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화 (4/137)

-04화-

린델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없이 목례를 하고는 다시 감자를 깎았다. 그 사이 에드리아나가 웃으면서 알렉스 앞에 섰다.

“알렉스 경을 모시러 왔죠. 델라우드 백작님께서 경을 찾아오라는 특명을 내리셨답니다. 제가 경께서 이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봤었는데, 백작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자신의 둘째 아드님이 부엌 뒤뜰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런, 덜미가 잡혔군요.”

“자, 가시겠어요? 다들 기다리고 계시답니다. 제가 에스코트 해드릴게요.”

“영광입니다.”

에드리아나가 생긋 웃으며 내민 손을 알렉스가 정중히 잡았다. 그렇게 알렉스가 순순히 끌려가는 것을 조용히 곁눈질하던 린델은 입꼬리를 올려 소리 없이 웃었다.

린델은 남녀 사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지만, 귀가 있었기 때문에 알렉스를 둘러싼 소문을 여럿 들었다.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지 못하는 귀족의 차자는 매력적인 신랑감이 아니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달랐다. 군에서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는 그는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근방의 아가씨들이 가만히 두지 않고 있다는 게 부엌을 오가는 하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것이 바로 에드리아나라고 했다. 조금 전에 에드리아나의 모습을 떠올린 린델은 소문에 수긍했다. 그녀는 수줍음에 볼을 붉히면서도 알렉스에게 에스코트 해주겠노라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알렉스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잘 어울렸다.

잉그란이 그렇게 강조하던 사랑에 빠지는 게 알렉스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린델은 열심히 감자를 껍질을 벗기는데 집중했다.

얼마 후, 산더미 같은 감자를 모두 깎은 린델에게 양파가 주어졌다. 양파를 집어 든 린델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치우기 시작했다.

5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델라우드 백작의 고성은 오랜만에 맞이한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만찬과 무도회가 어우러진 연회는 성공적이었다. 향기로운 술과 흥겨운 음악이 어우러지고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절정에 달할 때쯤이었다.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고 있던 린델을 부른 것은 하녀장이었다. 손님들께서 과식을 하고 계시니 미리 소화제를 준비해 달라는 부탁에 린델은 주방을 나섰다.

린델은 영주성의 내부를 훤히 꿰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여러 심부름을 하고, 일손을 돕고, 알렉스의 놀이 친구이자 학우로 영주성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덕분이었다. 주방에서 신전까지는 정문이 아니라 동쪽의 샛문을 이용하는 게 더 빨랐다.

초여름 밤, 불빛도 없는 중정(中庭)의 끄트머리를 지나쳐 샛문으로 향하던 린델은 뜻밖의 상황에 맞닥뜨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영롱한 아가씨의 목소리에 린델은 그 자리에서 멈춰서다 못해 잽싸게 몸을 웅크렸다. 오래된 성의 역사만큼이나 나이를 같이한 수목이 즐비한 중정에서 몸을 숨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수북한 덤불 뒤는 밀회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알렉스의 꼬임에 따라 나섰다가 본의 아니게 낯 뜨거운 장면을 본 기억이 있던 린델은 숨소리조차 삼키며 도망칠 길을 찾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몰라서 물어? 조심하라고.”

“모르겠는데? 뭘 조심하라는 거야?”

“알잖아. 지금 네 모습은 꼴사나워.”

린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가 오고갔다. 영롱한 아가씨의 목소리의 상대는 역시나 여성이었지만 린델에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들의 대화는 린델이 숨은 관목 덤불 바로 옆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잘못했다가는 들키기 딱 좋았다.

“알기는 뭘 알아. 캐롤 언니는 그게 단점이야. 뭐가 꼴사나운지 제대로 말을 해야 알지. 내 머리스타일이 꼴사나워? 아니면 옷차림이? 아니면 보석이?”

“에드리아나.”

“그거 알아? 캐롤 언니는 말문이 막히면 꼭 풀네임으로 부르더라.”

에드리아나의 빈정거림이 장난이 아니었다. 덕분에 린델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한 명은 오늘 낮에 알렉스를 에스코트해서 사라진 에드리아나였고, 또 한 명은 그녀의 이종사촌인 케롤라인이었다.

“꼭 내 입으로 말해야 알아듣겠니? 네 반짝이는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행실이 꼴사납다고. 정숙한 숙녀라면 너처럼 행동하지 않아. 알렉스 경에게 꼬리치는 모습이 얼마나 볼썽사나운 줄 알아?”

“어머.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끌고 나온 거야? 그러지 말고 차라리 질투난다고 솔직하게 말해. 꼴사납다는 둥, 볼썽사납다는 둥, 꼬투리 잡지 말고.”

“누가 질투한다는 거야?”

“내가 모를 줄 알고? 언니도 알렉스 경에게 마음이 있잖아. 안 그런 척하지만 다 티가 난다고.”

“무, 무슨…….”

“왜? 정곡을 찔렀어?”

에드리아나의 물음에 본의 아니게 대화를 엿듣게 된 린델은 상황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에드리아나가 알렉스를 노리고 있는 것은 낮에 있었던 일만 보더라도 눈에 빤히 보였다. 그리고 캐롤라인 역시 알렉스를 마음에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에드리아나의 지적에 캐롤라인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꿈 깨. 알렉스 경이 자기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노처녀에게 관심가질 이유가 뭐가 있겠어? 더 어리고 더 예쁜 내가 있는데. 안 그래?”

“너!”

“캐롤 언니야 말로 꼴사나워. 아무리 몸이 달았어도 넘볼 사람을 넘봐야지. 그렇게 결혼을 하고 싶으면 오매불망 언니를 따라다니는 워딘 경이랑 하든가. 아, 못생겨서 싫다고 했지? 얼굴 밝히는 건 여전해.”

정도를 넘은 에드리아나의 도발이 끝나자마자 심상치 않은 소리가 울렸다.

찰싹.

덤불 속에 숨어 있던 린델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정황상으로는 캐롤라인이 에드리아나의 뺨을 때린 것 같았다.

린델은 캐롤라인을 몇 번 만나지 못했지만 우아한 아가씨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리 성품이 착해도 한참 어린 사촌 여동생에게서 모욕을 들었으니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라고 린델은 나름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린델의 단순한 생각과 달리 그들의 사정은 좀 더 복잡했다. 특히 에드리아나는 이종사촌 언니인 캐롤라인에게 앙심이 깊었다. 가문의 격은 이쪽이 훨씬 높지만 가세가 기운 탓에 사사건건 무시를 당해왔다. 그간에 꼭꼭 숨겨두었던 서러움과 분노가 이번 기회에 화려하게 폭발하고 말았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시네. 그러니까 파혼이나 당하지. 하인을 채찍질하는 게 취미인건 워든 경이 알아? 아? 아는 모양이네? 그러니까 쫓아다녀도 싫다는 소리를 못 하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흥. 내가 꼴불견이든 말든 언니 걱정이나 해.”

마지막까지 독설을 내뱉은 에드리아나의 발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퍽.

제발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린델은 불길한 소리에 몸을 굳혔다. 무겁고 둔탁한 음은 뺨을 쳐서는 절대 날 수 없었다.

“아가씨!”

한껏 급박한 날카로운 남자 목소리가 끼어드는 것과 동시에 사람 그림자가 린델 앞으로 쓰러졌다. 꽃으로 장식한 뒷머리의 주인이 에드리아나라는 것을 린델은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처음 보는 남자가 에드리아나의 옆에 앉았다.

“숨을 쉬지 않아.”

린델은 자신이 무엇을 보고 듣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리가 얼어붙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에드리아나 옆으로 걸어오는 캐롤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묵직한 돌멩이가 들려 있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깨닫는 순간에 캐롤라인과 눈이 마주쳤다.

밤의 어둠속이지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똑똑히 보였다. 왜 네가 여기에 있냐는 얼굴이었다.

“너…….”

캐롤라인이 손으로 가리키자 린델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에 이름 모를 남자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시신 하나와 범인, 그리고 목격자 둘.

처참하고도 기이한 현장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쪼그려 앉아 있던 린델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꺄아아아!!”

손에서 돌멩이를 떨어트린 캐롤라인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에드나가, 에드나가 죽었어!! 린델이 에드나를 죽였어!!

“네?”

“린델이 죽였어. 워든 경. 그놈을 잡아요. 어서. 어서 잡아요. 도망가기 전에!”

캐롤라인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린델은 자신이 범인으로 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기가 막히면서도 어쩌면 누명을 뒤집어쓸 수 있다는 가능성에 심장이 서늘해졌다.

“내가 아니에요! 윽!”

자신이 아니라고 항변하던 린델은 어느새 다가온 워든의 발길질에 턱이 돌아갈 정도로 얻어맞았다. 몸을 일으킬 새도 없이 엄청난 힘에 의해 바닥에 내팽겨졌다. 등 뒤로 커다란 발이 린델을 내리 눌렀다.

“움직이지 마.”

워든의 사나운 경고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린델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발길질의 충격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만 캐롤라인의 비명만이 날카롭게 린델의 귀를 파고들었다.

“누가, 누가 도와줘요. 린델이 에드나를 죽였어요!”

줄에 묶인 채 차가운 바닥에 꿇어앉은 린델의 모습은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걷어 채인 턱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입에는 재갈이 단단히 물려져 있었으며, 언제나 깔끔하던 종사복은 제멋대로 구겨진 채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반짝이던 금발도 엉망으로 헝클어진 채였다.

평소 린델을 아는 사람이라면 혀를 차고도 남을 모양새였다. 하지만 린델은 제 모습이 어떤지 알지 못했고,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린델은 자신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영주성 지하 심문실이었다. 범인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미칠 것 같았다. 항변의 기회도 없이 그대로 지하 감옥에 갇혔다. 캐롤라인의 비명 소리에 모여든 사람들은 린델이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너무나 억울해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지만 경고망동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곳에 모인 이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델라우드 백작과 그의 아들인 루션과 알렉스, 캐롤라인의 아버지인 필로나 남작, 죽은 에드리아나의 아버지인 케손 백작, 그리고 잉그란까지 한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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