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화-
카시어스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인상을 썼다. 폐허를 헤매던 거대 몬스터를 대면했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탕. 탕. 탕.
고요 속에서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카시어스는 지체 없이 박차를 차고는 말을 몰았다. 달려갈수록 술렁임이 더욱 심해졌다.
얼마 달라지 않아 제멋대로 질주하는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마차 속도는 심상치 않았고, 마부는 옆으로 쓰러져 있는데다가, 꽁무니에는 도적떼를 줄줄이 달고 있었다. 그나마 눈치 빠른 도적떼들은 이쪽을 확인하고는 급하게 방향을 바꿔 도망쳤다.
“운이 좋았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린 카시어스는 도적들을 뒤쫓지 않았다. 대신에 쇄도하는 마차와 거리를 가늠하다가 단숨에 마차 지붕으로 뛰어 올랐다. 날랜 고양이처럼 마차 지붕 위에 착지한 카시어스는 기절한 마부의 자리를 차지하고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속력이 붙은 마차가 멈춰 서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카시어스 경.”
“마부를 치료해.”
뒤쫓아 온 세투아가 불렀지만 카시어스는 돌아보지도 않고 마부석에서 내렸다. 술렁거림은 가라않기는커녕 더욱 심해졌다.
그것은 분명 마차 안에 있었다. 카시어스는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낸 괴물들의 존재를 떠올렸다.
신화 속의 괴물이란 말이지.
카시어스는 괴물의 낯짝을 보기 위해 마차에 다가섰다. 그 순간 예고도 없이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하늘을 닮은 색의 눈과 마주친 것은 찰나였다.
“하아.”
한숨을 다 내쉬기도 전에 카시어스의 품 안에 피투성이가 된 청년이 굴러 떨어졌다. 카시어스는 손안에 받아든 청년의 창백한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나서야 자신이 무엇을 찾았는지 깨달았다.
빌어먹을 신의, 선물이었다.
어디선가 새가 울었다.
깊은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던 린델의 귓가를 자극하는 것은 지저귀는 새소리였다. 그 다음은 향기였다. 겨울꽃이 사방에 피기라도 한 듯, 시원하고 청량한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린델은 머리맡에 걸어두었던 말린 꽃 주머니를 떠올렸다. 그러나 말린 꽃에서는 이렇게 싱그러운 향이 나지 않았다.
뭐지?
잠에 취해있던 의식이 한 꺼풀씩 벗겨지면서 의문이 일었다. 산골 마을에서 자란 린델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색과 향기를 구분했다. 여름은 달콤하고 농익은 꽃의 향기와 물기를 머금은 짙은 수목의 향이 어우러졌다.
로벅의 여름은 아름다웠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던 린델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단번에 떠올렸다. 살인 누명을 쓰고 도망치다가 도적떼가 쏜 총에 맞았다, 어깨가 박살났었다.
“헉!”
물벼락을 맞은 듯 정신을 차린 린델은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눈을 떴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낯선 곳에 누워있다는 것을 가까스로 알아차렸다.
“깨셨습니까?”
정중한 목소리에 린델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바로 옆에 처음 보는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계셔서 일부러 향을 피워 깨어나게 했습니다. 머리가 어지러울 텐데 더 누워 계십시오.”
겨울꽃의 향기가 어디에서 오는 지 알려주는 친절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누울 생각이 없었던 린델은 정신을 차리려 머리를 흔들다가 총에 맞은 왼쪽 어깨가 멀쩡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혹시나 싶어서 어깨를 만졌는데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가 치료했습니다.”
“어떻게…….”
린델의 입에서는 거친 사포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세투아라고 합니다. 마법사지요.”
“!!”
린델은 깐깐해 보이는 중년 사내의 정체에 놀랐다. 주신이자 운명의 신이신 젯타스 신의 축복을 받은 마법사는 마력으로 세상에 없는 기적을 펼칠 수 있는 자였다. 그 중에서도 고위 마법인 치유술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정말 소수라고 알고 있었다. 마법사가 치유술로 고쳤다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엇다.
“카시어스 경의 명령으로 당신을 치료했습니다. 총에 맞아 어깨가 완전 박살이……. 음, 어깨가 크게 다쳤지만 이제는 흉터조차 없습니다.”
흉터조차 없다며 뿌듯해 하는 세투아의 입에서 새로운 사람의 이름을 들은 린델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사스러운 방이었다. 그리고 햇빛이 쏟아지는 창을 배경으로 웬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반짝이는 주홍빛 머리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아마도 그가 카시어스 경일 터였다.
“감사합니다.”
린델은 주저하지 않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머리는 여전히 멍했지만 도움을 받았으니 고맙다고 해야 했다. 그런데 린델의 인사에 답한 것은 카시어스가 아니라 세투아였다.
“젯타스 신께서 당신을 도우셨습니다. 자칫했다간 목숨이 위험할 뻔 했습니다.”
“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다음은 내가 설명하지. 나가 봐.”
“물러나겠습니다.”
세투아가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린델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저기…….”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는데 카시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린델은 입을 다물고 그가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남자였다. 멋진 옷차림뿐만 아니라 우아한 몸가짐만으로도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느슨하게 땋은 긴 머리카락은 타오르는 불꽃과 닮았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성화 속의 천사보다 더 잘생긴 얼굴이었다. 미소를 품은 황금색 눈동자와 붉은 입술은 화려하고 눈길을 끌었다.
세상에 저렇게 생긴 남자도 있구나 하고 감탄을 하고 있던 린델은 문득 자신이 쫓기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하자마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남자의 반대편으로 뛰쳐나가 그를 경계했다. 걸음을 멈춘 카시어스가 애매하게 인상을 썼다. 린델은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당신 뭐야?”
너무 긴장해서 목소리가 엉망으로 튀었다. 위협 따위는 조금도 되지 않았지만 린델은 상관하지 않았다.
“뭐?”
“날 왜 여기로 데려 온 거야?”
“하아?”
카시어스가 헛웃음을 지었지만 린델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활짝 열린 테라스 창 너머로 정원을 보자면 2층 높이도 되지 않았다. 뛰어 내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다. 겨우 두 걸음 만에 팔이 붙잡혔다. 거리가 상당했는데 어떻게 붙잡았냐는 생각이 스친 것은 아주 잠시 뿐이었다.
“이것 놔!”
팔을 크게 휘둘렀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지막지한 힘에 의해 뒤로 넘어졌다. 린델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조금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카시어스가 올라탔다는 것이었다. 만세 자세로 양팔을 누르고 있는 터라 린델은 꼼짝도 할 수 없이 남자를 올려다봐야 했다.
코앞에 있는 황금색 눈동자가 사납게 빛나고 있었다. 린델은 어렸을 때 만났던 늑대를 떠올렸다. 눈의 색깔은 물론이고 소름끼치도록 오싹한 게 똑같았다. 늑대를 똑바로 바라보지 말라고 배웠지만 그래도 남자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무서워서 심장이 떨리다 못해 멈출 것 같았지만 린델은 겁먹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빠져나가려고 힘을 주었다.
“무슨 꼬맹이가 왜 이렇게 힘이 좋아?”
“당신이야 말로 돌덩이잖아?!”
카시어스의 투덜거림에 린델은 지지 않고 소리쳤다. 온 몸에 힘을 주며 버둥거리려고 했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커다란 바위 같았다.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위해를 가하려고 했으면 벌써 가했어.”
으르렁거리는 남자의 말에 린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죽이려고 했다면 굳이 데려다 치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치유법사까지 동원했다. 인과를 생각한다면 자신이 비약이 심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린델은 딱딱하게 굳은 머리를 필사적으로 쥐어짰다. 우선은 무슨 상황인지부터 파악해야 했다.
“비켜주세요.”
“뛰어내릴 생각하지 마. 넌 지금 맨발이야.”
“안 뛰어내릴게요.”
“좋아.”
린델이 약속을 하자 남자가 손을 떼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린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 창 쪽으로 물러나 섰다.
두 사람의 거리는 처음 적당히 멀어지자 카시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많겠지. 뭐든 물어 봐.”
“살려 주셔서 감사해요. 아까는 너무 놀라서…… 그랬어요.”
“이해하지.”
“그런데 당신은 누구시죠?”
린델은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 것은 확실했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난 카시어스, 카시어스 루더 아베론.”
자신의 이름을 밝힌 남자가 잠시 텀을 두고 인상을 썼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군.”
“네.”
린델은 모른다고 솔직히 대답했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냥……. 참견하기 좋아하는 돈 많은 귀족나부랭이 쯤으로 생각해.”
카시어스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들었다면 제 귀를 의심할 자기소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