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화-
“이보시오. 천천히 가자고!”
중년 남성이 열린 창으로 얼굴을 내밀고 마부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마차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것 참. 안 들리나. 길이 너무 험하지 않소? 황제의 길이 이렇게나 엉망이라니. 쯧쯧.”
“어르신께서는 여기가 처음인가 보군요. 내전으로 길이 엉망이 된 지는 오랩니다. 보수도 늦어져서 이지경이지요.”
중년 남성의 말을 받은 것은 맞은편에 앉은 젊은 남성이었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황제의 길은 제국의 핏줄이나 다름없었다. 포석으로 반듯하게 정비된 황제의 길은 신속하고도 안전한 여행을 상징했다. 그러나 최근에 내전을 치른 남부의 길은 그 사정이 달랐다.
북동부에서 남부로 종단하던 린델은 이곳에서 유독 마차가 덜컹거린다는 것을 체감하고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오랜만에 누이네 집에 방문하는 길인데, 남부 사정이 말이 아닌 모양이구만.”
“차차 나아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라만 숲은 사정이 있습니다. 도적떼가 여행자들을 습격하고 있거든요.”
“허, 황제의 길에 도적떼가? 레인저들은 어쩌고?”
“제 사촌 형님이 레인저인데, 라만 숲에 숨어든 반역의 잔당들이 한 둘이 아니랍니다.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대요. 마부들이 속력을 내고 있는 것도, 가능한 빨리 숲을 빠져나가려고 그러는 겁니다.”
“아이고. 동부에는 몬스터가 출몰하고 남부는 도적이라니. 이런 말세가 있나.”
두 사람의 대화에 마차 안의 긴장감이 한순간에 치솟았다. 역마차의 악몽은 울퉁불퉁한 길이 아니라 금품을 노리는 도적떼였다. 운이 나쁘면 금품만이 아니라 생명까지 빼앗길 수 있었다.
린델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젊은 남자의 말이 거짓이 아닌 듯 마차의 속력은 엄청났다. 숲의 나무들이 뒤쪽으로 휙휙 지나쳤다.
쾅쾅.
로벅과는 수형이 다른 나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린델이 몸을 뒤로 물리는 순간에 창문에 마부의 얼굴이 쑥하고 나타났다.
“도적들이 나타났소. 멈추지 않고 돌파할 테니 아무거나 꼭 잡고 계시오.”
“뭐라고?!”
누군가가 소리쳤지만 마부는 대답하지 않고 사라졌다. 마차 안의 사람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마부의 외침이 거짓이 아닌 듯 마차의 속도는 더 빨라졌다.
린델을 비롯한 마차 안의 손님들은 알 수 없었지만, 도적들은 길 한가운데 통나무로 막아두고는 역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그들의 존재를 파악한 마부는 강행돌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최근에 나타나는 도적들은 말과 금품을 빼앗는 것은 물론이고 목격자를 남겨두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마차째로 사라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마부는 위험을 감수하고 길을 가로막은 통나무를 넘을 생각이었다.
“멈춰!!”
마부의 계획을 눈치챈 도적들이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지만 마차의 속력은 떨어지지 않았다.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한 도적들의 반응이 느렸다. 마차가 한참 다가와서야 부랴부랴 총과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탕. 탕. 탕.
도적들의 손에 들린 소총들이 불길을 내뿜었다. 총알은 가장 값비싼 말을 피해 마부와 마차를 향해 날아갔다. 바깥의 상황을 모르는 마차 안의 사람들은 천둥과 같은 천둥과 같은 총소리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가장 운이 나쁜 사람은 마부였다. 어깨와 복부에 두 발의 총알이 꽂힌 마부는 통나무를 뛰어넘은 후, 고삐를 쥔 채 기절하고 말았다. 두 번째로 운이 나쁜 사람은 바로 린델이었다. 마차 바퀴가 통나무에 부딪혀 높이 튕겨 오르는 바람에 머리를 창틀에 찧은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등 뒤에서 날아든 총알이 린델의 왼쪽 어깨를 박살냈다.
“으윽.”
작렬하는 고통에 린델은 비명을 삼켰다.
“마부가 쓰러졌다.”
“쫓아.”
도적들의 사나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린델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부를 잃은 말들은 폭주를 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멈추게 되어 있었다. 도적들이 쫓아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왜 이렇게도 재수가 없을까.
린델은 찌를 듯한 고통을 참으며 이를 악 물었다. 계속된 불운은 운명이라고 해도 너무 고약했다. 상처가 깊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적들에 죽기 전에 과다출혈로 죽을 확률이 더 높았다.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물어도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대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린델은 버텨냈다. 상심해 있을 잉그란에게 죽음의 소식을 전할 수는 없었다.
어지러움에 오락가락하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던 린델은 말들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멈춰 서는 것을 느꼈다.
“살았다. 살았어!”
“도적들이 도망간다!”
총알이 빗겨간 역마차 손님들이 저마다 소리쳤다. 안도와 환희의 외침이었다. 제 살기에 바쁜 사람들은 린델이 다쳤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린델은 흐릿한 눈으로 소란스러운 밖을 보았다. 도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무장을 한 채 말을 타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던 린델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힘겹게 마차 문을 열었다. 더 이상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시야에 불타는 붉은 빛이 어른거렸다.
“하아.”
낮은 한숨 소리가 짐승의 으르렁거림과 닮았다고 생각하며 린델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할엔라드 제국이 황제의 길에 쏟는 열정은 대단했다. 도로의 폭과, 길을 만들 때 필요한 재료, 건설의 주체, 관리 방법 등등을 법으로 정해놓을 정도였다.
돌로 포장된 길은 관리가 중요했다. 황제의 길은 진창이 없는 반듯한 포석이 자랑이었다. 하지만 라만 숲의 길은 무참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엉망이었다. 포석은 대부분 깨져 있었고, 잡초는 무성했으며, 길 곳곳은 움푹 패인데다가, 유실된 곳도 여럿이었다.
카시어스는 한마디로 이 모든 것을 정리했다.
“엉망이로군.”
말을 타고 라만 숲을 가로지르던 카시어스는 예상보다 심각한 상태에 혀를 찼다. 동부와 남부의 경계인 라만 숲은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그리고 라만 숲을 최단거리로 통과할 수 있는 황제의 길은 동부와 남부를 오가는 상단들의 주요 행로였다. 동부와 남부의 상단주들의 원성이 담긴 서한이 황궁까지 닿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도둑놈이 많아서 그렇지요. 카시어스 경.”
카시어스는 옆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을 하는 세투아는 노회한 마법사였다. 모든 마법사가 그렇듯 충직한 황제의 종인 그는 황궁의 중심에서 부대꼈고, 그래서 반쯤 정치인이나 다름없었다.
세투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내전이 마무리된 지 1년. 제국은 황폐화된 남부를 위해 예산을 쏟아부었다. 그중에는 황제의 길을 정상화하는 비용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도 이 지경이라면 중간에서 돈을 착복한 도둑놈이 있을 터였다.
“잡아야 도둑놈들이 한둘이 아니라니. 이거 재미있겠어.”
짐짓 흥겨운 듯한 웃는 카시어스를 보며 세투아는 도둑놈들에게 애도를 보냈다. 오랫동안 카시어스를 모셔온 세투아는 주인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대륙의 절반을 차지한 할엔라드 제국의 황제이신 카시어스는 무능한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라만 숲의 황도(皇道)가 엉망이라는 것을 직접 확인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가루가 되도록 까인 재상이 관련자들을 족치는 일이었다.
젊고 아름다운 황제께서는 신하들을 굴리는 것을 너무 좋아하셨다.
“확인할 것은 다 확인하셨으니 이제 황궁으로 돌아가시는 건 어떠하십니까?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세투아는 조심스럽게 귀환을 건의했다. 카시어스는 가장 높은 권좌를 차지한 황제답지 않게 종종 황궁을 비우고 잠행하기를 즐겼다. 문서에만 적혀 있는 문제들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잠행은 내전이 끝난 남부의 재건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탓에 꽤나 시간을 잡아먹었다. 아무리 카시어스가 황제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관원들을 휘어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황궁을 오랫동안 비우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스물아홉 살. 젊고 아름다운 황제에게는 충직한 신하만큼이나 적도 많았다. 주인을 걱정하는 세투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시어스가 가볍게 농을 던졌다.
“우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슬슬 힘에 부치나 보지?”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경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슬슬 은퇴할 때가 아닙니까. 그러다보니 오랜 여행에 관절이 삐꺽거립니다.”
황제의 수석 마법사로 온갖 곳에 끌려 다닌 세투아는 잠행에 이골이 났다. 그러나 한 번 박살났던 무릎 관절이 나쁜 것은 사실이었고 이제 현장을 따라다니기에는 무리였다. 은근슬쩍 은퇴를 언급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야유였다.
“이런, 이제 겨우 쉰을 넘겼으면서 나이를 따지다니. 쯧. 충신을 위해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겠군. 그 전에 사악하다는 도적떼들이 나타나주지 않으려나.”
얼른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연약함을 강조하던 세투아는 도적떼들이 나타나기를 바란다며 흥얼거리는 카시어스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살아 있는 대리석상처럼 아름다운 황제는 생긴 것과 달리 호전적인 성격이었다.
그들의 일행은 카시어스와 세투아를 포함하고도 4명밖에 되지 않았다. 마법사인 세투아야 전력에 얼마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2명의 수행 시종의 실제 신분은 안티 카발리에(Anti Ccavalier)였기에 전투 능력은 발군이었다. 무엇보다 카시어스 본인이 일당백의 실력을 자랑했다. 도적떼 수십 명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한 번에 때려잡을 수 있었다.
“카시어스 경을 대면해야 하는 도적떼들이 불쌍―.”
적당히 아부를 하던 세투아는 카시어스가 경계를 하라는 수신호를 보내며 말을 멈춰 세우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2명의 수행 시종들 역시 긴장하며 섰다.
“카시어스 경.”
“쉿. 뭔가 온다.”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준 카시어스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길게 뻗은 숲의 길은 오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초여름의 숲은 특이할 게 하나 없었다. 투시원근법으로 정직하게 그린 풍경화와 같이 길 양쪽에 늘어선 나무들은 초록빛이었다. 멀리서 새 소리가 들려왔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서걱거렸다. 숲의 흙과 나무 냄새가 사방에 가득했다.
조금 전과 다른 없는 풍경에서 카시어스는 이질감을 느꼈다. 정확히는 소실점 너머 길 저편에서 무엇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요기나 마력은 아니었다. 사악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특별한 어떤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