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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1/137)

-11화-

할엔라드의 수도 닐르는 400년 전만 해도 란트덴 왕국의 지방 소도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거울 전쟁에서 승리한 할엔라드가 란트덴의 황금 평야를 차지하면서 할엔라드의 운명은 크게 바뀌게 되었다. 영토가 남부로 크게 넓어진 할엔라드가 수도를 닐르로 옮기기로 결정하면서 대륙에서도 보기 힘든 계획도시로 변모했다.

동서로 흐르는 콴 강을 기준으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크게 구분했다. 강의 남쪽에 있는 구시가지는 사람 하나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을 따라 오래된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퍼져 있었다. 오래된 주택가와 상점, 공방, 시장, 사창가 등이 얽히고설켜 미로를 방불케 했다. 치안도 위상생태도 엉망이지만 좋게 말해 활기차다고 할 수 있었다.

구시가지에서 강을 건너면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신시가지 가장 북쪽에 위치한 왕궁을 위시해 귀족들의 대저택들이 위용을 뽐냈다. 왕궁의 정문에서 남향으로 뻗은 대로 양 옆으로는 관공서와 고급 상점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륙의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의 도시답게 멋쟁이들이 돌아다녔다. 마름돌로 마감하고, 인도에 가로등, 가로수, 배수로에 분수까지 갖춘 거리는 어느 도시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깨끗했다.

꽃의 도시. 닐르를 방문한 사람들은 입을 모아 도시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특히 할엔라드의 황궁인 라드라비그의 웅장함은 어느 곳과도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북쪽으로 광대하게 뻗은 황궁 부지 위에 새하얀 대리석으로 빛나는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라드라비그를 찾는 손님들이 종종 길을 잃어버린다는 정원은 기묘화초가 가득했고, 반짝이는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들이 자태를 뽐냈다.

라드라비그의 진정한 가치는 외양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신들의 축복을 받은 황제의 거처 라드라비그는 제국의 권력과 영광이 빛나는 곳이었다.

눈부신 찬란함과 일그러진 욕망이 뒤엉킨 곳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시아크 공작은 시각이 주는 차가움에 속으로 혀를 찼다.

여름의 초입임에도 불구하고 대지의 방이라고 불리는 황제의 집무실은 냉기가 느껴질 만큼 차가운 색감으로 가득했다. 다채로운 농도의 블루, 화이트, 광택이 나는 골드. 어느 것 하나 따스한 온기를 품은 것이 없었다. 집무실의 주인이 불꽃을 닮은 화려한 미모의 소유자인 것에 대비되어 차가움은 더욱 강조되고 있었다.

특히, 냉랭한 표정을 지은 황제가 온점이 떨어진 목소리로 빈정거리면 더더욱 온도가 떨어졌다.

“제 목을 조르고 있다는 것도 모르다니. 이런 멍청한 놈들이 있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근위 기사단을 보내겠다.”

“폐하.”

제국의 재상인 시아크 공작은 반대의 뜻을 담아 황제를 불렀다. 어린 종손녀를 대신해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는 패도적인 황제였다. 2번의 내전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철혈의 황제, 피도 눈물도 없는 군주라고 불리는 카시어스가 내린 파격적인 결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재상은 모르지 않았다.

2개월 전, 마도 시대의 괴물인 몬스터가 제국의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을 습격했다. 550년 만에 일어난 참사였지만 큰 이슈가 되지 않았다. 남부에서 일어난 내전의 영향이 아니냐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동부 지역의 여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빠졌다. 폐허나 미궁에 숨어 있어야 할 몬스터가 인간이 사는 마을을 습격하는 것이 나쁜 징조라고 하면서 황제에 대한 무도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내전이 직후에 몬스터가 출몰한 것을 보면, 신들께서 무자비한 황제를 벌하시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어느 정도 머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며 자극적인 소문을 비웃었다. 아니면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려니 하고 웃어 넘겼다. 그러나 동부의 백성들 사이에서는 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동부의 민심 이반은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더 문제는 일부러 소문을 퍼트리는 주체가 바로 동부령의 선제후인 파슨 공작이라는 것이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부의 선제후인 파슨 공작은 전통주의라는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가 임명하는 행정관이 각 지역을 대표하는 현 체제의 비효율성을 강조하며 고왕국 시대에 제후들이 직접 그들의 영지를 다스리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역의 경계를 아슬아슬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사상이었지만 탁상공론으로만 끝나고 있었기에 지금껏 그냥 두고만 보았다. 그러나 최근 파슨 공작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몬스터의 출몰을 계기로 황제에 관한 무도한 소문을 퍼트렸다. 동시에 귀족들이 사병을 조직하는 것을 금지한 타레놀 칙령을 동부에 한해서 만이라도 해금시켜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오늘, 타레놀 칙령을 해금시켜 달라는 파슨 공작의 상주문이 올라왔었다. 

이런 상황에서 몬스터가 출몰한 마을에 근위 기사단을 보내겠다는 것은 파슨 공작을 무력으로 찍어 누르겠다는 의미였다.

“시비를 걸어오는데, 계속 얻어맞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야. 무도한 소문이 횡횡하고 있는 동부에 황제께서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시는지 과시해야지.”

카시어스는 파슨 공작에게 몇 번의 경고를 보냈다. 좋게 말을 할 때 들어먹지 않으니 이제는 실력 행사를 해야 할 때였다.

“파슨 공작이 뒷목을 잡겠습니다.”

“황제의 근위 기사단이 제국민을 보호하겠다는데, 반대했다가는 충성을 의심해야지. 안 그런가?”

카시어스가 다분히 악의적으로 빈정거렸다. 명분은 이쪽에 있었다.

“그래도 그가 네세리님의 용병과 끈이 닿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무력도발이 있을 수도 있음을 염두 해 두십시오.”

재상은 근위 기사단 파견을 찬성했다. 다만 파슨 공작의 다음 행보가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전통주의라는 말도 안 되는 사상을 주장하며 황제의 무도한 소문을 퍼트리는 파슨 공작이 반역을 시도할 수 있었다.

재상은 최악을 가정했다. 그러나 카시어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몬스터에게 창을 쥐어 줄 수 있다면 그렇겠지. 재상. 전쟁은 인간이 하는 법이야.”

“네세리님의 용병이라면 다릅니다.”

“아무리 긁어모아도 5,000명이 넘지 않는 용병이 뭐가 무서워서? 이제 군대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

타레놀 칙령으로 사병 조직이 사라지면서 제국 내에 합법적인 무력 집단은 군대와 근위 기사단뿐이었다. 5년 전, 카시어스의 조카인 유르센 대공이 역모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남부 육군이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내전이 2년이나 이어졌다.

“이건 시간 벌기용이야. 재상. 알지 않나?”

“요란하게 눈길을 끌어야겠군요. 알겠습니다.”

재상은 카시어스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들었다. 근위 기사단을 파견하는 것은 말 그대로 눈가림용이었다. 카시어스의 진짜 목표는 바로 동관 설립이었다.

기사도를 숭상하는 기운이 강한 동부는 꾸준히 군사 주둔지 설립을 반대해왔고, 결국 동부에는 군대가 없어도 된다는 인식을 안착시켰다. 그리고 그것이 파슨 대공이 전통주의자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근거가 되었다.

카시어스는 몬스터 출몰을 빌미로 동관 설립을 추진하면서 파슨 공작을 압박하겠다는 뜻을 가졌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급급하지 않고 상황을 반전시키는 전략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재상은 카시어스의 계획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감탄을 잊지 못했다.

은밀히 진행된 계획의 완성은 이제 코앞이었다. 파슨 공작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시선을 분산시켜야 했다.

“몬스터가 목격되었다는 곳은 모두 찾아다녀. 홍보도 대대적으로 하고. 파슨 공작이 뒷목을 잡는 게 아니라 거품을 무는 것을 보고 싶군.”

“예. 거품을 물 겁니다.”

“멍청한 놈은 아니니, 짐의 뜻을 눈치채겠지.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고.”

카시어스가 즐거운 듯 화사한 미소를 흘리는 것을 보며 재상은 쓴웃음을 삼켰다. 카시어스의 스승으로, 정치적 동반자로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였다. 누구보다 카시어스를 잘 안다고 자부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사내는 훌륭하고도 엄정한 지배자였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들도 다독일 줄 알았지만,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용서치 않았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면 파슨 공작의 말로는 정해져 있었다.

“빅토리아가……. 잇시론 사절을 맞이하고 있겠군. 그녀가 가면 좋을 텐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근위 기사단이 가는데 뭐가 위험해. 빅토리아도 이제 몬스터가 뭔지는 알아야지.”

재상은 황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챘다. 빅토리아 황태녀는 8년 전에 마차사고로 죽은 제임스 황태자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1순위 황위 계승자였으나 당시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황제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1순위 황위 계승자였다.

황제가 빅토리아 황녀를 자신의 후계자로 천명하고는 황태녀로 삼아 힘을 실어주었다. 그 증거로 황제는 황후는커녕 후궁조차 들이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황태녀가 후계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들을 직접 챙겼다.

황제가 황태녀를 아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황제는 황태녀에게 전투를 경험시키기 위해 내전에도 직접 데리고 다녔다. 같은 이유로 기사단과 함께 몬스터 출몰 지역에 보내려고 한다는 것을 재상도 모르지 않았다.

“폐하의 뜻은 알고 있으나, 황태후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긴. 태후께서 극성맞으시지.”

빅토리아 황태녀의 보호자는 황제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황태녀의 할머니인 황태후였다.

황실의 큰어른으로 사교계를 휘어잡은 황태후는 황제의 든든한 지지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어린 손녀가 황제가 되기 위한 대가였다. 황태후는 빅토리아 황태녀의 안전을 극도로 챙겼다.

“다음을 기약해야겠군. 알았다. 이제 물러가라.”

“물러가겠나이다.”

주군의 뜻이 정해졌으니 따르는 것만이 남았다. 깊게 고개를 숙인 재상은 차가운 집무실에서 빠져나왔다.

혼자가 된 카시어스는 시종에게 기사단장을 부르라고 일렀다. 그리고 재상이 찾기 전에 읽다가 멈춘 상주문을 뒤적거리다가 입매를 당겼다. 여기도 파슨 공작과 다름없는 놈들의 탐욕스러운 요구가 가득했다.

짜증스러운 기분에 카시어스는 인상을 썼다.

욕심만 많은 놈들이 제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 것이 늘상 있는 일이었다. 파슨 공작의 웃기지도 않는 야심이야 언제든 꺾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다 귀찮아져 버릴 때가 있었다.

“앞으로 2년…….”

카시어스는 황제 자리를 때려 칠 시간을 가늠했다. 자신의 운명은 황제가 되는 게 아니었다. 욕심 많은 부황의 어리고 불쌍한 황자로 존귀한 삶을 누리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는 그렇게 살았다.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고, 사냥과 결투를 하면서 방탕한 황족답게 살았다.

자신이 두 살일 때 이미 큰 형이 황제가 되었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조카도 한 명 있었다. 위로는 형님들도 다섯이나 더 있었다. 황위와는 결코 가깝지 않았다.

그런데 운명이 자신을 황제의 자리에 앉혀 놓았다. 황위를 물려받을 황태자가 마차 사고로 세상을 뜨고, 황제인 형님이 돌아가시고, 황제 자리를 두고 나머지 형님들끼리 치고 박다가 모두 죽고 말았다.

결국 황제 직계 사내 중에 남은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빅토리아가 1순위 계승자였지만 당시 내전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열 살의 어린 황태손이 황위에 오르기는 무리라고 황태후가 판단했다. 결국 황위가 자신에게 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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