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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0/137)

-10화-

“이제부터 이곳에서 지내면 돼. 필요한 게 있으면 은종을 흔들면 되고. 그 외에 여러 가지는 애쉰 부인이 도와줄 거야. 형식은 후견인과 피후견인이라는 모양새가 좋겠지. 자, 여기까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지금 물어봐.”

은종, 애쉰 부인, 후견인과 피후견인. 린델은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은 머릿속으로 되새기면서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저기…….”

막상 입을 열자 카시어스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애매했다.

“제가 귀하신 분을 어떻게 물러야 합니까?”

“카시어스 경이라고 불러. 황궁 안이 아니니까.”

카시어스는 명쾌하게 말했다. 그를 가리키는 호칭은 하나였다. 카시어스는 신이 주신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궁 밖에서 번거롭게 따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카시어스는 간단하게 정리했다.

“카시어스 경. 저를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응?”

“제가 필요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그랬지.”

린델의 질문은 신중하고도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고, 그래서 카시어스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적당히 멍청하다면 손안에 쥐고 흔들기가 쉬웠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무능력을 용서하지 않았고, 무지는 혐오했다. 그럭저럭 똑똑해서 말귀를 알아먹는다면 나쁘지 않았다.

“디비티에라는 단어를 들어 본 적 있어?”

“그건…… 보석이라는 뜻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뜻밖의 질문이었지만 린델은 착실하게 대답했다.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 고요정 어로 디비티에(Dibitie)는 보석이라는 뜻이었다. 잉그란 사제님에게 혼나가며 고요정 어를 배운 것이 이런 곳에서 써먹을 줄은 몰랐다.

“열심히 공부했군. 맞아. 보석이라는 뜻이지만 요즘은 보통 귀족의 정부(情婦)를 디비티에라고 부르지.”

“정부…….”

카시어스의 말을 따라하던 린델은 얼굴을 붉혔다. 신전에 살면서 사제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린델은 뜻만 알고 있던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하자 괜히 민망했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반응에 카시어스는 웃었다.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어린 레이디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카시어스는 린델에 관해 보고받은 내용을 떠올렸다. 스무 살이 지난 청년의 생은 단순했다. 기억을 잃은 고아로 신전의 종복으로 자랐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사제를 지원할 만큼 명석했다. 착하고 조용한 성품으로 어디 한군데 크게 모난 구석이 없다는 평가였다.

스무 살의 청년 치고는 무난하다 못해 무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조심해야 했다.

린델의 쓸모는 정해져 있었다. 다만 어떤 식으로 그를 다룰 지는 오롯이 카시어스의 선택이었다. 거짓과 기만으로 린델을 속일 수도 있었다. 부와 명예로 홀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린델의 성향으로 보자면 진실을 알리는 것이 여러모로 옳았다.

“마도 시대의 디비티에는 불안정한 마력을 진정시키는 제어석을 뜻해. 정확히는 살아 있는 인간에게 붙이는 명칭이지. 네가 디비티에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고, 그래서 살렸어.”

“제가……?”

“그래. 네가 디비티에야. 나의.”

둥그렇게 눈을 뜬 린델을 향해 카시어스는 또박또박 알려주었다.

디비티에.

보석을 뜻하는 고대의 단어는 이제 귀족이 아끼는 정부를 뜻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는 마력을 진정시키는 힘을 가진 존재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마도 시대. 강력한 마력을 타고난 대영주들이 세상을 지배했다. 그러나 마력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그 힘은 불안정하다는 부작용이 있었다.

강력한 마력을 타고난 자들 중에 그 힘을 뜻대로 마음껏 쓸 수 있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거대하고 불안정한 힘에 휘둘렸다. 육신이 변형되기도 하고 정신을 갉아 먹히다가 미치기도 했다. 최악은 커다란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주하는 경우였다.

수천 년 전, 마도 시대의 대영주들과 영웅들에게 살아 있는 마력 제어석인 디비티에가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시간이 흐르고 고대의 영웅들처럼 강력한 마력을 가진 자들이 줄어들면서 디비티에의 중요성도 희미해졌다. 결정적으로 폭주를 막아주는 마력 제어구가 발명되면서 디비티에의 의미 자체가 달라져버렸다.

카시어스가 디비티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기록으로 읽은 게 전부였다. 자신에게 맞는 디비티에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적혀져 있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나의 디비티에를 찾았다.

이제는 구애와 고백의 의미로 쓰이는 시문의 일부분을 보며 얼마나 비웃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한눈에 린델을 알아보았다. 아니, 그를 보기 전부터 그곳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피투성이가 된 그를 품에 안고는 얼마나 희열에 벅찼는지 모른다.

“디비티에라고 하셔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카시어스는 어리둥절해 하는 린델을 보며 웃었다. 모르는 게 당연했다. 이제는 그 뜻조차 달라졌으니까 말이다.

“디비티에는 나이도, 성별도, 신분도 상관하지 않아. 본인조차 자신이 디비티에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 오로지 그의 헤루스(Herus)만이 알아보지. 그에게만 유용한 거니까.”

“헤루스.”

린델은 지배자라는 뜻을 지닌 고요정어를 중얼거렸다.

헤루스와 디비티에.

린델은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믿겨지지 않았지만 카시어스가 어째서 자신을 살린 것인지는 이해했다. 카시어스는 아마도 고대의 대영주들처럼 불안정한 마력을 가지고 있을 테고, 그래서 자신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럼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 당장은 성실한 피후견인이 되는 것이지.”

“피후견인이요?”

“그래. 네가 할 일은 이곳에 대해 천천히 배우고 익히는 것이야. 할 수 있겠지?”

피후견인이라면 후견인의 법적 보호자를 뜻했다. 보통 미성년자에게 후견인이 생기는 법이라서 린델은 조용히 되물었다.

“저는 성인인 걸요.”

“성인이어도 후견인이 있을 수 있어. 이제 내가 후견인이야.”

“네.”

“난 네게 한없이 관대할 거야. 넌 내게서 뭐든 가져갈 수 있어. 돈, 명예, 권력. 다만, 네 스스로를 망가뜨리지 않을 만큼만이야. 명심해.”

“명심하겠습니다.”

그건 경고였다. 린델은 카시어스가 준다는 것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했다. 금전도 명예도 권력도 린델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시어스가 무엇을 경고하는지는 알았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린델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은 모양이군. 또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은 없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잉그란 사제님이, 그러니까 로벅에 계신 스승님께 제가 무탈하게 있다고 연락만이라도 전해드리고 싶어요. 엑크타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도 있는데…….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만이라도 전하면 안 될까요?”

린델은 잉그란과 알렉스를 떠올렸다. 두 사람에게는 자신이 무사하다고 알려야 했다. 귀인의 도움을 받았다고, 누명을 벗을 수 있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다행히 카시어스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네 스승에게 편지를 써라. 답장을 받아 올 테니까. 이제 쉬어. 난 내일 다시 오지. 아, 일어나지 않아도 돼. 애쉰 부인에게 요기할 만한 것과 필기할 것을 준비해 달라고 말해 둘 테니, 뭘 좀 먹도록 해.”

제 할 말을 다 한 카시어스가 그대로 방을 나섰다. 혼자가 된 린델은 숨을 쉬는 것을 잃어버린 채 멍하니 카시어스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난 다음날의 아침처럼 고요한 것이 아무래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거대한 침대도, 아름다운 창살도, 화사한 햇살에 드러난 훌륭한 침실도 모두 신기루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뺨을 꼬집었다. 가차 없는 손길에 뺨이 얼얼했다.

“진짜구나.”

길게 숨을 내쉬며 린델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했다. 과거의 기사들처럼. 그리고 누명을 벗겨준다고 했다.

그날, 잉그란을 만났을 때처럼 운이 좋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운명이란 제멋대로란다.’

잉그란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현실이 되었다.

똑똑.

갑작스럽게 닥친 운명을 얼떨떨해 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울리는 문소리에 린델은 반사적으로 답했다. 

“네.”

문이 열리고 갈색 머리카락에 풍채도 혈색도 좋은 부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린델 쪽으로 다가왔다.

“일어나셨네요. 레오나 애쉰이라고 합니다. 애쉰 부인이라고 불러주시면 되어요. 깨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안녕하세요. 린델 시어드라고 합니다.”

“도련님께서, 그러니까 카시어스 경께서 손님이 필요하신 것을 챙겨주라고 하셨어요. 시장하지는 않으신가요? 간식은 어떠세요? 즐겨 마시는 차는 있으신가요? 제가 추천해 드릴까요?”

생김새만큼이나 활기차게 말을 거는 애쉰 부인에게서는 호의가 넘쳤다. 부드러운 미소에 절로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린델은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시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호의의 미소에 웃으면서 답해주는 것이었다.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마시니까, 부인께서 추천해 주세요. 그리고 번거로우시겠지만 필기구도 준비해주시겠어요? 편지를 써야 해서요.”

린델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신께서 무엇을 위해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진리는 하나였다.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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