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화-
우루릉.
멀리서 하늘이 울렸다. 돌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린델은 조그만 어깨를 흠칫 떨며 고개를 들었다. 번화가에 위치한 식당의 뒷마당에서 보이는 하늘은 파란색이었다. 회색 구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천둥은 폭풍우의 전조였다. 특히 초여름 바닷가의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아무리 날씨가 맑아도 언제 돌변할지 몰랐다.
뱃사람들은 바다의 신과 천공의 신이 싸우면 폭풍우가 일어난다고 믿었다. 사이가 나쁜 두 신은 툭하면 싸워댔기 때문에 날씨를 예측할 수 없다고 했다. 신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던 린델은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런 쓸데없는 것까지 기억하면서 왜 자기 이름은 모르냐고.
고요정 시대가 끝나면서 대륙력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도, 제국의 초대 황제가 스타울러 1세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힐라드엔 제국의 수도가 닐르라는 것도, 대륙 최고의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이 콴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만큼은 아무리 노력해도 새하얀 백지였다.
이름뿐만 아니었다. 나이도, 고향도, 가족에 대해서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린델이라는 이름도, 나이가 다섯 살이라는 것도 들어서 알고 있는 것뿐이었다.
린델은 울고 싶은 것을 참으며 식당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분위기는 좋지 못했다. 늙은 선장과, 중년의 식당 주인이 싸우다시피하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유가 없다는데, 왜 자꾸 그래요?”
“자네밖에 없어. 조금 비리비리하긴 하지만 남자아이는 금방 자란다고. 곧 쓸 만해질 거야. 여관이라는 게 손이 많이 가잖아. 안 그래? 게다가 쟤는 글도 읽고 쓸 줄 알아.”
“우리 애들만으로도 충분해요.”
“이봐.”
“애새끼를 맡기려면 신전에나 가봐요.”
“이미 갔다 왔는데, 정원 초과라며 안 된다잖아. 젠장. 자네밖에 없다니까. 내가 자주자주 들를게. 응?”
“아이고. 그걸 누가 믿어요? 딱 봐도 떼놓고 도망갈 게 뻔한데.”
두 사람은 아까부터 같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선장은 린델을 식당에 맡기고 싶어 했고, 식당 주인은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둘의 목소리는 워낙 커서 식당 뒷문 밖에 쪼그려 앉아 있는 린델에게도 잘 들렸다.
린델은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선장이 자신을 데리고 간 곳은 신전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이미 아이들이 넘쳐난다면서 린델의 신병을 맡기를 거부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커다란 여관이었다. 거기서도 이미 사람은 충분하다며 손을 내저었다. 두 번째로 방문한 술집에서는 린델이 너무 작고 말랐다고 했다. 이곳이 세 번째였다.
이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선장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귀찮아했다.
“어떻게 하지.”
린델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막막했다.
선장이 자신을 버릴 것 같아서 무서웠다. 낯선 곳에서 혼자가 될 것 같아서 무서웠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게 무서웠다. 너무나 무서워서 손발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린델의 기억은 17일치밖에 없었다. 아무리 애써봐도 기억의 시작은 언제나 바다 위에 떠 있는 갑판이었다. 앞니가 하나 없는 선원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채드였다.
채드는 린델이 망망대해의 판자 조각에 걸려 있던 것을 발견했다고 알려주었다. 뒷머리가 찢어졌고 4일 만에 눈을 떴다고도 했다. 린델은 자신이 어째서 바다 위에 떠 있어야 했는지 알지 못했다. 정확히는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말하지 못했다. 기억이 몽땅 사라진 것이다. 채드의 말에 의하면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는 린델이라고 이름을 말했고, 다섯 살이라고도 했다지만 그것조차 기억에 없었다.
그렇게 린델은 곡물 수송선의 군식구가 되었다. 눈매가 찌그러진 선장은 린델을 바다에 내던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데리고 있을 생각도 없다고 확실히 밝혔다. 뱃일을 하기에는 몸집이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육지에 내리게 되면 적당히 지낼 곳을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적당히 지낼 곳이 생기지 않았다.
식당 주인에게 도와달라고 매달려야 할까? 선장에게 버리지 말라고 빌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할수록 몸이 더 움츠러들었다. 린델은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그 때였다.
“아이고. 사제님. 여기까지 웬일이십니까?”
식당 주인이 호들갑을 떨었다. 새로운 손님이 온 모양이었다.
“아아. 저 선장님을 만나 뵈려고 왔네. 제대로 찾아왔군. 선장님. 조금 전에 소년이랑 함께 신전에 오셨지요?”
“네, 그렇습니다. 데려가시려고요?”
선장의 목소리가 확 밝아졌다. 신전에서 사람이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창가에서 멀어진 듯 린델의 귀에는 그들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다. 린델은 조바심이 났다. 버려지는 게 아니라면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사제가 자신을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선장이 린델을 불렀다. 린델은 얼른 엉덩이를 털고 안으로 들어갔다. 선장과 식당 주인은 제각각 웃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날 선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 둘 사이에 사제복은 입은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선장만큼이나 나이가 있어 보였는데, 주름진 얼굴이 괜히 무서워 보였다.
“인사드려야지. 잉그란 사제님이셔.”
여관 주인의 재촉에 린델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린델입니다.”
“보시다시피 아주 얌전한 아이입니다. 글도 읽고 쓸 줄 안답니다. 사제님.”
“대단하구나.”
선장의 칭찬에 감탄한 잉그란이 웃으면서 허리를 굽혔다. 덕분에 린델은 잉그란과 눈높이가 같아졌다. 잉그란이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는 바람에 굳어 있던 린델은 저도 모르게 같이 따라 웃고 말았다.
무서운 얼굴의 할아버지는 웃으니까 인상이 달라졌다.
“나는 잉그란이란다. 잉그란 델로.”
“린델입니다. 성은…… 몰라요.”
“기억을 잃었다면서?”
“예.”
“기억이 없다는 건 무서운 법이지.”
잉그란의 말에 린델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기억이 없다는 것은 정말 무서웠다.
“나는 지금 로벅이라는 곳에 있단다. 여긴 스승님을 찾아뵈러 왔었는데……. 어, 음. 이곳은 이미 아이들이 잔뜩 있어서 널 맡기가 힘들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내가 널 종사(從事)로 맡을 생각이야. 로벅이 좀 시골이긴 하지만 지내기에는 별 문제가 없을 거란다.”
“잘된 일이지 않냐? 응? 널 맡아주신대.”
“잉그란 사제님은 좋으신 분이야. 그건 내가 보장하지.”
선장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식당 주인은 사제가 좋은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린델은 잉그란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린델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저기…….”
“응? 왜? 뭐가 궁금해?”
“종사가 뭐죠? 제가 할 수 있는 건가요?”
린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잉그란이 자신을 데려갈 거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종사가 뭔지는 몰랐다. 하라는 건 다 해야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못 하는 거면 어쩌나 싶었다.
“음, 종사란 사제와 신전의 일을 돕는 사람을 말한단다. 신전의 마당을 쓸거나 하는 청소 같은 걸 하면 돼.”
“네.”
싫어하는 기색도 없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잉그란 덕분에 린델은 아주 조금 마음이 놓였다. 식당 주인의 말대로 좋은 사람 같긴 했다.
“괜찮아. 젯타스께서 도와주실 거란다.”
밑도 끝도 없이 주신(主神)께서 도와주실 거라고 말한 잉그란의 주름진 손이 린델의 머리에 닿았다.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는 손짓이 다정해서 린델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우르르릉.
천둥소리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울렸다. 그러나 울음을 참아야 했던 린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