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서울의 아침은 매일이 전쟁이다. 어디서 쏟아져 나왔는지 거리를 채운 사람들이 바쁘게 저마다의 목적지로 향한다. 뛰듯이 걷는 행인, 가다 서다를 반복하느라 사나운 엔진 소리를 내는 차.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은 땅바닥에 달라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오전 거리의 역동은 고층 건물까지 닿지 못했기에 수선한 활기로부터 유리된 집은 평온함마저 띠었다.
그리고 거실 창으로 드는 햇빛마저 버석하게 고요한 가운데 주하얀은 조심히 발을 내디뎠다. 신기할 만큼 큰 집에 간간이 양말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만 울린다. 곧 채비를 마쳤는지 현관으로 나선 걸음이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집안을 돌아보고 현관문을 열었다.
철컹-
외부의 북적임이 열린 문틈으로 밀려들다 사그라든다. 조심히 닫은 문고리를 놓은 주하얀은 참지도 않은 숨이 달리는 기분에 훅, 크게 숨 고르기를 했다.
“누가 보면 도둑인 줄 알겠네.”
사람이 활동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생활 소음마저 줄이겠다고 살금살금 군 게 머쓱해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이제와 어색하게 군다는 게 새삼스러웠지만 지금 자신의 행태만 놓고 보면 도둑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후우.”
자신은 아닌 체하겠지만 주하얀은 며칠 전 밤 신이혁이 술에 취해 방에 찾아온 이후로 낯을 가리는 중이었다. 더 정확히는 분위기에 휩쓸려 그의 시도에 어물쩡 넘어갈 뻔한 이후로.
물론 그 낯을 가린다는 행동들이 너무도 소소해 과연 그가 알아차렸을지는 미지수였다.
지금만 해도 잠에서 깬 순간부터 은밀하게 움직여 한 일이 고작 늦게 출근하는 사람을 피해 아침 일찍 나오기이니 말이다.
이럴 때면 어쩔 수 없이 덜 자란 자신이 실감이 나곤 했다.
“주하얀. 일찍 왔네. 뭐 하고 있었어?”
“왔냐? 그냥 핸드폰.”
일찍 출발한 만큼 일찍 도착한 강의실에서 홀로 시간을 때우던 주하얀은 어깨를 툭 치는 손에 만지작거리던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스마트폰으로 바꾼 후부턴 잠시 짬만 나면 절로 손이 핸드폰으로 갔다. 그나마 집에선 자제하는 편인데.
책상 앞을 빙 돌아 제 옆에 앉는 강신우를 돌아보았다. 날이 풀리며 옷이 가벼워져 카디건 위에 청자켓을 걸쳤다.
“오늘 무슨 약속 있냐? 예쁘게 입었네.”
“이따 저녁에 정외과랑 미팅 있잖아.”
“아.”
“놓칠 수 없는 기회라고. 벚꽃 피기 전에 시린 옆구리 좀 어떻게 해야지.”
기다렸다는 듯 대답에 쉼이 없다. 투지가 불타오르는 마냥 주먹을 쥐어 내미는 걸 보고 코웃음을 쳤다. 책상을 넘어 다가온 주먹도 저 멀리로 밀어버렸다.
“뭘 그렇게까지. 그리고 지금 사귀면 어차피 벚꽃 질 때 깨진다던데.”
심드렁하게 말하며 팔에 턱을 괴고 옆을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돌아본 얼굴엔 재 뿌리는 말을 들어 짜증 난 기색이 역력했다.
“가진 자의 오만함이란.”
“뭐얼.”
“그때 깨져도 좋으니까 연애 좀 해봤으면 좋겠다.”
푸념 섞인 말에 웃음이 난다. 정체 모르는 애인이 있는 줄 아는 것과 달리 주하얀은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고백은 꽤 받았었는데. 지금 와서야 당사자들도 기억 못 할 과거 얘기다.
평생의 시간을 자기 돌보는 데 쓰기도 버거웠던 처지로서는 사서 책임을 떠안으려는 생각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할 거 없으면 너도 와.”
“어디에. 거기에?”
“엉. 얼굴마담 좀 해주고 가라.”
좋은 아이디어라도 떠올린 것처럼 하는 말에 주하얀은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얘 지금 내가 애인 있다고 생각하는 애 맞나? 아니면 인성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신우도 진지하게 한 얘기는 아닌지 그럴 줄 알았다며 바로 몸을 물렸다. 그냥 한번 해본 소리야. 싱거운 태도는 진심 같았고, 대화 중 뱉은 무수한 헛소리 중 하나처럼 금세 잊혔다.
그래. 그때까지는 분명히 장난이었다.
“뭐?”
“제발, 주하얀. 부탁 좀 하자.”
주하얀은 자신의 얼굴 앞으로 두 손을 모아 들이미는 놈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뭐라는 거야. 갑자기 불똥이 왜 이리로 튀나 모르겠다.
지루한 전공 수업이 끝난 후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비어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얘기하던 차였다. 둘은 어디서 나타난 건지 불쑥 등 뒤로 다가온 동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큰일 났다고 호들갑을 떨어대는 통에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친 게 이렇게 곤란하게 돌아올 줄 알았다면 주하얀은 남의 사정이고 뭐고 강신우를 버리고 혼자 밥을 먹으러 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 보고 같이 가달라고. 그 미팅에?”
“그래. 오늘 나오기로 했던 놈이 갑자기 술병 났다고 자체 휴강 때려버리는 바람에 자리가 하나 남거든. 부탁 좀 할게.”
“다른 놈 데려다 채우면 되지. 나는 왜.”
“정외과 애들한테 잘생긴 애 데려간다고 신신당부했단 말이야. 아니었으면 나도 아무나 데려갔지.”
그런 거라면 굳이 자신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곰곰이 동기 남자애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생각에 잠겨 멍해진 눈이 의미 없이 정면을 향한다는 게 하필 강신우가 선 방향이었고, 그 빤한 시선을 오해했는지 순간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고 웃던 강신우는 고개를 젓는 동기 놈에 입꼬리를 뚝 떨어트렸다.
“쟨 원래 가기로 했었잖아. 잘생긴 애 한 명이 더 필요하다니까.”
“원래 누가 가기로 했었는데. 그 정도면 애초에 구라 친 거 아니야?”
순식간에 제 미모를 부정당했다 생각한 건지 발끈해서 따졌으나 동기는 주하얀을 바라볼 뿐이다. 그 시선이 점점 부담스러워질 때쯤 보다 못한 강신우가 돕고 나섰다.
“야. 근데 얘 애인 있어.”
“요즘 누가 미팅을 연애하려고 해. 그냥 친구 사귀는 거지.”
동기의 말에 주하얀은 옆을 힐끔거렸다. 기껏 옷까지 차려입고 온 사람 무안해지는 발언이다. 강신우도 머쓱했는지 잠시 겸연쩍은 표정을 짓다가 되려 입장을 바꿔 맞다며 맞장구를 쳤다. 주하얀의 등을 과장되게 두닥이는 게 꼭 민망함을 감추려는 허세 같다.
“정 마음에 걸리면 솔직하게 말하고 허락받으면 되잖아.”
“무슨 미친 소리야.”
한술 더 떠 영 찝찝하면 여자 친구에게 얘기하고 허락을 맡으라는 동기 놈 때문에 할 말이 없다. 되겠냐? 황당하게 받아쳤으나 되려 왜 안되냐는 억지 대답만 들었다.
“아, 알았어! 하면 되잖아!”
졸지에 양옆에 떼쟁이 아이를 매단 꼴이 된 주하얀은 잠시 정신없이 휘둘리다 결국 알겠다고 소리치며 둘러싼 두 녀석을 뿌리쳤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앵앵거리는 통에 귀가 다 멍하다.
[바쁘세요?]
오랜만에 먼저 하는 연락이다. 요 근래 열심히 도망 다녀놓고 뻔뻔하게 굴려니 괜히 손이 자꾸 머뭇거린다. 이러면 오늘 아침에도 일찍 나온 보람이 없잖아. 속으로 한숨을 삭였다.
성화에 못 이겨 메시지를 보내긴 했지만 그냥 늦는다고만 전달할 예정이었다. 술자리가 생겼다고 하면 평소와 같은 모임 자리로 생각하고 별 상관없이 넘기겠지.
하지만 그런 주하얀의 계획은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울리는 핸드폰 진동으로 깨져버렸다.
“여보세요?”
징징 울리는 핸드폰 화면에 뜬 ‘신이혁 사장님’이란 단어를 확인한 주하얀은 얼른 납작한 기계를 귀에 댔다.
-하얀아.
“네. 통화 괜찮으세요?”
-아니어도 괜찮게 해야지. 무슨 일이야. 먼저 연락을 다 하고.
목소리에서 반가움과 웃음이 느껴진다. 다정한 말투에 조금 부끄러워진 주하얀이 친구들에게서 뒷걸음질 쳐 세 걸음 물러났다.
대놓고 주시하는 두 쌍의 눈동자가 따라온다. 동기 놈은 입을 크게 벌려 입모양으로 물었다. 애인? 비록 거짓말일지라도 고개를 끄덕이자 두 녀석은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연애라 해봐야 또래집단에서의 관계가 보편적이기에 연인 간에 존대를 하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혹시 오늘 집에 일찍 들어오세요?”
-오늘? 글쎄. 일정을 봐야겠는데.
무엇을 뒤적이는지 수화기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아…. 말꼬리를 끌며 뒷말을 주저하자 상대는 의아하게 물었다.
-왜.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의문을 담았지만 즐거운 기색이다. 주하얀이 거리를 넓혀 입 앞을 손으로 막고 얘기하자 답답함을 참지 못한 녀석들이 금방이라도 다가올 태세로 움찔거렸다. 입모양으론 계속 ‘약속 있다고 해!’, ‘얼른 물어봐.’ 따위를 소리쳤다.
“아니요. 그게 저는 오늘 저녁 약속이 있어서 그거 말씀드리려고요.”
-아. 그래? 그런 거면 그냥 얘기해도 되는데.
수화기를 넘어온 말에 집중하느라 땅을 쳐다보았다가 눈앞의 친구들을 살피길 반복했다.
미. 팅.
입을 쩍 벌리고 하는 소리는 듣지 않아도 너무 잘 이해가 되었다.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힘들면 전화해.
“네. 그, 그리고요…!”
-응?
귀와 눈 양쪽에 신경을 쓰느라 잠시 정신이 산란해진 주하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무어라 더 덧붙이려던 상대가 말을 멈추고 대꾸한다. 앞으로 손바닥을 뻗어 보여 두 녀석들도 입을 다물게 했다.
“오늘 약속이 그, 미팅… 이거든요.”
-뭐?
“미팅이요. 동기가 하도 같이 가자고 졸라서… 오래는 안 있을 거예요. 잠시 자리만 채우다가 나올 거고….”
요즘은 꼭 연애 안 하고 그냥 친구 사귀는 개념으로 한다고 하던데…. 둘의 사이가 뭐라고 설득을 하고 있는 게 웃기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가 없다. 나름의 변명을 늘어놓다 동기가 했던 말까지 주워섬긴 목소리가 차츰 잦아든다. 신이혁은 여전히 침묵했다.
실제의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체감한 몇 초의 정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 할 만큼 길었다.
-그래. 조심하고.
얼마의 시간 후에 돌아온 대답은 간결했다. 찜찜해한다 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목소리엔 애써 감추어도 새어 나오는 유쾌함이 묻어있었다. 주하얀은 조금 얼떨떨하게 수화기 너머에 귀를 기울였다.
“네.”
-거기서도 마찬가지야. 술 적당히 마셔. 너무 늦지 말고.
“일찍 들어갈게요.”
-가서 괜히 혹 달고 오지 않게 처신 잘하고.
“네. 알겠어요.”
-그래. 착하다. 미안한데 내가 업무가 조금 밀려서.
“아, 네. 이만 끊을게요. 감사합니다.”
-그래. 하얀이 공부 열심히 하고.
그 후로도 몇 마디 인사를 더 주고받은 주하얀은 전화를 끊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 모습을 살피던 강신우가 허락 맡았냐고 물었고, 주하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웃었어? 왜? 예상치 못한 반응에 주하얀은 조금 황당하고 다소 당황스러운 기분이었으나, 잘됐다며 저녁에 있을 미팅 얘기에 빠진 둘에겐 벌써 뒷전이 된 일이다.
어떻게 하면 재밌는 시간을 보낼지 열띤 토론을 하는 둘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주하얀은 주머니 안에서 손에 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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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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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