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화 (3/137)

-03화-

그런 린델의 삐죽거림에도 잉그란은 주름 가득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앉은 린델은 이제 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청년이었다. 다 큰 아이는 언젠가 품을 떠나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언제나 선택은 아이의 몫이었다. 어려서 죽은 동생을 닮아 인연이 닿았던 아이는 이제 훌륭히 컸다. 속 한 번 썩히는 일 없이 제 앞가림을 하는 착한 아이를 위해 잉그란이 할 수 있는 것은 용기를 북돋는 것뿐이었다.

“하하하. 사랑에 빠져도 괜찮아 하고, 싶은 걸 찾아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다녀도 돼. 신학교를 다니다가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고 돌아와도 되고. 알겠지?”

잉그란의 조언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무리하지 마라.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라. 사제가 아니더라도 할 일은 많다. 린델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은 꼭 사제가 되고 싶었다.

“제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데요. 저도 잉그란 사제님처럼 모두에게 존경받는 사제가 될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건 관심 없어요.”

린델의 희망은 한결 같았다. 존경받는 사제가 되어 로벅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출신을 모르는 고아가 가질 만한 욕심이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런. 네 입으로 욕심이 많다고 하다니. 너처럼 욕심 없는 애가 어디 있다고.”

“제가 왜 욕심이 없어요. 명예욕도 욕심이에요.”

“그래. 그것도 욕심이다.”

“부끄럽지 않게 언제나 최선을 다할게요.”

“네가 씩씩한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그래도 너무 힘 빼지는 말거라.”

빙그레 웃은 잉그란이 린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바람에 린델도 따라 웃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났다.

린델은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기대했다.

100여 명이 넘는 손님이 참석하는 연회를 앞둔 영주성의 부엌은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불꽃 위에 돼지가 익어갔고, 그 옆에는 커다란 솥 안에서 스튜가 끓고 있었다.

정원의 나뭇잎을 쓸고 있던 린델은 부엌에 일손이 모자라다고 끌려왔다. 그리고는 1시간 넘게 감자 껍질을 벗겼다.

“감자 깎아?”

재료가 넘쳐나는 바람에 부엌에서 쫓겨나 야외 계단 옆에 앉아 열심히 감자 껍질을 벗기던 린델은 뜻밖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백작의 차남인 알렉스가 서 있었다.

1년 전에 봤을 때보다 키가 훌쩍 큰 그는 빙그레 웃는 얼굴로 사과를 한입 깨어 물고 있는 중이었다. 올해로 열아홉 살인 알렉스는 장신에 커다란 체격을 가진 청년으로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만큼이나 호감 가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도련님을 뵙습니다.”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두 사람은 잉그란 밑에서 같이 공부를 하고 어울린 덕분에 꽤나 사이가 돈독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엄연히 신분 차가 있었다. 감자와 칼을 내려놓은 린델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됐어. 하던 거 계속해.”

“네. 감사합니다.”

허락이 떨어졌기 때문에 린델은 다시 자리에 앉아 칼을 들어 감자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휴가를 왔는데 쉴 수가 없어.”

사과를 커다랗게 베어 문 알렉스가 자리를 뜨지 않고 투덜거렸다. 오랫동안 알렉스를 알아온 린델은 그가 어디선가 도망쳐 나왔다는 것을 눈치 챘다.

델라우드 백작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인 루션은 웨스트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 로벅으로 돌아와 착실한 후계자로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차자인 알렉스는 군에 투신해 승승장구 중이었다. 그런 그가 1년 만에 휴가를 받아 돌아온 것이 5일 전이었는데, 하필이면 사냥 대회와 겹쳐버렸다.

제국군에서 활약하고 있던 알렉스는 백작의 자랑거리였다. 분명 여기저기 끌려 다니다가 슬쩍 몸을 빼낸 게 분명했다. 린델은 알렉스를 위로했다.

“타이밍이 안 좋았어요.”

“그러게 말이야. 그것보다 형님께 들었는데, 올해 신학교에 간다며? 진짜야? 내년이라고 하지 않았어?”

“빨리 시험을 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잉그란 사제님 나이가 있으시잖아요. 백작님도 그러라고 하셨고요.”

델라우드 백작이 린델의 귀족 후원자였다. 신학교의 학비는 전액 무료였지만, 그래도 돈은 필요했다. 특히 고아 출신에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린델에게 백작과 같은 후원자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다행히 델라우드 백작은 로벅에서 사제가 배출되기를 바랐기에 이런저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시험이 언제지? 추분(秋分)이 끝나고 나서였던가?”

“예. 10월 마지막 날이에요.”

“닐르까지 걸어갈 생각 하지 마. 돈이 들더라도 무조건 마차를 타. 몬스터가 데시레라는 마을을 습격했다는 건 들었지? 아직 다 토벌을 못 했다고 하니까 걸어 다니지 마. 황제의 길이라도 외진 곳이 많으니까 조심해야 해.”

알렉스가 현실적인 충고를 했다. 고요정 시대의 짐승인 몬스터는 아직도 대륙에 잔존했다. 하지만 사람의 발길에 닿지 않은 폐허나 미궁에 주로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모험가가 아니고서야 몬스터를 만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얼마 전에 몬스터가 나타나 마을을 습격했다고 했다.

“예. 잉그란 사제님도 동행하실 거라서, 마차를 탈 것 같아요. 그리고 닐르는 여기서 남쪽이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 어휴. 내전은 남부에서 일어났는데, 왜 몬스터는 동부에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누구나 한 번씩 말하던 의심이 알렉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제가 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린델은 성서의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성서에 따르면 전염병과 천재지변, 전쟁으로 피폐해진 곳에서나 몬스터가 활개쳤다.

제국은 몇 년 동안 내전에 시달렸는데, 장소는 제국의 남부였다. 몬스터가 출몰한 곳은 남부가 아니라 동부 지역이었다.

그러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몬스터의 출몰이 내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황제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천벌받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도 혹시나 하는 사람들도 저마다 있었다.

첫 번째 내란은 수도인 닐르를 피로 물들였고, 두 번째 내란은 남부 전체가 피폐해졌다. 특히 남부 전체가 휩쓸린 내란은 끔찍함은 북동부 끝에 있는 로벅에까지 전해졌다. 신조차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참상에 몬스터가 출몰했다는 소문은 짧은 시간 동안 꽤나 널리 퍼진 상태였다.

하지만 린델은 모든 게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제국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무자비한 전쟁 때문에 몬스터가 출몰했다면 제국은 오래전에 몬스터의 세상이 되었을 터였다.

“만에 하나라도 몬스터를 만나면 무조건 숨어. 몬스터 잡는다고 나서지 말고.”

로버트가 이상한 충고에 몬스터와 전쟁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던 린델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로버트를 보았다.

“제가 무슨 몬스터를 잡아요.”

“늑대에게 덤비던 놈이 뭘 못 하겠어.”

“그때, 알렉스 님께서 넘어지셨잖아요. 제가 목숨 걸고 알렉스 님을 구해드린 거라고요.”

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신전에서 약초를 따러 산에 오르는데 알렉스가 동행하면서 산딸기를 땄는데, 운 나쁘게도 시커먼 늑대를 만나고 말았다. 뒤돌아 도망치는 와중에 알렉스가 넘어졌고, 린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행히 신전 식구들이 늑대를 쫓아준 덕분에 둘 다 무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선후 관계를 조곤히 따지는 린델을 보며 알렉스는 쓴웃음을 삼켰다. 열심히 이야기를 하면서도 감자를 깎는데 집중하는 린델은 순하고 단정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여리고 무해해 보이는 외모만큼이나 린델의 평판은 한결 같았다. 착하다. 순하다. 부지런하다. 똑똑하다. 등등.

하지만 알렉스는 린델이 얼마나 무모하고 독한지 잘 알고 있었다. 맨 몸으로 늑대 앞을 가로막은 건 일도 아니었다. 아이를 구하겠다고 불난 집으로 뛰어 들어간 적도 있었다. 보통 성격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렉스는 린델이 잉그란의 손을 잡고 로벅에 왔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작고 마른 녀석은 예쁘장했지만 낯을 가리다 못해 말도 잘 하지 않았다. 마음도 여리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런 녀석이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 그리고 사제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옆에서 보아왔다.

신전의 종사로 바쁘기 짝이 없는데도, 밤잠을 쪼개가며 공부했다. 자신은 어렵다고 내던져버린 대수학과 천문학은 물론이고, 신학, 사학, 문학, 철학까지 파고들었다. 잉그란 사제가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는 했지만 린델의 뼈를 깎는 노력이 없었다면 사제가 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 열심히라서 알렉스도 자극을 받았다. 아버지의 방탕한 둘째 아들이 될 뻔하다가 정신을 차린 것도 린델 덕분이었다. 

“당연히 기억하지. 그래서 내가 잘해줬잖아.”

“도련님이 저를 아끼시는 거야 마을 사람들이 다 알지요. 감사드립니다.”

싱긋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하는 린델을 보며 알렉스는 피식 웃었다. 성실하고 유능한 린델은 넉살도 좋았다. 특이한 점은 아부나 아첨처럼 들리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벅에서 그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말은 잘 한다니까. 넌 닐르에 가서도 잘 살아남을 거야.”

“과찬이십니다.”

“그래도 조심해. 거기는 눈 감고 있으면 코를 베어간다더라. 형님 말을 들으면 아카데미도 엄청 치열한 곳이던데, 신학교도 마찬가지겠지. 거기 가면 다 좋다고 하지 말고 싫은 소리도 좀 해. 교단 내부도 나름 치열하다고. 적응하는 것도 좋지만 호구 잡히지는 말아.”

알렉스는 린델에게 호구가 되지 말라고 잔소리를 했다. 린델은 다 좋은데 거절을 잘 못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편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해야죠.”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니까. 너야 좋다고 하지만 고생하는 거 누가 알아준다고.”

“그야 도련님이 알아주시죠.”

“말만 잘해요. 어? 에드리아나 아가씨? 여기까지는 웬일이십니까?”

알렉스가 뜻밖의 이름을 언급하는 바람에 린델은 고개를 들었다. 건물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옅은 갈색 머리에 화사한 외출복을 차려 입은 아가씨는 린델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린델은 그녀가 누군지 알았다. 레이디 에드리아나. 이 근방에서 제일 예쁜 처녀라고 소문난 그녀는 케손 백작이 귀애하는 외동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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