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어 마이 세큐리티-61화 (61/61)

61화

술자리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처음엔 미팅이라는 단어에 매여 어색하게 굴던 주하얀도 술이 들어가자 제법 대화에 끼어들었다. 생각해보면 여느 약속과 다를 것 없는 자리였다. 새로운 집단에 들어와 매 약속마다 모르는 인물을 만나기 마련인데, 그들이 다른 과 여자들일뿐이다. 동기의 말이 맞았다. 테이블의 분위기는 팽팽한 성적 긴장감보단 새내기의 경험에 대해 늘어놓느라 느슨했다. 주하얀은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옆에 앉은 강신우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인 주하얀은 테이블을 짚고 일어났다.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갑자기 시야가 높아지자 머리가 어질해 상체가 휘청인다.

가게의 점원에게 화장실의 위치를 묻고 가게를 빠져나오는 동안 온 신경을 발끝에 두었다. 술에 취해 의자에 늘어지는 건 괜찮아도 비틀대며 걷는 건 어쩐지 부끄럽다.

“으으…. 푸.”

술기운에 눌린 소리가 의미 없이 튀어나온다. 주하얀은 눈앞의 화장실 타일이 일렁이는 정도로 자신이 얼마나 취했는지 가늠해보았다. 아직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진즉 뜨끈해진 볼에 손등을 대 식히며 머리를 털었다. 숨에 섞인 술 냄새에 더 취하는 기분이다.

“푸흐, 푸우.”

찬물에 손을 씻으며 계속 입을 웅얼거렸다. 찬 바람을 쐬니 정신이 좀 말똥해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한참 시간을 죽이던 주하얀은 벌컥 열리는 화장실 문에 고개를 들었다.

“주하얀.”

“어?”

“왜 이렇게 안 나와. 변기에 빠진 줄 알았네.”

“그런 거 아니야….”

“너 아까부터 계속 전화 와. 급한 일인 것 같아서.”

화장실 문을 잡고 서 상태를 살피듯 전신을 죽 훑은 강신우가 핸드폰을 앞으로 내밀었다. 벌써 술이 오른 자신과 달리 멀쩡한 모습이다. 이럴 때 보면 꼭 술을 잘 먹는 게 자랑 같다.

“누군데?”

“몰라. 사장님이라고 뜨는데. 너 알바하냐?”

“아.”

저장명을 들은 주하얀은 당장에 다가가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그 사이에도 전화는 계속 울렸다. 옆에 있던 사람이 핸드폰을 들고 나올 정도면 꽤 오래 전화를 한 모양인데. 전화가 끊어지기 전에 서둘러 통화 아이콘을 화면 중앙으로 끌었다.

“여보세, 엇!”

핸드폰을 귀에 대고 화장실을 나서는 데 급급한 나머지 컨테이너 화장실의 턱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발에 판판한 것이 걸렸다 싶었을 때는 이미 몸의 균형을 잃은 후였다. 속절없이 앞으로 기우는 몸에 눈을 질끈 감은 주하얀을 강신우가 다급하게 잡아채 끌어당겼다.

“야! 조심해. 취했냐?”

“윽! 깜짝이야. 진짜 넘어지는 줄 알았네.”

“너 몸도 뜨거워. 이제 그만 마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나 좀 일으켜줘. 힘들다.”

“아오― 이 미친놈.”

“고마워.”

술기운인지, 멋쩍음인지 헤헤 웃어 보이는 걸 보고 강신우는 얄밉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웃지 마, 인마.”

등을 팡 치며 호통을 치는데도 헤실거리던 주하얀은 강신우가 손가락 세 개를 접어 전화기 모양을 해 보이자 그제야 잠시 잊었던 핸드폰을 다급하게 귀에 댔다. 여보세요? 물음에도 한동안 수화기 너머는 고요했다.

-하얀이 괜찮니?

“네. 괜찮아요. 문턱을 못 봐서….”

-넘어지진 않았고?

“친구가 잡아줘서 안 넘어졌어요.”

-다행이네.

“네.”

핸드폰으로 넘어오는 목소리에 답하며 어깨를 툭 쳤다. 통화하고 들어갈게. 작게 속삭이는 말을 알아들은 강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본인도 화장실에 들렀다 돌아갈 거라고 답했다.

발에 채는 돌멩이를 걷어차며 화장실 앞 자갈밭을 서성였다.

-술은 얼마나 마셨어.

“그냥 기분 좋을 정도로? 이제 그만 마시려고요. 더 마시면 과해질 것 같아요.”

-그래. 재밌게 놀고 있나 본데.

“동기들이랑 떠드는 거라 그렇죠, 뭐.”

가게 뒤 주차장 겸 공터를 빙빙 돌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쿡 찔러 넣었다. 초봄 밤공기는 제법 쌀쌀해 절로 술기운을 날려주었다. 숨에 알코올을 뱉어내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훅 내쉬기를 연거푸 했다.

-마침 근처에서 저녁 약속이 있었어. 시간이 맞으면 들어갈 때 픽업해가려는데.

“어어…. 잠시만요.”

신이혁의 말에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낸 주하얀이 가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2차 자리로 넘어온 지 한 시간도 넘었다.

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장소를 옮겨 이미 다들 배도, 술도 부른 상태였다. 마침 막차 시간도 가까워지니 슬슬 자리를 파해도 되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대강의 계산을 마치고 핸드폰을 다시 가까이 가져왔다.

“한 삼십 분 후엔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시간 맞춰 갈게.

“네.”

-위치 나한테 보내 놓고.

“네.”

마지막 말은 끝을 질질 끌며 답했다. 전화를 끊고도 잠시 더 미적거리다 이내 발걸음을 돌려 조명이 어둑한 가게로 향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돌아온 테이블엔 그 사이 술병 두 개가 더 놓여있었다. 다행히 한 병은 뚜껑도 따지 않은 걸 보니 시킨 지 오래되진 않았나 보다.

“야. 뭐 하다 왔냐. 난 너 집에 간 줄 알았어.”

“미안. 통화 좀 하느라.”

“밖에 춥지 않아? 얼른 마셔. 마시면 더워질 거야.”

찬 공기를 휘감고 나타난 주하얀의 앞으로 잔이 놓인다. 장난스럽게 말하며 술잔을 채워주는 오늘 처음 본 얼굴에 손사래를 치던 주하얀은 성화에 못 이겨 결국 한 잔을 더 마셨다.

4 대 4로, 총 8명이 앉은 테이블은 술자리의 시끄러움도 한바탕 지나간 후 소강상태였다. 술이 오를 대로 올라 안주만 주워 먹는 사이에서 주하얀은 수시로 시계를 봤다. 먼저 일어난다고 얘기해야 하는데.

다행히 타이밍은 곧 돌아왔다.

“야. 담배 피우러 가자.”

“어어.”

“잠시만. 나도 같이 가.”

한 명의 말에 같이 가자며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를 일어섰다. 짐을 뒤져 제 것을 챙긴 이들은 담배 타임이라고 노래처럼 중얼거리며 가게 밖으로 나섰다. 붐비던 테이블이 삽시에 휑하니 비었다.

딱 절반이 남은 테이블을 확인한 주하얀은 슬그머니 제 가방을 무릎 위로 끌어왔다. 술이 과했는지 옆에 널브러지듯 누운 동기에게 속삭여 말했다.

“야. 나 이제 집에 가봐야 돼.”

“엉? 뭐라고?”

“집에 간다고.”

“왜! 왜 벌써 가! 아직 열두 시도 안 됐는데.”

“무슨 열두 시야. 좀 있으면 막차시간 다 돼가. 너도 슬슬 정리하고 집에 가라.”

얘기를 들어보니 통학을 한다는 사람도 둘이나 되어 어차피 자리는 곧 파할 예정이었다. 벗어두었던 외투를 주워 입으며 동기의 등을 툭 치자 그때까지도 의자 등받이에서 겨우 고개를 떼어내는 게 다였던 녀석이 쓰러지듯 주하얀의 품으로 파고든다.

“못가! 가지 마! 나만 두고 어디가!”

“아니, 왜 이래. 미쳤냐. 야. 정신 차려.”

당장 반색하며 어깨를 밀어냈으나 도리어 허리를 감아 더 착 달라붙어 온다. 가슴팍에 머리통을 마구잡이로 비비는 꼴이 먹었던 음식이 다 올라올 것 같다.

“너 서울 살지 않아? 그럼 막차 시간 아직 여유 있잖아아. 밖에 있는 애들한테도 인사하고 가야지!”

“나가면서 얘기하고 갈게. 아, 이것 좀 놔봐!”

“그러지 말고 조금 더 있다 가. 막차 급해?”

붙잡으려는 건지 받침대로 쓰려는 건지 허리춤에 매달려 힘을 실어오는 동기를 떼어내기 위해 낑낑대던 주하얀은 제 팔을 잡아오는 사람에 고개를 들었다.

오늘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내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여자애였다. 이름이 안유진이라고 했었지. 모두 동갑이기에 처음부터 말을 놓고 시작해선지 제법 자연스레 많은 얘기를 나눴다. 주하얀만큼 술을 마신 그녀의 볼은 조금 발개져있었다. 술에 취해 스스럼없어진 건지 팔을 붙잡아온다.

“너까지 왜 그러냐 진짜.”

“하하. 내가 뭘. 저렇게 싫어하는데 조금 더 있어주라는 거지.”

몸통과 팔에 사람 하나씩을 매단 주하얀은 곤란한 한숨을 쉬었다. 시간은 벌써 30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러다 신이혁이 먼저 도착하겠다.

“그보다 오늘 진짜 재밌었어. 다음에도 이렇게 또 모여서 술 한잔하자.”

“그래, 나야 좋지. 근데 일단 오늘은 이만….”

“에헤이. 어디 가려고.”

자연스레 말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려던 주하얀은 속셈이 읽혀 주저앉혀졌다. 어깨를 꾹 누르는 힘은 마음만 먹는다면 털어낼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애써 힘으로 대응하진 않았다.

그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수시로 시계를 확인했다. 차라리 나갔던 놈들이 돌아와 매달린 놈들을 떼어내 줬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문을 쳐다보던 주하얀은 마치 그 간절한 마음이 닿기라도 했는지 달랑, 종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끔뻑거렸다.

“…어?”

문이 열리며 소원대로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하지만 원하던 인물은 아니었다. 다수도 아니었으며, 오늘 함께 자리를 한 사람도 아니었다.

“… 사장님?”

문가에 서 대학로 호프집의 싸구려 조명을 받고 있는 사람은 신이혁이었다.

그는 눈으로 가게 안을 빙 둘러보더니 손쉽게 주하얀을 찾아냈다. 단박에 눈이 마주치고, 시선을 틀어 주하얀에게 매달린 사람 하나와 주하얀의 어깨와 팔뚝을 틀어쥔 사람 하나를 살핀 눈이 다시 얼굴로 올라온다.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주하얀이 의아했는지 맞은편에 앉은 안유진이 고개를 돌릴 즈음 신이혁이 다리를 움직였다. 보폭이 넓은 탓에 몇 걸음만에 테이블 앞에 다가와 섰다.

“어… 오셨어요?”

“기다릴까 봐 최대한 빨리 왔어. 상태는 어때.”

긴 의자의 등받이에 손을 올린 남자는 눈으로 짚어보듯 얼굴을 살피다 물었다. 혹여 술이 과했는지 묻는 걸 알아챈 주하얀은 손등으로 제 볼을 문질렀다.

“내내 얘기했더니 좀 괜찮아졌어요.”

양볼을 번갈아 만지작대며 웅얼거렸다. 평소라면 당장 주하얀의 손을 치우고 제 손을 댔을 테지만 주위를 의식했는지 필요 이상의 접촉은 하지 않는다.

신이혁의 눈동자가 잠시 자신을 비껴감을 알아챈 주하얀이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진즉 눈을 감고 있는 동기 놈은 제쳐두고, 안유진은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인사해. 이쪽은 내….”

이 구간에서 주하얀은 흘깃 눈을 굴려 옆에 선 남자를 살폈다.

“내 사촌 형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