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어 마이 세큐리티-59화 (59/61)

59화

“허….”

하지만 큰소리친 게 민망하도록 짐 정리를 마쳤을 때는 세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내내 움직인 몸이 더웠으며, 옷 먼지로 코가 간지러웠다. 텅 비운 박스를 펴 옷장 문 앞에 세워두고 찌뿌둥한 허리를 두드리던 주하얀은 밖을 내다보았다. 언제 해가 졌는지 하늘이 제법 어둑하다.

일단 먼지가 빠지도록 창문을 연 후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약속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학교에 다녀와 곧장 옷 사이에 파묻혀 있느라 주하얀의 꼴은 중노동 하다 온 사람이 따로 없었다.

“와. 심하네.”

방에 딸린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말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어보다 포기하고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해바라기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고 서 있자 욕실은 금세 수증기로 가득 찼다.

피곤한 몸을 위해 아로마 향이 나는 바디워시를 택했다. 신이혁이 사준 것이니 아마 비싼 제품이겠지. 이전의 생활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호사다. 주하얀은 공기 중에 섞인 옅은 풀향을 한껏 들이쉬었다. 가끔 지금의 여유로운 생활이 보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정상적이지 못한 어려운 시절을 버틴 대가로 주어진 것들 말이다.

“무슨 게임도 아니고.”

꼭 어려운 스테이지를 깨고 얻은 보상처럼 치부해버렸네. 따뜻한 물을 맞고 있으면 유난히 마음이 말랑해진다. 방금도 속으로 한 제 생각에 꼬투리를 달고 저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순수한 진심이긴 했다. 그래서 더 소중하고 손에 꽉 움켜쥐고 놓치고 싶지 않다. 이 평안에 마음을 두고 싶다. 자신에게 이런 존재가, 대상이 생길 줄은 몰랐다.

“후우.”

한참만에 샤워를 마친 주하얀은 욕실 안 서랍장에서 샤워가운을 꺼내 걸쳤다. 당연히 색깔별로 선물 받은 것인데 처음엔 몸에 닿는 느낌이 묘해 불편하더니 이젠 습관이 됐는지 없으면 불편했다.

적당히 피곤할 정도로 몸을 움직인 후 샤워를 해서인지 몸이 이완되어 습하게 달라붙는 수증기마저도 촉촉하게 느껴진다. 조금은 노곤해져 수건으로 머리를 살살 털며 욕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다 제 방 침대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고 주하얀은 주춤 멈춰 섰다.

“오셨어요?”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사람이 있을 거라 예상치 못한 터라 놀란 심장을 짚으며 물었다.

침대엔 아직 외출복도 갈아입지 않은 신이혁이 앉아있었다. 등을 보이고 앉아있다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씻었어?”

“네.”

“그래.”

당연한 물음을 해놓고 대답을 듣더니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이 묘하게 힘이 없다. 평소와 다른 태도에 주하얀은 의아하게 갸웃했다. 취하셨나? 그는 웬만하면 취하는 일이 없다.

“이리 와.”

뻗어오는 손끝이 어쩐지 나른해 보인다.

젖은 수건을 옆에 내려둔 주하얀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술냄새가 짙게 난다.

침대를 돌아 드디어 손이 닿을 거리가 되었을 때 신이혁은 단숨에 주하얀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앉은 사람이 서 있는 사람의 허리를 안은 것이라 모양새는 되려 안긴 듯해 보였다.

“괜찮아요?”

“뭐가.”

“술 많이 드신 거 같아서요.”

부드러운 수건 재질의 샤워가운에 얼굴을 파묻더니 눈을 들어 올려본다. 표정만 본다면 술 마신 줄도 모르겠다. 끝이 조금 붉어진 귀나 평소보다 가늘게 뜬 눈만이 술을 마셨음을 보여주었다.

소주만 마시면 얼굴이 불콰하던 아빠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티 나나. 미안하네.”

“아니, 제가 문제가 아니라….”

“노인네가 나이 든 줄도 모르고 술을 먹어서. 장단 맞춰주느라 좀 마셨어.”

푸욱 숨을 내쉰 신이혁은 눈을 감았다. 주하얀은 그의 얼굴에 손을 올려보았다. 볼이 손바닥에 뜨끈하게 닿는다. 그대로 귀 앞이나 턱도 매만지며 열기를 재는데 별안간 몸을 비틀어 피하더니 가운에 얼굴을 묻어 마구잡이로 비벼온다.

“성격 더러운지는 알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아, 저, 잠깐.”

“보통 나이가 들면 좀 누그러진다는데 이건 뭐.”

영 마뜩잖은지 혀를 찬 신이혁이 품으로 파고드는 동안 주하얀은 다급히 어깨를 붙잡았다. 원래 두꺼운 끈 하나로 묶는 게 전부인 가운이다. 격한 움직임에 따라 밀린 천에 벌써 가슴팍이 훤했다. 얼른 앞섶을 여며 잡긴 했지만 민망함이 올라왔다.

“비위 맞춰주면서 마셨더니 더 취한 기분이야.”

“그래도 아빠인데…. 너무 그러지 마세요.”

내내 불퉁하게 굴기에, 또 그 분풀이를 자신에게 하기에 꼬집어 말했다. 그가 노인네라고 부르며 안 좋게 말할 대상은 한 명밖에 없었다. 주기적으로 연락도 하고, 뵈러 가는 걸 보면 정말로 사이가 나쁜 건 아닌 듯한데 이따금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달갑잖은 티를 냈다. 솔직히 주하얀은 그런 모습이 말 안 듣는 아들 같아 조금 귀엽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얀이 지금 나 혼낸 거야?”

말해놓고 보니 어딘지 가르치는 느낌이라 서둘러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그의 귀에 들어간 후였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얼굴엔 웃음이 떠있었다. 짐짓 들뜬 척 꾸며낸 말투를 한다.

“그래. 하얀이도 나중에 아빠 돌아오면 친하게 잘 지내. 그래도 아빠잖아.”

이어진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와 자신의 경우는 다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을 받아치기도 내키지 않아 머쓱하게 입을 닫았다. 그냥 뱉어본 말에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다.

다행히 그도 주하얀의 말을 진지하게 들은 건 아닌지 기분 나쁜 눈치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예 심술이 나지 않은 건 아닌지 고개를 숙여 드러난 살에 입을 맞췄다. 주하얀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심산인 듯했다. 간신히 단정한 하게 수습했던 가운이 헐겁게 풀어졌다.

“자, 잠깐…!”

“왜.”

자꾸만 찹찹한 살과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목 아래, 가슴 위쪽으로 규칙 없이 입술이 닿는다. 놀란 주하얀이 다급히 입술 앞에 손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잠시 시선을 올리나 싶던 신이혁은 곧 그 손바닥에도 입을 묻었다. 손바닥에 숨이 간지럽게 닿는다.

“왜 막아.”

“무, 뭐하시는 거예요.”

“뽀뽀.”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고사리처럼 오므라드는 손가락등과 손목에도 입술이 내려앉는다. 느슨히 허리를 안았던 팔을 내려 허벅지 뒤를 짚곤 제 쪽으로 끌었다. 힘에 밀려 더 가까이 한걸음 딸려갔다. 벌려 앉은 다리 사이로 주하얀의 오른 다리가 들어온다.

“뽀뽀는 해도 된다며.”

짓궂어 보이는 얼굴이 발갛게 익은 피부색을 보고 웃는다. 고개를 정면으로 향하기만 해도 닿을 만큼 거리가 좁다. 신이혁은 쇄골 위에 가볍게 입 맞췄다.

“어디든 키스만 하면 괜찮은 거 아니야?”

커다란 손이 다가와 관자놀이와 귀 뒤를 덮는다. 주하얀은 그가 이끄는 대로 상체를 숙였다. 피부에 닿은 숨이 부서질 만큼 얼굴이 가깝다. 먼저 닿은 것은 입술이었다.

“음….”

입술이 깊이 눌리고 코끝이 볼에 비벼진다. 신이혁은 손을 올려 뒷목을 잡아챘다. 입술이 닿은 좁은 틈으로 숨을 마신 주하얀이 어깨를 움츠리며 입을 오물거리자 양쪽 뺨을 붙잡았다.

몸을 옭아매듯 끌어안은 탓에 반쯤 허벅지에 걸터앉아 침대에 무릎을 대고 있던 주하얀은 갑작스럽게 당겨져, 정신을 차렸을 때는 침대 위에 쓰러진 후였다.

젖은 입술에 키스한 신이혁은 코끝과 턱에도 입술을 묻었다. 볼과 눈가, 귓불. 목에는 더 오래 입 맞췄다.

“잠시만요.”

덕분에 침을 삼키는 일도 어려워져 겨우 숨을 옅게 쉬고 있으면, 어깨에 걸친 가운으로 손끝이 들어왔다. 얼른 그의 손등 위로 손을 올렸으나 그는 거리끼지 않았다. 헐겁게 묶인 가운 한쪽이 쉽게 열려 어깨를 드러낸다.

마른 몸에 비해 넓은 어깨의 둥근 끝을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주하얀이 불안스레 고개를 틀면 입술 옆에 입 맞추던 신이혁이 이번엔 귓불을 물었다.

어깨를 어루만지던 손이 차츰 더 넓게 움직인다. 침대에 닿지 않은 등과 목, 턱선을 훑는다. 귓바퀴에 뽀뽀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손은 어느새 다시 목을 타고 내려왔다. 엄지와 검지 사이를 넓게 벌려 목을 한 손으로 다 덮었다. 힘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어쩐지 압박감이 든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쫙 펼친 손이 가슴 위까지 닿았을 때,

“그만!”

더 참지 못하고 다급하게 어깨를 짚었다. 거친 행동에 순간 주춤한 손이 몸에서 떨어진다. 당황에 젖은 주하얀의 눈과 신이혁의 눈이 마주친다.

“….”

그는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주하얀도 뭐라 입을 열지 않았다. 길어지는 침묵. 결국 먼저 연 건 신이혁이었다.

“여기까지?”

불친절한 물음이다. 하지만 주하얀은 어쩐지 초조해져 대답했다.

“…네.”

“그래.”

방금까지의 집요함과 달리 그는 선선히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서로 닿도록 낮추었던 상체를 세워 어깨 양옆으로 손을 짚는다. 시선이 오래 머문다. 주하얀의 얼굴과 드러난 몸, 그 위에 걸쳐진 가운까지 훑어내린다.

재단 위에 팽개쳐진 제물이 된 것 같다. 한참 제 아래 목을 내놓은 아이를 관음하던 그는 손을 들어 주하얀의 입술을 매만졌다. 입술선을 따라가다 가만가만 만지작대던 손은 이내 거두어진다.

“이제 씻을 건데, 같이 씻을래?”

입술에서 손을 떼곤 미련을 털어버리듯 침대에서 몸을 물리며 물었다. 아직 머리에 물기가 다 마르지도 않은 사람에게 하기엔 맞지 않은 질문이다. 그도 정말 함께 욕실에 들어가 주길 바란 건 아니었는지 고개를 젓는 주하얀에게 거듭 묻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물러난 거리만큼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은 주하얀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젖은 머리가 손가락에 척척하게 달라붙는다.

“잘 자.”

그대로 방을 나서는 모습을 주하얀은 눈으로 따라갔다. 안녕히 주무세요. 작게 한 대답을 그가 들었을지는 모르겠다. 조금은 멍하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 제대로 여민 가운 위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무의식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뜨겁게 살에 닿던 감촉이 생생하다.

그 후로도 한참이고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다시 열리는 일은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9)============================================================

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