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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화 (5/137)

-05화-

차가운 지하 심문실을 밝히는 불꽃 아래 드러난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그래도 린델은 잉그란에게서 안타까움을 읽어냈다. 미칠 것 같았다. 잉그란에게 살인범이라는 의심을 받다니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린델의 예감을 옳았다. 주민들에게 존경받는 델라우드 영주인 백작은 완고한 전통주의자였다. 과거와 달리 영주가 사법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진위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잉그란 사제의 간곡한 부탁도 한 몫 했다.

“재갈을 풀어줘라.”

델라우드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린델의 입을 막고 있던 재갈을 풀었다.

“린델. 에드리아나를 살해한 것을 시인하느냐?”

“아니요.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린델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당당하려고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다.

“현장에서 붙잡히고도 발뺌을 하다니. 이런 놈의 이야기는 들어볼 것도 없습니다.”

린델의 대답에 필로나 남작이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델라우드 백작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필로나 남작. 나는 들을 겁니다. 린델,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이야기해라. 빠짐없이 말이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저는 그때……, 그러니까 신전으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시녀장님께서 소화제가 필요하다고 하셨거든요. 과식을 하신 손님이 많다고요.”

결백을 밝힐 기회가 왔다는 것을 눈치챈 린델은 신중히 말을 골랐다. 신전까지 가는데 동쪽 샛문이 빠르다는 것과 중정의 옆길을 걷다가 숨은 이유, 두 아가씨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는 것까지 자세하게 말했다.

“캐롤라인 아가씨께서 에드리아나 아가씨를 보고 꼴사납다고 하셨습니다. 정숙한 아가씨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알렉스 경에게 꼬리 치는 모양새가 볼썽사납다고……. 그러자 에드리아나 아가씨께서는 질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언니가 알렉스 경을 좋아하는 거 안다고. 하지만 알렉스 경은 언니를 좋아하지 않고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 그러셨습니다.”

“이런 악독한 놈을 보았나.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 에드리아나의 반지를 줍고도 돌려주지 않으려고 했잖아. 재물에 욕심이 나서 그 애를 죽여놓고는 무슨 괴변이냐?”

필로나 남작의 폭발적인 외침에 린델은 케롤라인이 어떻게 자신을 옭아맸는지 알아차렸다. 반지 때문에 자신이 사람을 죽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닙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저는 관목에 숨어 두 분의 싸움을 들었을 뿐입니다. 고인이신 에드리아나 아가씨께 죄송한 말이지만, 아가씨께서 험한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언니야 말로 꼴사납다고, 넘볼 걸 넘보라고, 남자 얼굴 따진다고……. 그러자 캐롤라인 아가씨께서 에드리아나 아가씨의 뺨을 치셨습니다. 직접 보이는 않았지만 뺨을 때리는 소리가 울려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에드리아나 아가씨가 그러니까 파혼을 당하는 거라고 하셨어요. 취미로, 취미로 하인을 채찍질한다고…….”

“이 미친놈이. 감히 내 딸을 모욕해?”

폭발한 필로나 남작이 덤벼들려고 한 것을 하인들이 필사적으로 말렸다. 린델은 두려움을 이겨내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 다음에 퍽 하는 소리가 나고 에드리아나 아가씨가 제 앞으로 쓰러졌습니다. 워든 경께서 에드리아나 아가씨가 숨을 쉬지 않는다고 하셨고, 그때 캐롤라인 아가씨께서 제가 관목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보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캐롤라인 아가씨 손에 돌멩이가 들려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너무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하나 황망해 하고 있는데 캐롤라인 아가씨께서 비명을 지르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에드리아나 아가씨를 죽였다고 하셨어요.”

“하? 이번에는 내 딸을 범인라고?!”

“젯타스 신께 맹세코 진실입니다.”

“살인범 주제에 어디서 신의 이름을 들먹이느냐!!”

린델이 진실을 말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필로나 남작의 주먹질이었다. 아까 다친 곳을 다시 얻어맞은 린델은 끔찍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이 자리에서 린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저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굴렸다. 그들 중에서 가장 애가 타는 것은 잉그란이었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한 것은 알렉스였다.

알렉스는 린델이 그깟 반지를 훔치려고 하다가 에드리아나를 죽였다는 캐롤라인의 말을 먼지 한 톨만큼도 믿지 않았다. 에드리아나의 말대로 캐롤라인은 하인에게 채찍질하는 것을 들켜서 파혼당한 적이 있었다. 가장 치욕스러워하는 일을 지적당했으니 캐롤라인이 이성을 잃고 덤빈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린델이 결백하다고 해도 상황이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곳에 보인 이들의 이해관계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특히 딸을 잃은 케손 백작이 그러했다. 그의 양모 사업은 필로나 남작에게 종속되어 있다시피 했다. 우유부단한 케손 백작이 파산을 각오하고 딸을 죽인 진범을 찾으려고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옇게 질린 얼굴로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알렉스는 아버지를 보았다. 로벅의 영주인 아버지는 가장 영향력이 있고 발언권도 컸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린델이 무사히 재판받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존경 받는 사제인 잉그란 역시 재판의 증인으로 린델의 구명 활동을 하는 게 한계였다.

그래 봤자 소용없었다. 상대는 귀족이었다. 심지어 강력한 증인까지 있었다. 워든은 캐롤라인을 숭배했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죽는 시늉도 하는 자였다. 린델을 살인자로 만드는 거짓말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욕심 많고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필로나 남작이었다. 그는 이번 사건을 덮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게 분명했다. 린델을 살려 재판을 받게 할 리 없었다.

모든 것이 린델에게 불리했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착하디착한 에드리아나가 내 딸에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했을 리 없다. 누가 그걸 믿겠느냐? 응? 네놈이 아무리 거짓을 지어내어도 우리는 다 안다. 안 그렇습니까?!”

잔뜩 흥분한 필로나 남작이 모두의 동의를 구했다. 어색해지려는 침묵을 막은 것은 델라우드 백작이었다.

“서로의 주장이 다르니 재판을 받아야겠지요.”

“델라우드 백작. 저놈을 편드는 겁니까? 저 놈이 살인자입니다.”

이번에도 필로나 남작이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전 아닙니다.”

“닥쳐!”

절박하게 결백을 외치는 린델을 걷어찬 것은 알렉스였다. 엄청난 충격에 린델은 심문실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알렉스는 그런 린델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다시 무릎을 꿇렸다.

“네놈에게 실망했다. 죄를 짓고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다니.”

“알렉스 도련님…….”

“이 녀석이 더 이상 입을 놀리지 못하게 재갈을 물려. 어서.”

알렉스의 강한 어조에 하인들이 린델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배를 얻어맞은 린델은 속이 울렁거리는 와중에서도 알렉스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의 이야기는 들어볼 것도 없습니다.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는 두 사람만 있다면 재판을 해볼 만도 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한 증인도 있지 않습니까?”

“맞네. 증인이 있어. 워든 경이 증언이야.”

알렉스의 말에 맞장구를 친 것은 필로나 남작이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명확한데 재판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운 나쁘게 순회재판관이라도 만나게 되면 로벅에 살인범이 있다는 걸 동네방네 알리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로벅의 사람들이 그런 부끄러운 꼴을 당하게 할 순 없지요. 아버지. 로벅의 영주이신 당신께서는 애석하게도 이제 죄인을 벌 줄 수는 없으시지만, 신의 뜻을 물어보실 수는 있으십니다. 저놈이 자신의 결백을 신께 맹세한다니, 돌라낭의 여신께 죄인을 맡기면 억울하지 않을 겁니다.”

돌라낭 여신이라는 말에 쓰러져 있던 린델은 눈을 크게 떴다. 복수의 여신인 돌라낭에게 죄인을 맡긴다는 것은 호수에 빠트린다는 의미였다. 일명 여신의 심판이라고 했다. 호수에 빠진 죄인이 결백하기에 돌라낭 여신이 그를 건져 올리셨다는 신화에 따른 처형 방법이었다. 영주의 사법권을 제한한 제국에서는 금지된 것이었지만, 법률이 느슨한 곳에서는 암암리에 일어나고 있었다. 

린델은 돌라낭 여신께 자신의 죄를 청하자고 한 사람이 알렉스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건 호수에 빠져 죽으라는 소리였다.

일렁이는 붉은 횃불에 비친 알렉스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아버지? 재판보다는 이게 빠르고 조용하겠지요.”

“그래 그게 좋겠지. 어떻습니까? 필로나 남작, 케손 백작.”

저마다의 잇속을 계산한 두 사람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잉그란 사제님. 사제님도 동의하십니까?”

델라우드 백작이 마지막으로 잉그란에게 물었다. 린델은 간절한 눈빛으로 잉그란을 보았다. 제발 재판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잉그란이 린델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백작님의 현명한 판단에 감사드립니다.”

린델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의심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델라우드 백작의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린델의 눈을 가리고 커다란 마대자루를 뒤집어 씌었다. 린델은 발버둥을 치려고 했지만 꽁꽁 묶인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건장한 하인이 린델을 들쳐 매고 영주성 뒤편에 있는 호수로 향했다. 오래된 산골 마을인 로벅에는 검은 바위라고 이름 붙여진 죄인을 호수에 내던지는 장소가 따로 있었다. 

깊은 밤, 십수 명의 발길이 검은 바위로 향했다. 버둥거리는 마대 자루를 내던진 것은 알렉스였다.

풍덩.

달빛을 품은 검은 수면에 거친 파문이 일었다. 비밀을 삼킨 호수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풍덩.

예상보다 강력한 충격에 린델을 덮쳤다. 몸이 아래로 가라앉는 것과 동시에 차디찬 물로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린델은 발버둥치지 않았다.

‘물에 빠지면 가만히 있어.’

억울함과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는 와중에 알렉스의 속삭임을 똑똑히 들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린델은 알렉스를 믿어보기로 했다.

젯타스시여.

린델을 신을 찾으며 운명에 자신을 내맡겼다. 잔잔한 호수의 표면과 달리 내부의 물살은 이상하게도 세찼다. 물살에 휩쓸려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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