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화 (9/137)

-09화-

그는 할엔라드 제국의 황제였고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다. 황제로서, 그리고 카시어스 개인으로도 돈이 많긴 했지만 스스로를 귀족나부랭이라고 지칭하기에는 너무 한 것이었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권력으로 눈앞의 꼬맹이를 찍어 누를 생각이 없었다. 생긴 것은 겁 많은 사슴을 닮은 주제에, 하는 짓은 털을 잔뜩 세운 살쾡이였다. 제대로 된 신뢰를 얻으려면 신중해야 했다.

물론 그의 성의 없는 소개는 린델의 의심을 샀다. 하지만 린델이 무어라하기 전에 카시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곳은 닐르의 그넨월크 거리에 있는 저택이고, 네가 총에 맞은 지 10일이 지났군. 맞아. 10일이야. 그리고 널 치료하고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유는 네가 필요하기 때문이지.”

“제가 필요하다니요?”

“그건 차차 말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네 이야기를 들어볼까? 린델 시어드?”

자신이 제국의 수도에 와 있고, 10일이나 시간이 지났던 사실에 놀라다가, 네가 필요하다는 말에 의아해하던 린델은 자신의 이름이 불렸다는 사실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순간 머리가 텅 비어 버렸다. 카시어스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린델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카시어스를 바라보았다. 등 뒤에는 여전히 테라스 창이 열려 있었다. 도망칠 수도 있다면 맨발도 상관없지만 그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를 악 문 린델은 용기를 쥐어짰다. 적어도 카시어스는 현상금 사냥꾼이나 필로나 남작의 하수인 같지는 않았다.

“예. 제가 린델이 맞아요.”

“테오도르라는 신분패에 깜빡 속을 뻔 했어. 예쁜 금발을 칙칙한 갈색으로 염색을 했기에, 뒤를 좀 캤지. 린델 시어드. 살인 누명을 쓰고 쫓기고 있더군. 동부령 전역에 수배가 내려졌어.”

“누명……이라는 걸 어떻게 아세요?”

“그건 누가 봐도 누명이 맞아. 그렇지 않고서야 델라우드 백작이 널 도망치게 놔주지 않았을 테고.”

린델은 카시어스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알렉스는 물론이고 백작님께서 피해가 간다는 것쯤은 파악했다. 린델인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렇게 질린 얼굴을 하지 마. 너도, 그리고 백작도 추궁할 생각이 없어. 조금 전에 말했지만 난 네가 필요하거든. 그래서 너의 환심을 사야해. 그러니 네 누명을 벗기는 것부터 시작하고 싶은데. 어때?”

카시어스가 어떠냐고 물었지만 린델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멍청한 당나귀가 된 것 같았다. 말은 들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먹지를 못했다.

어리둥절한 린델을 보며 카시어스는 웃음을 삼켰다. 닳고 닳은 궁중인이라면 이게 자신에게 유리한 거래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나 산골 마을에서 자라 사제를 희망한 꼬맹이에게는 좀 더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야 할 것 같았다.

카시어스는 답지 않게 인내심을 발휘했다. 절박한 것은 자신이었다.

“네가 바란다면 남작에게 복수해 줄 수 있어. 아니면 누명을 벗기고 명예를 되찾도록 도와 줄 수도 있고.”

“?!”

“대신, 곁을 떠나지 않고 배신을 하지 않겠노라 맹세해. 사제는 될 수 없겠지만 평생을 영화롭게 살도록 해 주지.”

시를 읊조리는 듯 속삭이는 목소리는 마치 악마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햇살 속에서 빛나는 카시어스는 성화 속의 오만한 천사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했다. 린델은 그런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영화로운 삶 따윈 원하지 않았다. 누명을 벗길 수만 있다면, 그래서 잉그란을 떳떳하게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눈앞의 남자가 진짜 악마래도 상관없었다.

“진짜 그렇게 하실 수 있어요?”

“물론.”

“제가 죽인 게 아니라고, 누명을 쓴 거라고, 모두가 알 수 있게 해주세요. 그래서 잉그란 사제님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어요.”

간절하다 못해 희열을 품은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떨렸다. 눈물이 고인 하늘색 눈동자는 기적을 마주한 신도처럼 형형히 빛났다. 열망을 품은 시선에 카시어스는 기쁨을 억눌렀다. 절박한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이야 이골이 났다. 순진한 꼬맹이의 눈물에 따끔거릴 양심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약속대로 누명을 벗겨주면 그만이었다. 그건 자신 있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으니, 이제 무릎을 꿇어.”

“예?”

“충성 서약을 해야지.”

충성 서약이란다. 린델은 어리둥절했다. 기사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형식만 남은 충성 서약을 하라는 남자의 요구가 생뚱맞았다.

촉촉하게 젖어들던 하늘색 눈동자에 의아함이 어리는 것을 보며 카시어스는 웃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위대한 불꽃의 지배자이자, 다르헬트 대영주인 벨룬드 공작이 그대의 서약을 허락한다. 그러니 무릎을 꿇어.”

린델은 자신의 귀에 이상이 생긴 줄 알았다.

위대한 불꽃의 지배자, 다르헬트의 대영주, 벨룬드 공작. 그 모든 호칭이 가리키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

황제.

대륙의 북동부 끝에 위치한 로벅은 산골 마을이었기에, 중앙의 소식은 먼 나라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남부에서 일어난 내전보다는 여우가 닭을 물어간 것이 더 이야기가 되는 곳이었다. 그래도 8년 전 황실에 일어난 불운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8년 전. 할엔라드 황실에 전례 없는 불운이 찾아들었다. 시작은 황태자 부부의 마차사고였다. 산사태에 휩쓸린 황태자 부부가 사망했고, 후계자를 잃은 충격에 쓰러진 황제가 3개월 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1순위 황위 계승자는 열 살의 빅토리아 황손녀였다. 그러나 어린 황손녀를 대신해 스물한 살의 젊은 황제(皇弟)가 제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카시어스였다.

2번의 내전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젊은 황제. 

린델은 상대의 엄청난 신분에 놀라 서둘러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인사를 해야 하는데 무어라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조금 전의 일어났던 일들을 되새김질 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고귀하신 분을 향해 반말을 하고, 몸부림치고, 노려보기까지 했다. 그나마 욕을 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돈 많은 귀족나부랭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카시어스가 괜히 원망스러워졌다. 아니, 그 전에 고귀하신 분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한 자신이 바보였다. 현 황가(皇家)가 아베론 가문이라는 것을 배웠었는데 떠올리지 못했다.

카시어스가 그 카시어스인지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린델은 오래 자책할 수 없었다. 고귀하신 분의 음성이 메마른 천둥처럼 머리 위에 떨어졌다.

“따라해. 린델 시어드가 다르헬트 대영주인 벨룬드 공작, 카시어스 루더 아베론에게 맹세합니다.”

“린델 시어드가 다르헬트 대영주인 벨룬드 공작, 카시어스 루더 아베론에게 맹세합니다.”

“변치 않는 충성과 빛나는 영광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변치 않는 충성과 빛나는 영광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린델은 세이렌에게라도 홀린 듯 카시어스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제국민이 황제와 제국에 충성을 바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성소에서나 읽은 충성 서약을 제 입으로 한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머리 위에서 들리는 카시어스의 명령에 린델은 고개를 들었다. 카시어스가 바로 앞에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입을 맞춰.”

린델은 멍하니 카시어스를 바라보다가 하라는 대로 그의 손을 잡고 손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러자 카시어스가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린델을 일으켜 세웠다.

나란히 서서야 린델은 카시어스가 머리 하나는 더 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시야가 남자의 가슴에서 멈췄다. 차마 카시어스를 올려다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깐 채 손을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사기 당한 것 같아?”

“네?”

왠지 웃음기가 묻어나는 질문에 린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카시어스가 웃고 있었다.

“사기를 당한 표정인 걸?”

“아…니요.”

린델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사기를 당한 것 같긴 했다. 자신이 황제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 먼저였지만, 돈 많은 귀족나부랭이라고 한 것은 그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높으신 분을 상대로 원망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럼 나를 봐.”

명령이 떨어졌기에 린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성화 속의 천사라고 생각했던 얼굴이 웃고 있었다.

황제에게는 직관적인 강렬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어떤 이름을 붙여도 찬미할 수밖에 없는 미모였다. 황금빛 햇살 속의 그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

린델은 멍하니 웃는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이 제대로 된 기회를 붙잡았다는 것을 이해했다. 황제시라면 자신이 무죄임을 밝혀 줄 것이다.

다만 고귀하신 분이 어째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 궁금하긴 했다. 린델은 어지러운 정신을 추스르며 자신에게 무엇을 시킬 예정이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린델?”

카시어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린델은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린델의 시야에 붉은 머리카락이 걸렸다. 날렵한 턱도 보였다. 그런데 높이가 이상했다.

“정신이 들어?”

“?”

순간에 머리가 맑아진 린델은 자신이 카시어스에게 안겨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황하기도 전에 등 뒤로 푹신한 것이 닿았다. 침대였다.

린델은 침대에 눕자마자 일어나 앉아 카시어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제가 기절을 했던 거죠?”

“그래.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않은 탓일 거야. 뭘 좀 먹어야해.”

“네.”

린델은 순순히 수긍했다. 아까부터 머리가 멍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먹은 게 없으니 힘이 없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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