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화-
이른 새벽이었다.
열린 창 너머로 스며든 달빛에 린델의 레몬색 머리카락이 창백하게 반짝거렸다. 스무 살이라는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얼굴은 섬세하고 순한 생김이었다. 마치 잘 조각된 석상과도 같은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미소를 짓는 입술이었다.
린델은 천천히 눈을 떴다. 밤새도록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쳐 환한 보름달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자 축축하게 젖은 공기가 린델의 가슴 가득 들이찼다.
새벽 기도를 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그러다 멀리서 울리던 천둥소리에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고 말았다. 그날은 린델의 20년 인생을 통틀어 아주 특별했고, 그래서 시간이 흘렀지만 작은 것까지 세세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우르렁거리던 푸른 하늘, 식당 부엌에서 풍경오던 음식 냄새, 낡은 모자를 쓰고 있던 선장, 붉은 수염을 기른 식당 주인,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던 잉그란의 주름진 손길까지.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중에서도 잉그란과 함께 신전으로 걸어가던 순간은 잊을 수가 없었다. 낯선 곳이니까 길을 잃으면 안 된다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혹시라도 혼자가 되면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신전으로 찾아오라고도 했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선장을 놓칠까 봐 필사적으로 뛰었던 것을 떠올리며 잉그란이 정말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된 지금은 그때의 자신이 깨달은 것이 틀리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지.”
린델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솔직히 운이 좋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날, 잉그란이 그의 스승님을 찾아뵙기 위해 디텐토의 신전을 찾은 것도, 그리고 선장과 함께 신전을 걸어 나오던 린델을 발견한 것도 우연이라고 했다. 그리고 린델이 어려서 죽은 잉그란의 막내 동생을 닮은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잉그란이 식당까지 찾아온 것은 그의 선의였다. 신전 고아원에서 린델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자신이 돌봐줘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부터 그랬다. 여관, 술집, 그리고 식당까지 포기하지 않고 뒤를 쫓은 것은 순전히 잉그란의 의지였던 것이다.
잉그란은 젯타스 신의 안배라고 말했다. 린델도 그에 동의하는 바였지만, 그것보다는 잉그란이 착한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확신했다.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린델은 그날 그곳에 선량한 잉그란을 보낸 세상 모든 신들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째서 자신이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하고 있었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가족은 어디에 있는지 여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께서는 새로운 가족을 주셨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라고 생각하며 린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하루는 새벽 일찍 시작했다.
린델의 하루는 규칙적이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신전의 앞마당을 쓸고, 내부를 청소하고, 뒤뜰의 약초밭에 난 잡초를 뽑은 다음에야 아침을 먹고 예배를 올렸다. 오전에는 교리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약재를 정리했다.
로벅은 대대로 델라우드 백작의 영지였지만 워낙 외진 산골이라 영주성 부근의 주민은 400명도 되지 않았다. 그런 로벅의 한쪽에 위치한 작은 신전은 예배당이자, 상담소였고, 그리고 치료소이기까지 했다.
다치거나 병에 걸린 마을 주민들을 위해 각종 약재를 준비하는 것이 신전의 가장 중요한 일거리 중 하나였다. 그리고 사제를 도와 신전의 잡일을 담당하고 있는 종사인 린델은 주로 약초를 손질하고 말리는 일을 했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새벽 같이 신전의 청소를 하고 약초를 그늘에 널어두고는 외출 채비를 했다.
델라우드 백작의 고성(古城)은 며칠 전부터 사냥 대회를 위한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사냥 대회라고 하지만 무더운 여름이 되기 전에 로벅 근방의 귀족들과 토호들이 한데 모여 화합을 다지며 먹고 마시는데 열중했다. 덕분에 영주성에는 일거리가 넘쳐나서 린델도 며칠 전부터 거들고 있었다.
린델은 아침 일찍 영주성에 가기 전에 잉그란을 찾았다.
“왔느냐?”
의자에 앉아 무릎을 툭툭 치고 있던 잉그란이 웃으면서 반겨주었다. 올해로 일흔 살이 된 잉그란의 미소에는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잔주름이 가득했다.
관절염 때문에 거동이 불편한 잉그란은 대부분의 시간을 사제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성정대로 깔끔하게 꾸며진 사제실은 잉그란의 작업실이기도 했다. 약초학에 대한 책을 쓰고 있는 그의 손에는 잉크가 묻어 있을 때가 많았다.
오늘도 잉그란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잉크 얼룩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확인하며 린델은 웃으면서 가까이 다가갔다.
“새끼손가락에 잉크가 또 묻었어요. 그러다가 문신을 한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생길지도 몰라요.”
“그러면 좋지. 안 씻어도 되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냐?”
“영주님 성에 가기 전에 인사드리려고요.”
“이렇게 일찍?”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어이쿠. 부지런하기도 하지. 그러지 말고 잠시만 앉아보거라.”
너무 힘 빼지 말라고 할 줄 알았던 잉그란이 붙잡는 바람에 린델은 의자를 찾아 앉았다.
“무슨 일이세요?”
“자, 교구청에서 온 공문이다. 어제 보여준다는 것을 깜박했지. 읽어보거라.”
“?!”
“이제 실감이 나느냐?”
린델은 잉그란이 내민 공문서를 받아 들었다. 선명한 교구청 인장이 찍힌 공문에는 린델의 신학교(神學校) 입학 지원서가 통과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다섯 살 때부터 신전의 종사로 지낸 린델은 꾸준히 사제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국에서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수도인 닐르에 있는 신학교에서 5년간의 교육 과정을 수료해야 했다.
신학교의 입학 조건은 간단한 편이었다. 스무 살 이상, 명망 높은 사제 2명과 귀족 후원자의 추천서가 필요했고, 필기와 면접에 통과해야 했다. 다행히도 신분은 따지지 않았기에 고아인 린델도 합격만 한다면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문제는 입학이 아니라 졸업이었다. 5년 동안 매년 진학하지 못하면 신학교를 나와야 했다. 매년, 50여 명이 입학했지만 5년이 지나고 사제 서품을 받는 것은 10명 전후였다.
원래 린델은 좀 더 확실한 준비를 하고 신학교에 지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은 린델의 편이 아니었다. 잉그란은 일흔 살의 할아버지치고는 정정했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나이였다. 린델은 사제가 된 모습을 잉그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겨울부터 입학 준비를 서둘렀다. 린델은 이번 봄에 스무 살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다.
앞으로의 미래가 손에 들려 있었다. 서류를 통과했으니 이제 필기와 면접을 봐야 했다.
“실감나요.”
“그런데 왜 그렇게 울상이냐?”
“제가요?”
“그래. 시무룩한 강아지 같구나.”
농담을 방자한 놀림에도 린델은 화내지 않았다. 진짜 시무룩한 기분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말했다.
“그냥…… 막상 닥치니까 기분이 좀 그래요.”
“왜? 떨어질까 봐? 낯선 곳에 가야 해서? 여길 떠나는 게 싫다고 했었지?”
“그런 거 아니에요.”
사실은 다 맞았다. 합격하지 못할까 봐 무서웠고, 낯선 곳에서 지낼 생각을 하니 아득했고, 이곳을 떠나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잉그란을 실망시키는 것이 제일 두려웠다.
고아 출신인 자신이 사제가 되겠다고 했을 때 적극 지지해 준 사람이 잉그란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무모한 욕심이라고 했지만 잉그란만큼은 할 수 있다고 해주었다. 은인이자 스승님이고, 유일한 가족인 그의 자랑이 되고 싶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세상에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단다. 실패할 수도 있고,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 그게 다 경험이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밑거름이 될 거란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신학원에 떨어지면 어때? 다시 도전하면 돼. 또 떨어지면? 3번까지는 시도해 보다가 안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포기해 버려.”
“아직 한 번도 안 떨어졌어요.”
“뭐든 가능성은 열어둬야지. 확고한 목표가 있는 건 좋지만, 너무 거기에만 매몰되면 안 돼.”
가차 없는 충고에 린델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존경받는 사제인 잉그란은 신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마을의 안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분쟁이 생기면 앞장서서 중재했고, 현명하고 올바른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때로는 엄준한 꾸짖음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켰다.
린델 역시 다정하고도 공정한 잉그란 사제님을 흠모했고,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은 모두 믿고 따랐다. 그러나 사제가 안 될 수도 있다는 충고에는 오기가 생겼다.
시작은 분명 잉그란에게 자랑이 되고 싶어서였지만, 신전의 생활과 사제의 삶은 자신에게 맞았다. 기도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사람들을 돕는 것도, 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도 모두 좋아했다. 그러니까 사제가 되고 싶었다.
“저는 꼭 사제가 될 거에요.”
“오, 네 고집은 알아줘야겠다. 합격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확신하지 마라. 닐르의 거리에 예쁜 아가씨들이 얼마나 많은데. 신학교를 다니다가 짝을 만나 결혼하는 놈들도 종종 있단다. 너도 한눈에 반한 운명의 짝과 사랑에 빠질 수 있지 않느냐?”
잉그란의 가벼운 농담에 린델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자신이 예쁜 아가씨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일은 없어요.”
“운명이란 제멋대로란다. 특히 사랑이 그렇지. 그건 봄바람 같은 거야. 거센 폭풍우이기도 하지. 사랑에 빠지면 네 심장이 네 것이 아니게 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단다.”
“사제님은 꼭 제가 사랑에 빠지기를 바라시는 것 같아요.”
린델은 유명한 시문까지 인용하며 사랑을 찬양하는 잉그란을 향해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사제가 되려는 자신에게 사랑에 빠지라고 하는 것은 너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