해애….”
부드러운 천을 결대로 쓸어내리며 주하얀은 편한 자세를 찾아 몸을 뒤척였다. 뿌옇게 흐려져 갤 줄 모르는 머리가 기다린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는다. 자야지, 라는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삽시에 잠에 빠져들었다.
“으음….”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목 아래로 불쑥 치고 들어온 팔에 눈을 떴다. 답삭 어깨를 안아 일으켜 세우는 힘에 따라 등받이에 몸을 축 늘어뜨린 주하얀은 풀 바른 듯 쩍 달라붙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로 가까이 얼굴이 비친다.
“… 사장님?”
“응.”
짧게 대답한 신이혁이 가까이 다가오나 싶었다. 곧 몸이 달랑 들어 올려졌다. 엉덩이를 받쳐 아이 안듯이 늘어진 몸을 안아 들곤 갑작스러운 부유감에 버둥이는 몸을 추켜 올린다.
“더 자.”
“저 무거워요.”
“그러게. 좀 힘드네.”
잠시 뒤척이나 싶던 주하얀은 수마를 견디지 못했는지 목 옆으로 얼굴을 묻었다. 드러난 살에 눈을 묻자 따듯한 체온이 전해진다. 단 숨을 내쉬며 어깨에 팔을 둘러 안았다.
진지한 말투로 하는 농담을 듣고 주하얀은 작게 숨으로 웃었다. 떨어트리면 안 된다는 말에는 노력해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역시 말끝이 가벼운 게 반은 농담조였다.
숙인 머리 위로 입술이 내려앉는다.
“으음.”
곧 몸이 뒤로 기운다 싶더니 푹신한 곳에 눕혀졌다. 주위를 더듬던 주하얀이 작게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에 보았던 풍경이다. 지금으로부터 나흘 전에. 어쩐지 웃음이 나 괜히 핀잔을 주었다.
“뭐예요.”
“더 자.”
“그냥 제 방 가서 잘게요.”
“내 방 침대가 더 푹신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순 억지라고 꼬투리를 잡을까 잠시 고민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그의 방 침대가 정말 편하기도 했거니와, 이제 와 제 발로 방으로 돌아가기엔 잠이 깨버릴 것 같았다.
“안아줄까?”
“아니요.”
“팔베개는.”
“진짜 소름 돋게….”
불퉁한 말투로 정말 싫어하는 마음이 전달된 건지 상대는 낮게 웃을 뿐 재차 묻지 않았다. 대신 미간 아래 콧대 위에 입을 맞춘다. 떨어지라고 말할 시간도 주지 않고 멀어지는 기척에 입술만 움찔거렸다.
“속은 어때.”
“괜찮아요.”
“어제 하얀이 집에 기어서 들어왔잖아.”
“저 잠 좀 잘게요.”
기껏 방까지 업어와 놓고 도통 잘 여유를 안 준다. 안부를 묻든, 놀리든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후에 했으면 좋겠다.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찡그리자 그는 시치미를 떼고 입으로만 웃었다. 잠 기운 때문인지 얼굴을 구기는 것도 힘들다. 금세 표정을 풀고 편한 자세를 찾아 몸을 뒤척였다.
바다여행 후 곧장 집을 옮긴 지 3주가 조금 안 되었는데 이 침대에 누운 것만 벌써 두 번째다. 이런 것에 익숙해져 좋을 게 없는데. 푹신한 베개에 볼을 비비다 실눈처럼 눈을 떴다.
“….”
신이혁은 마주 본 자세로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이렇게 자세히 얼굴을 들여다본 게 언제였더라.
주하얀이 대학생활을 하느라 바빴다면 그는 회사에 매여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술자리가 늦게까지 이어져 자정이 다 되어 집에 도착할 때면 종종 신이혁은 정장도 갈아입지 못한 채 주하얀을 맞아주었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한참이고 부름을 무시했던 대가로 한동안 부려먹힐 예정이라고 했는데 그게 늦은 퇴근으로 나타난 듯했다. 그 와중에 자신까지 신경 쓰느라 그야말로 피로가 만만찮을 것이다.
“자요?”
속삭인다는 게 너무 작게 말해버렸다. 이불 부스럭거리는 소리보다도 작게 울린 목소리에 다시 말을 반복하기도 멋쩍어 입을 닫았다. 자신에게도 겨우 들리는 크기였으니 알아챌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이혁은 주하얀의 주의를 놓친 적이 없다. 감은 눈이 천천히 뜨이고 시선이 마주친다. 잠 기운에 젖었다기에는 뚜렷했다.
“제가 깨운 거예요?”
“아니. 잠이 안 와?”
“누구 때문에요.”
나름 핀잔을 놓은 것인데 정작 그 ‘누구’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내일 일정은. 바로 집?”
“네. 더 만날 사람도 없어요.”
“다행이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의문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무시하고 아래로 내려간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준다. 애매하게 졸다 깨다를 반복했더니 더워 잠시 치워둔 건데. 주하얀은 목과 어깨 사이에 이불을 끼워 꼭 덮고 신이혁을 바라보았다. 집요한 시선에 그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뜸을 들였던 거에 비해 별 것 아닌 이야기다.
“내일 집에 김 팀장 올 거야.”
“김 팀장님이요? 왜요?”
최근에 봤던 김 팀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날은 일주일에 한 번밖에 없는 오전 공강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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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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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