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화-
숨이 막히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시간 동안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리고 곧 몸이 위로 떠올랐다.
수면 위에 떠올라 얕은 물가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눈이 가려지고, 재갈과 줄에 묶인 채, 마대 자루에 싸인 린델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기다렸다.
초조하게 시간이 흘렀다. 얼굴이 물에 빠져 있었지만 숨 쉬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물이 차가웠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얼어붙으면서 정신이 가물거릴 때쯤에야 사람 소리가 났다.
“린델. 잠시만 기다려.”
알렉스의 목소리였다. 린델이 뭍으로 올라와 자유를 되찾은 것은 금방이었다. 눈으로 알렉스를 확인한 린델은 반가움과 의아함에 사로잡혔다.
주위를 둘러봐도 여긴 호수가 아니었다. 린델은 로벅의 곳곳을 알고 있었다. 달이 구름에 숨어 주위가 어둑어둑했지만 이곳은 호수 건너편에 있는 샘터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 어떻게, 어떻게 하신 거예요?”
재갈이 풀리자마자 린델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부터 했다. 린델을 구속하던 밧줄을 끊던 알렉스가 쓴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에서 그게 궁금해?”
“네.”
“옷부터 갈아입어. 얼어 죽겠다.”
린델은 알렉스가 내민 옷을 순순히 갈아입었다. 그사이에 알렉스가 말을 이었다.
“검은 바위 아래의 물살이 이곳으로 이어지는 것은 우리 가문의 비밀이지. 잘만 던지면 목숨을 건질 수 있어.”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었어요.”
“그건 네 손가락에 있는 반지 덕분이고. 그거 끼우느라 연기 좀 했어.”
린델은 셔츠를 입다 말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손의 검지에 파란색 보석의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제야 알렉스가 왜 자신을 걷어차고 멱살을 잡았는지 알 것 같았다.
“얼른 움직여. 시간이 없어.”
“알렉스 도련님?”
“잘 들어. 넌 쫓길 거야. 아침이 되면 시체를 찾으러 호수를 뒤질 텐데, 넌 지금 여기에 있잖아. 필로나 남작은 용의주도한 자야. 제 딸의 허물을 덮기 위해 네가 죽었는지 확실하게 확인하려고 할 거야.”
“재판을…… 재판을 받으면…….”
“왜 잉그란 사제님이 여신의 심판에 동의하신 줄 알아? 재판 따위는 열리지도 않을 거야. 간수 하나 매수하면 그만이니까.”
냉정한 알렉스의 설명에 린델은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이해했다. 살인 재판은 로벅이 아니라 행정관이 있는 안호크에서 열렸고, 구금 장소도 당연히 안호크였다. 필로나 남작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손을 쓸 수 있었다.
소름이 돋는 것은 단지 젖은 몸이 식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렇게나 사람의 목숨이 하찮게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 무서웠다. 제 안위를 위해 사람 목숨 하나쯤은 아무렇지 않게 죽음으로 밀어 넣는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산을 타고 캇셀트움으로 가. 그곳에서는 마차를 타고 이동해서 엑크타로 가는 거야. 엑크타가 어딘지 알지? 남부가 위험하긴 하지만 엑크타는 황제군이 점령하고 있는 도시라서 안전해. 거기서 만나자.”
“?!”
“휴가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엑크타를 들릴 거야. 거기서 만나서 같이 롯송으로 가자. 롯송이 내 임지라는 건 알지? 롯송은 남부 최대의 무역도시야. 별별 사람들이 다 모여들어. 그러니까 너 하나쯤 숨는 건 일도 아냐. 자, 여기. 신분패. 내 위장 신분패인데 정식으로 만든 거라서 문제없이 쓸 수 있어. 이름은 테오도르이니까 헷갈리지 말고. 열여덟 살이라고 되어 있지만 넌 어려 보이니까 들킬 염려는 없을 거야. 그래도 머리는 눈에 뛰니까 염색은 꼭 해야 해. 린델? 내 말 듣고 있어?”
듣고는 있었다. 이해도 했다. 그래서 더 막막했다.
“이제…… 이렇게 떠나면 이제 로벅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거죠?”
가장 끔찍한 현실을 확인하려는 린델의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떨렸다 알렉스가 인상을 썼다.
“그래.”
“그럴 수는 없어요. 결백을 주장하고 재판을 받겠어요.”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재판 따윈 못 받는다고.”
“그래도 상관없어요. 비겁한 도망자로 살 바에야, 모두에게 결백을 알리고 죽겠어요.”
린델은 오롯이 진심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은 15년의 시간과 함께 로벅에 있었다. 그런데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도망쳐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모두에게 억울함을 토로할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았다.
달빛에 드러난 린델의 얼굴은 결의에 차다 못해 비장했다.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동조할 뻔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린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누구 좋으라고 죽어준단 말이야. 네가 결백을 알리든 말든, 사람들은 널 살인자로 기억할 거야. 그리고 곧 잊어버리겠지. 정말 그래도 괜찮아? 난 안 괜찮아.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아야지. 그게 최선이야.”
“하지만…… 이건 너무…….”
너무 억울했다. 화가 났다. 살아남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울컥하고 치솟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타오르는 분노와 원통함에 눈이 뜨거워졌다. 린델은 울지 않으려고 손으로 눈을 눌렀다.
정말 이럴 수는 없었다.
“도련님의 말씀대로 하겠어요. 살아남아서 결백을 밝히겠습니다.”
린델은 무너지려는 마음을 추슬렀다. 결백을 밝히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증인도 증거도 없었다. 막강한 힘을 가진 귀족을 상대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이게 최선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살려준 알렉스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결백을 밝히겠다니. 좋아. 그런 목표라도 있어야지. 이거 받아. 네 짐이야. 이거 챙겨 오느라 늦었어. 거기에 잉그란 사제님이 추천장도 들어 있어.”
“사제님은, 잉그란 사제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운명이란 제멋대로라고,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어.”
“사제님다우시네요.”
오늘 아침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고스란히 현실이 되어 닥쳤다. 린델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웃었다.
운명이란 정말 제멋대로였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사제가 되어 귀향하기를 꿈꿨었는데, 이제는 살인을 했다는 누명을 쓰고 도망치게 생겼다. 운명이라면 너무나도 가혹했다.
“이거 받고, 반지를 돌려줘. 그게 그래 보여도 가문의 보물이거든. 아버지께 돌려드려야지.”
얼떨결에 알렉스가 내민 묵직한 돈주머니를 받아든 린델은 반지를 건네주다가 놀라고 말았다.
“설마…… 영주님께서도 알고 계신 거예요?”
“내가 뭘 하려고 하는지는 눈치채셨겠지.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아니까 모르는 척해 주신 거고.”
“영주님께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 전해주세요. 알렉스 도련님도 너무 고맙습니다.”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이었다.
“그래. 아버지도 네가 무사하기를 바랄 거야. 자,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목적지는 엑크다야. 엑크다에서 푸른 기와 여관에서 기다려. 머리는 염색을 꼭 하고. 염색약은 짐 안에 들어 있어. 돈은 한꺼번에 가지고 다니지 마. 지갑이랑, 가방에, 그리고 속주머니 안에 분산시켜 놔.”
알렉스가 마지막까지 주의할 점을 짚어주었다. 혼자서 긴 여행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 낸 린델은 황망한 와중에도 그의 말을 새겨들었다.
이별은 곧이었다.
나중에 보자며 인사한 두 사람은 눈물 없이 헤어졌다. 알렉스는 마을 쪽으로 사라지고, 린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산으로 향했다. 약초를 채집하기 위해 산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린델은 어렵지 않게 달밤의 산길을 올랐다.
한참 동안 묵묵히 산을 오르던 린델은 시야가 트인 능선에 서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이지러진 달빛에 드러난 로벅의 전경은 눈물에 번져 흐릿하기만 했다.
6월의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초여름의 싱그러움을 품은 바람과 함께 마차가 광대한 라만 숲을 내달렸다. 동서로 넓게 펼쳐진 라만 숲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황제의 길은 제국의 공도(公道)였다.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8인승 역마차는 사람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 머리를 갈색으로 물들인 린델이 있었다. 운 좋게 창가 자리에 앉았지만 린델은 숲의 풍경이 아닌 제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로벅을 떠난 지 4일째. 곤두선 신경이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첫째 날은 하루 종일 산을 탔고, 둘째 날부터는 하루 종일 마차를 타고 이동만 했다.
추적자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성벽에 붙은 지명수배 전단지에는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신분을 숨기고 도망친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정말 말라 죽을지도 몰랐다.
잉그란 사제님. 새로운 경험이 힘드네요.
린델은 잉그란을 찾으며 작게 한숨을 삼켰다. 침울한 생각만 거듭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15년 동안 소중히 쌓아올린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다는 것을 곱씹을 때마다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린델은 낯선 도시를 헤매는 악몽을 꾸곤 했다. 기억을 잃은 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에서 깰까 봐 벌벌 떨 때도 있었다.
그래서 린델은 로벅을 사랑했다. 신전은 집이었고, 신전 식구들과 마을 주민들은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어디에서 누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고 있었다. 길을 걸어가면 모두들 린델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또다시 기억을 잃는다고 해도 로벅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 줄 사람이 잔뜩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기억을 껴안고 낯선 곳을 헤매야 했다. 마치 눈을 뜨고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엉덩짝에 불이 나겠구만. 마부 양반. 천천히 갑시다. 천천히!”
마차 여행에 관한 오래된 농담을 커다랗게 외치는 중년의 남성의 음성에 린델은 정신을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