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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우는?”
“아까 쪼끄만 애랑 나갔는데?”
쪼끄만 애라면 정현이다, 라고 확신한 한은 다시 몸을 돌려 복도를 돌아봤다.
최근 신우와 정현, 두 사람이 붙어 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같이 독서실에 다니기 시작하더니 최근엔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까지 붙어 다녀 도통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그게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
또다시 뭔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에 인상을 쓰던 한은 저 멀리서 음료수를 하나씩 손에 들고 돌아오는 자그마한 치와와 같은 녀석과 신우를 보곤 표정을 굳혔다. 안 지 얼마나 됐다고 단짝 친구처럼 찰싹 달라붙어 복도를 거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속이 울컥한다.
질풍노도가 또 시작된 모양이다.
“어? 한이네. 볼일 있냐?”
먼저 이쪽을 알아본 정현이 인사 대신 던진 말에 신우 역시 한을 발견하곤 아는 체를 했다. 반갑다는 그 눈빛에 한은 일부러 퉁명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아무것도 아냐. 그냥 지나가다 들른 거야.”
“그래? 그럼 잘 가.”
해사한 얼굴로 마치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내저은 정현은 이내 신우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난 간다. 이따 끝나고 서점 가는 거 잊지 마.”
“응.”
또 둘만 어딜 가는 거냐, 하는 생각에 한이 욱한 듯 인상을 쓰자 신우가 그런 한의 표정에 조금 기가 죽은 얼굴로 눈치를 살핀다.
그 눈빛을 알아챈 한은, 왠지 모르게 자신의 눈치를 보는 신우의 모습에 더 화가 나 일부러 냉랭하게 시선을 돌렸다.
“잘됐네. 나도 마침 오늘 반 애들이랑 어디 가기로 했으니. 둘이 놀아.”
괜히 자존심이 상하고 심술이 나 한이 있지도 않은 약속을 만들어 대꾸하자 정현이 힐끔 한을 바라본다.
“너 오늘 과외 있잖아.”
“……그 전에 갈 거야.”
“뭐, 그러든가.”
알게 뭐냐는 듯 말을 흐린 정현은 신우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그의 반으로 향해 갔다. 그리고 그 직후 한 역시 돌아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순간 신우가 한을 부른다.
“한아, 나한테 볼일 있던 거 아냐?”
그 말에 한이 걸음을 멈추곤 머뭇거렸으나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아니. 그냥 지나가다 들른 거야. 나중에 보자.”
대충 손만 흔들어 인사를 마친 한은 신우의 교실을 지나 옆 반으로 향했다.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면서도 한은 한 번만 더 부르라고, 그럼 못 이기는 척 멈춰 주겠다고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는 달리 신우의 목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반에 들어서며 슬쩍 뒤를 돌아봤지만 벌써 교실에 들어간 듯, 신우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그 태도에 화가 난 것 같다. 아니, 조금 상처받은 기분이었다.
“요즘은 걔들하고 안 다니냐?”
중간고사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점심시간에 반 친구들과 같이 식당으로 향하던 한에게 누군가 그렇게 물었다. ‘걔들’이 누굴 말하는 건지 잘 알아들었지만 한은 모른 척 되물었다.
“걔들?”
“정현이랑 그 얌전한 애.”
“아…… 뭐. 반이 다르니까.”
그렇다고 하기엔 2학년 때도 반은 다 달랐다. 그게 변명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대충 그렇게 얼버무리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친다.
“걔들 저기 있다.”
어깨를 두드린 친구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자 먼저 식당에 와 마주 앉은 신우와 정현이 보였다.
방금 같이 가자고 메시지를 보낸 걸 무시하고 반 친구들과 온 건데, 막상 둘만 있는 광경을 보자 괜히 또 기분이 나빠졌다. 같이 먹자는 제안을 에둘러 거절한 건 자신이었지만, 한 번 묻고 끝인 녀석도 이상한 건 마찬가지다.
세 번, 네 번 하라는 것도 아니고, 최소한 두 번은 묻는 게 예의다. 한 번만 더 메시지를 보내면 그러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역시 언제나처럼 두 번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단 한 번도 신우는 자신을 기다려 준 적이 없었다. 자신이 돌아서기 전에 경쟁이라도 하듯 늘 먼저 돌아섰고, 제안을 거절하면 아쉬움 없이 곧장 포기한다.
순간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라는 투정이 입 안을 맴돌았다. 적어도 너는, 그리고 적어도 나한테는, 이러면 안 돼, 라고 자꾸만 강박처럼 생각하게 된다.
이런 건 싫은데, 스스로가 못나 보일 정도로 조잡스러운 생각만 하고 있다.
한 번 그러한 생각에 빠져들자 다시 울컥거리며 짜증이 나 일부러 그쪽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 식판에 음식들을 이것저것 담았다. 그러곤 일부러 정현과 신우가 함께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과시하듯, 나 너 말고도 친구들 아주 많다고 자랑이라도 하듯 반 녀석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 지나가자 깨작거리며 식사를 하던 정현이 이쪽을 본다. 뭔가를 탐색하는 듯한 정현의 시선에 억지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빨리 왔네?”
높은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걸자 신우 역시 이쪽을 바라본다. 마침 그들의 옆자리는 텅텅 비어 있었다. 은근히 앉으라고 말해 주길 바라는 시선으로 신우를 바라봤지만 신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색한 얼굴로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한 번, 아니 자존심이 있으니 두 번만 말하라고, 신우의 까만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한 녀석이 먼 곳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킨다.
“야, 저기 다 비었다. 저기 앉자.”
눈치 없이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는 녀석의 말에 순간 욱해 옆을 보는데 비어 있던 신우의 옆자리를 뒤따라온 녀석들이 채웠다.
순간 난감한 얼굴로 그쪽을 보고 있자 정현이 얄미운 투로 고갯짓을 한다.
“야, 가서 빨리 앉아. 곧 2학년들 올 시간이야.”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해 가며 자신을 밀어 내는 정현을 한 번 노려보고 다시 신우를 쳐다봤지만 신우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였다.
그 미지근한 태도에 화가 나 휙 돌아섰다.
“점심 잘 먹어라.”
예의상의 인사를 남긴 채 반 친구들과 함께 빈 테이블로 향했다. 가는 중에도 혹시나 해 그쪽을 돌아봤지만, 두 사람은 밥을 먹으며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계속해서 시시덕거리느라 이쪽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걸 눈으로 확인하자 또다시 가슴이 답답해지며 짜증이 일었다.
재미있는 일만 하고, 재미있게만 살고 싶은데 그게 생각대로 안 되는 듯해 신경질이 났다.
재미있는 게 좋다. 재미있는 사람들, 재미있는 것들, 흥미로운 일들. 그 외에는 하고 싶지 않다.
지루하고 재미없고 시시한 것들은 질색이다. 그것들을 신경 쓰며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그러니까, 이렇게 재미없는 건 빨리 끝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은 미련에 다시 한번 신우가 앉아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를 보자 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재미없다고 쉽게 놓아 버리기엔, 아쉬웠다.
무엇이 아쉬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막연히 아쉽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너, 별나게 군다?”
라고, 뒷문 틀에 기대선 정현이 말을 던지자 한이 뭔 개소리냐는 얼굴로 되묻는다.
“뭐가?”
“과외가 있든 없든, 신우랑 같이 돌아가려고 발악하던 놈이 왜 갑자기 다른 친구들하고 놀러 간다고 빼냐고.”
거의 2주째 하교를 따로 하는 한에게 정현이 따지듯 묻자 한이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얼굴로 대꾸한다.
“그럴 수도 있지. 친구라고 꼭 같이 다녀야 돼?”
중간고사가 끝난 날이라 모처럼 같이 밥 먹고 영화라도 보러 가자고 하려던 정현은 한의 노골적인 거절에 미심쩍다는 듯 한을 노려봤다. 그러자 한이 시선을 피하며 오히려 정현을 나무란다.
“너야말로 너무 신우랑 붙어 다니는 거 아냐? 반에 친구들 없냐?”
혹시 따돌림당하는 거냐는 한의 빈정거림에 정현이 웃는다.
“걱정 마. 내가 어디 가서 따당할 성격 같아?”
“……물론, 그건 아니지.”
다른 애들을 다 따돌리면 따돌렸지, 정현은 누군가에게 불유쾌한 일을 당하고 참을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작고 예쁘장한 얼굴이라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법도 했지만, 실제로는 절대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에 불의를 보면 못 참고 또 성질도 급했다. 어린 시절에도 덩치 큰 녀석이 괴롭히면 그 녀석의 귀를 물어뜯거나 머리카락을 죄다 뽑아 버리는 엽기적인 짓을 저질러 동네에서 깡패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녀석이었다. 그 성격은 지금도 마찬가지라, 누군가 먼저 치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 허벅지 살이라도 물어뜯을 녀석이다.
“하여간 난 됐으니 둘이 놀아.”
그렇게 말을 마친 뒤 다시 돌아서려 하자 정현이 한심하다는 듯 한을 바라본다.
“그래, 네가 그럼 그렇지…….”
“뭐가?”
“벌써 질린 거잖아. 그래, 너치고는 어쩐지 오래간다 했다. 이번엔 좀 다를까 했는데 네 변덕이 어디 가겠냐? 재수 없는 새끼.”
뜬금없는 정현의 비난에 발끈한 한이 따지고 들려 했지만, 정현은 더 말하기도 입 아프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라, 멍청아.”
멋대로 말을 마친 정현은 한이 반박할 새도 주지 않은 채 바닥을 걷어차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얼결에 정현에게 면박당한 한은 짜증스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정현은 자신이 벌써 싫증이 난 거라고 하지만 이건 반쯤은 정현의 탓이었다. 정현이 그렇게 신우와 가까워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신우가 자신보다 정현을 더 따르고 좋아하지 않았다면, 신우를 이전처럼 정성을 다해서 대해 줬을 거다.
그 녀석을 먼저 발견한 건 자신이었다.
죽을 듯 아슬아슬해 보이던 녀석을 자신이 잡아끌었고, 추워 보이는 녀석의 손을 잡아 주었다. 불안해하면 위로해 주었고 슬퍼 보이면 달래 주었다.
그러니까, 그 녀석은 자신만의 친구여야 했다. 거기에 갑자기 정현이 끼어들면 안 되었던 거다.
지는 건 싫다. 지는 것도 2등도 질색이다. 하려면 뭐든 최고가 되어야 하고, 최고가 되지 못한다면 아예 손도 대지 않는 쪽이 좋다.
겉으로는 아닌 척, 털털한 척하고 있지만 자신은 기본적으로 욕심쟁이였다. 경쟁을 좋아하고, 이기는 걸 좋아하고, 1등이어야만 만족할 수 있다. 어설프게 좀 하네, 제법이네, 하는 소리는 듣지 않는다. 그게 아주 나쁜 성미라는 건 알지만 그게 자신의 기질이었다.
두 번째는 안 한다. 그런 시시한 건 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신우에게 두 번째도 안 할 거다.
그러느니 그냥 끝을 내는 게 낫다.
어차피 자신이 아쉬울 건 없으니까.
관계가 틀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쩌다 보니 데면데면해진 관계에 처음 몇 번인가는 신우 쪽에서 연락을 해 오고, 반으로도 찾아와 같이 뭘 하자고 말을 건넸지만 그럴 때마다 매번 ‘정현이랑 같이’라는 말이 덧붙었다. 그래서 번번이 그의 제의를 거절했다.
하지만 자신이 관계를 단절해 놓고도 그 녀석이 보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슬쩍 그의 반에 들를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심술을 부리면 슬슬 눈치 좀 채고 알아서 정현이랑 거리를 둬야 하는 거 아니냐고 속으로 아무리 툴툴거려도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신우는 정현과 함께였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넌 다른 친구도 없냐는 비아냥거림이 절로 치밀어 올랐지만 그 말을 뱉어 내면 너무 쪼잔해 보일 것 같아 겨우 참아 내고, 태연히 웃는 얼굴을 한 채 그를 스쳐 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초여름에 들어갈 때 즈음에는 인사도 하지 않게 되었다. 가끔 신우가 눈짓으로나마 아는 체를 할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무시하자 가을로 들어섰을 즈음에는 신우도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 꽤 충격을 받았다.
눈짓이나 표정의 변화 없이 옆을 스쳐 가는 신우를 보곤 놀라 녀석을 돌아봤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바쁜 듯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어느새 11월이 되었다.
“시험은 잘 봤냐? 아니, 당연히 잘 봤겠지. 넌 찍기만 해도 만점 나올 놈이니까.”
“뭐…….”
수능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와 혼자 뒹굴거리는데 당연한 듯 정현이 집으로 찾아왔다. 이 녀석은 왜 신우랑 안 놀고 우리 집에 온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걸 말로 하면 신우에게 아직도 신경 쓰고 있는 걸 들킬 것 같았다. 그래서 은근히 말을 돌렸다.
“시험 끝났는데 어디 안 나가냐, 유정현?”
“그러는 너는 왜 집에 있는데?”
“사람 많아서.”
오늘 나가면 고3들에게 치여 죽을 거라 내일부터 놀기로 했다는 핑계를 대고 잡지만 넘기고 있자 침대에서 뒹굴던 정현이 기다리던 화제를 꺼낸다.
“신우도 시험은 잘 봤나 봐. 놀러 가자니까 독서실에서 짐 정리한다고 가더라고. 애가 축 처져서 왜 그러지?”
“……그래?”
축 처졌다니 좀 신경이 쓰였지만, 그걸 티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심한 척 잡지에 집중하자 정현이 침대 위에서 데구루루 굴러 이쪽으로 오더니 고개를 쳐든다.
그러곤 심각한 투로 말을 건넨다.
“야.”
“왜?”
“이대로면 너 더는 신우랑 말 한마디 못 해 보고 졸업한다? 실상 우린 다 끝난 거잖아. 기말이야 대강 보면 그만이고. 오전 수업만 하게 될 텐데 이렇게 어영부영하다 졸업하고 다른 대학 가면 끝이야. 그런데 진짜 괜찮겠어?”
그 말에 조금 뜨끔하긴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담담한 척 대꾸했다.
“그게 뭐? 진학하면 다들 헤어지잖아. 초등학교 때도 그랬고, 중학교 때도 그랬어. 고등학교는 뭐가 다른데?”
“진짜 후회 안 하겠어?”
“후회할 게 뭐 있어.”
환경이 바뀌면 당연히 사람도 바뀌는 거니까, 라고 덧붙인 한은 때마침 울린 알림음에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안 나올 거냐는 친구들의 메시지를 하나씩 돌아보고 있자 정현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뭐,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만……. 걔, 요즘 좀 힘들어 보여서. 이상하게 걔는 추워 보인단 말야. 날이 추워져서 더 그런가.”
정현이 작게 읊조리는 말에 한은 처음 만났을 때의 신우를 떠올렸다.
그때도 딱 이맘때쯤이었다. 11월 8일. 그래, 조금 지났지만 딱 이맘때였다.
이른 새벽, 아슬아슬해 보이는 얼굴로 옥상에 선 채 당장이라도 그 아래로 떨어져 내릴 것 같았던 소년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만약 그때, 그곳에 서 있던 게 그 녀석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굳이 그 옥상까지 올라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순간에는 어서 가서 저 녀석을 붙들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만으로 미친 듯이 달려 올라갔지만 문득 떠올려 보니 그것도 이상하다.
만약 그 녀석이 아닌 다른 녀석이었다면, 번거로움을 불사하고 거기까지 올라갔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 같다.
자신은 그렇게 친절한 사람은 아니다.
“아, 하여간 시험 끝나서 좋다! 당분간 죽어라 놀아야지.”
“뭘 하고 놀려고?”
“글쎄. 가까운 데로 여행을 가도 좋고, 아, 면허도 따야지. 스키도 타러 가고. 너 보드 잘 타지? 나도 보드 배워 볼까?”
“관둬. 스키 타고도 구르는 놈이 보드는 어떻게 타려고? 또 어디 부러져서 오게?”
“이젠 잘 타! 윤이랑 훈이랑 불러서 오랜만에 같이 놀러 가자.”
“겨울방학 때 시간 봐서.”
“뭐……. 그러든가.”
할 말 다 했다는 듯 다시 데구루루 굴러 침대 바깥쪽으로 간 정현은 그대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정현이 멀어지자 친구들의 메시지를 보던 한은 그 메시지 창을 닫고 이번엔 신우와의 메시지 창을 열었다.
그와 나눈 메시지는 6월에서 멈춰 있었다. 그나마 그 메시지들도 신우가 일방적으로 보낸 것들뿐이었다. 자신은 거기에 답하지 않았다.
이젠, 신우와 친구라고도 하기 애매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이대로 졸업하면 서로 연락도 안 하고 지내게 될 거다.
아마, 신우라면 절대 먼저 연락하지 않을 거다. 자신도 한번 돌아서면 미련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신우도 마찬가지였다. 워낙에 차고 무심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 차가움에서는 어쩐지 처연함이 묻어났다. 가슴을 아리게 하는 슬픈 눈을 가진 녀석이었다.
어쩐지 한숨이 나올 것 같은 기분에 휴대폰을 내려 두고는 침대에 누웠다.
그냥 무시해 버리고 싶은데, 한때 친했던 다른 친구들이나, 열을 올렸던 것들처럼 자신에게 안 맞고 재미없으면 잊어버리면 그만인데…… 이상하게도 녀석에게는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쉽게 포기가 되질 않았다. 그게 딜레마였다.
수능이 끝난 이후의 3학년 교사는 한산했다. 대강 성적을 확인한 직후부터 곧장 진학 상담에 들어간 터라 오전 수업만 진행하는 탓에 오후에는 교사 전체가 텅 빈 느낌이었다.
진학 상담 역시 이미 수시로 대부분이 진학이 결정된 후라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몇 가지 플랜을 세우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하긴 해야 하는 거라 하교 시간 넘어까지 학교에 남아 있던 한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다 교실을 나서서 자판기 쪽으로 향했다. 날이 쌀쌀해 두꺼운 패딩 점퍼를 걸친 채 천천히 복도를 가로지르는데 창가에 기대선, 한 소년이 보였다.
신우였다.
이 날씨에 코트나 패딩도 없이 교복만 걸친 채 삭막하기 그지없는 겨울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단아한 옆모습에 가슴 한편이 아려 오는 느낌이었다.
여전히 춥고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에 걸음을 멈춘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한, 다음 너래! 대기해!”
조용한 복도 안을 쩌렁쩌렁하니 울리는 그 소리에 밖을 내다보던 신우가 놀라 이쪽을 바라본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숨이 턱 막혀 오는 듯했다.
유난히도 까맣고 물기 서린 그 눈을 마주하자 가슴이 떨려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 버렸다.
왜인지, 그 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리고 말을 걸 수도 없었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하기도 하고 또 여전히 화가 난 것 같은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 감정을 꾹꾹 누르며 교실로 돌아가는데 문득 또 울컥했다.
그냥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라도 먼저 말을 걸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녀석은.
이번만은 두 번도 아닌, 그냥 딱 한 번만 불러 주면 돌아볼 작정이었다. 마지막 인사쯤은 하고 싶은데…… 끝내 그 녀석은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
그 어색한 침묵이 싫어 더욱 걸음을 서둘렀다. 그게 진짜 신우와의 마지막이 될 줄도 모르고, 그때는 그렇게 오기를 부렸다.
유독 추운 겨울, 입학 허가서를 받아 들곤 정신없이 대학교 입학 준비를 하던 사이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졸업식이 다가와 있었다.
그날은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교복을 입는 날이라 마음이 싱숭생숭한 탓도 있었겠지만 졸업식이라고 원주에 계신 부모님과 동생들까지 모조리 올라와 집 안이 시끄러웠다. 그러던 중 바로 아래 동생인 윤이 새벽에 위통을 호소해 한바탕 전쟁을 치러 혼을 빼 놓더니 아침 식사 중에는 어떻게 농구를 관둔 걸 동생들이 농구 시합 보러 가서 알게 하냐, 대학은 왜 네 마음대로 결정한 거냐, 등등 부모님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 전쟁 같은 아침을 겨우 이겨 내고 드디어 학교로 가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차 안에서 막내 훈이를 향한 윤이의 잔소리 폭탄을 듣느라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졸업식 역시 상을 받고 졸업생 대표 연설까지 하느라 졸업 증서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중 마무리되었다.
폭풍처럼 스쳐 지나간 졸업식이었다.
그래도 어쩐지 운수 사나운 날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졸업식의 피날레와 같은 사진 촬영을 위해 친구들을 찾기 시작했다.
졸업반 친구들을 시작으로 1,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 그리고 농구부 친구들과 정현까지 찾아 아는 얼굴들과는 모두 함께 사진을 찍었지만 그럼에도 허전함이 느껴졌다. 중요한 사람을 빠트린 것 같은 기분에 주변을 돌아보는데 ‘친구는 진짜 많구나.’라고 묘한 얼굴로 칭찬 아닌 칭찬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이상한 기색을 느끼셨는지 문득 말을 건네셨다.
“누구 찾아?”
“……네?”
“사진 찍을 친구 찾는 거 아냐?”
“아…….”
그러고 보니 누굴 찾고 있는 건가 싶었다.
친한 친구들과는 대부분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는 사이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졸업식이 진행된 체육관이 반쯤 빌 때까지 징그럽게도 오래 사진을 찍어 댔다.
그런데, 또 누굴 찾고 있었던 걸까?
“형도 사람인데 농구장 한번 돌아보고 싶겠죠. 그냥 두세요.”
라는 윤의 참견에 한은 그제야 이 체육관이 자신이 2년 동안 연습을 하던 곳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래도 별 감흥은 들지 않았다.
농구장은 그냥 농구를 하던 곳일 뿐이다. 관뒀다면 미련은 없다. 미련이 남을 정도라면 자신은 절대 농구를 그만두지 않았을 거다.
다만, 누군가가 기억날 뿐이다.
저 멀리 관객석에 앉아 있던 누군가…….
“야, 유정현.”
“왜?”
“신우 갔냐?”
가장 친했던 녀석이니 이 녀석이라면 알겠지 싶어 묻자 ‘쟤가 원래 쓸데없이 친구는 많아요.’라고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던 정현이 그제야 ‘아!’라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신우, 오늘 안 왔어.”
“……뭐?”
“아침에 메시지 왔어. 집에 일이 생겨서 졸업식 참석 못 한대. 졸업 증서는 나중에 받아 가기로 했나 봐.”
그 말에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오늘은 고교 시절의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부터 자신은 다시는 이 교복을 입을 일도, 이 학교를 찾을 일도 없을 거다. 그리고 그건 신우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여기서 그 녀석을 보지 못한다면, 그 녀석과 자신의 연은 끊어지는 거다.
학교를 졸업하면 늘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나올 때 문자 받아서 무슨 일인지는 못 물어봤어. 그래도 졸업식은 오지.”
못내 섭섭한 듯 중얼거리던 정현이 이내 그를 부르는 부모님의 목소리에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야, 이따 보자. 전화할게.”
점심 먹고 따로 보자는 말을 남긴 뒤 가족에게 달려가는 정현을 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커다란 농구장 안을 돌아봤다. 아예 졸업식에 나오지도 않았다니 아무리 찾아 봤자 있을 리가 없는데도, 그냥 시선이 움직였다.
혹시 뒤늦게라도 오지 않을까, 어디에 숨어 있진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품고 주변을 돌아보자 누군가 어깨를 툭 친다.
“그만 가자. 할아버지 기다리시겠다.”
실질적인 보호자이신 할아버지께서는 시끄러운 녀석들 북적거리는 학교는 질색이라며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으신 터라, 일단 집으로 가 점심을 먹어야 했다. 워낙에 성미가 급하신 분이라 늦으면 불호령이 떨어지니 어서어서 움직여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질 않았다.
이 춥고 재미없는 체육관에도, 이 학교에도 더 있을 이유가 없는데 괜히 머뭇거리게 된다.
“형, 아버지 어머니 기다리시잖아.”
답지 않게 미적거리는 그 꼴에 윤이 다시 한번 재촉한다. 성격 급하고 뭐든 일정대로 정확히 움직여야만 위장병에 안 걸리는 녀석의 타박에 끝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가자.”
하지만 발걸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이곳에서 아주 소중한 뭔가를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쉽사리 떠날 수가 없었다.
조금은 상처를 받은 것도 같았다. 이렇게나 깔끔하게 끝을 내 버린 녀석 때문에 마음을 다친 것 같았다.
먼저 무시한 건 자신이었지만, 그래도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넌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다고. 진짜 이러는 건 아니라고 화를 내면서 토로하고 싶었다.
“친구들하고는 졸업해도 계속 연락하면 되고, 학교는 또 오면 되니 너무 섭섭해 마라. 원래 다 그런 거야.”
체육관을 막 나서려는 순간까지 두리번거리는 자신을 보며, 아버지는 무슨 오해를 하셨는지 그렇게 섭섭해하지 말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분명히, 친구들과는 연락을 하면 되고, 학교는 다시 오면 된다. 마음만 먹으면 그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 녀석과는 그렇게 연락이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중간에 낀 정현이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연락하고, 만나고, 다시 친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도, 그냥 막연히 그런 예감이 왔다.
이게 진짜 끝이라는.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생애 최초의 상실이 될 거라는, 서글픈 예감이 들었다.
아픈 건 싫다. 뭐든 훌훌 털어 버리고 유쾌하게, 자신을 즐겁게 만드는 것만 하며 살고 싶기에 작은 생채기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냥 잊을 거다.
친구 하나 정도 자신의 인생에 없어도 되는 거니까.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잊어 줄 수 있다.
그렇게 가슴에서 찌릿거리며 자라던 여린 새싹을 땅 속으로 밟아 넣었다. 아픈 게 싫어서, 그 싹을 무시해 버렸다.
그렇게 그 꽃은 죽어 버린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