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린델의 신중한 대답에 카시어스는 합격점을 주었다. 그는 이미 린델이 무엇을 하고 하루를 보내는지 알고 있었다. 린델의 일과는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기도와 명상, 학업과 과제, 그리고 산책과 독서였다.
애쉰 부인은 그렇게 부지런한 도련님은 처음 봤다고 했다. 새벽 같이 일어나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한단다. 다정하고 쾌활하며 아랫사람들을 배려할 줄도 안다면서 칭찬을 거듭했다.
가정교사의 평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기주장이 약하긴 하지만 끈기도 강하고 열심이라고 했다. 역사와 철학, 신학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성취를 이루었고, 대수학과 기하학도 수준 이상이며, 마른 흙이 물을 흡수하는 것처럼 습득력도 훌륭하다는 보고였다. 과제도 밀리는 일 없이 한 번에 해낸다고 했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명석하다.
린델은 훌륭한 피후견인의 표본이었다.
카시어스는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디비티에가 추악한 욕심쟁이가 아니라 제대로 된 인간이라는 것은 지금껏 그를 심술궂게 괴롭혀 온 신의 작은 배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니까 자신도 제대로 보답해 주어야 했다.
“잘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 조바심만 내지 않도록 해. 질문은 여기까지 하지.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자, 여기. 약속한 것이야.”
린델은 카시어스가 품속에서 꺼내든 편지를 받아들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받는 사람 이름 대신 성서의 한 구절을 쓴 필체가 눈에 익었다.
설마 싶은 마음에 린델은 떨리는 손으로 밀랍 봉인을 뜯고는 편지를 펼쳐보았다.
“아…….”
예상대로 편지는 잉그란이 보낸 것이었다. 린델은 핥듯이 글을 읽었다. 내용은 별 거 없었다.
귀인의 도움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운명이 이렇게나 제멋대로랍니다.
무탈하십시오.
정중한 존댓말로 쓴 편지는 받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린델은 잉그란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익숙한 필체를 보자 괜히 마음이 떨렸다. 자신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려서 잉그란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감사합니다. 카시어스 경. 이렇게 빨리 편지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너무 기뻐요.”
편지에서 눈을 뗀 린델은 약속을 지켜준 카시어스를 바라보며 인사했다. 목소리가 울먹이는 것처럼 떨렸지만 부끄러울 것 없었다.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낯선 곳에서 지내려면 마음이 편해야지. 너 역시 스승에게 보낼 편지를 쓰도록 해. 자주는 아니더라도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아.”
“그래도 될까요? 혹시나…… 편지가 들키기라도 한다면 위험해질 텐데요.”
“스승에게 편지를 읽고 태우라고 해.”
“아. 맞아요.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카시어스가 너무나 간단하게 해결법을 찾아준 바람에 린델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는다면 한결 더 마음이 놓였다.
“뭐라고 적혀져 있지? 짧은데?”
“운명은 제멋대로라고 적혀져 있어요. 잉그란 사제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세요. 그리고 무탈하라고…… 무탈하라고 하시네요. 잉그란 사제님 다우세요.”
“좋은 스승이었군.”
“네.”
스승의 칭찬에 활짝 웃는 린델을 보며 카시어스 역시 웃었다. 울음을 참고 있는 듯 물기가 차오른 린델의 하늘색 눈동자에는 신뢰와 호의가 어렸다.
카시어스는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흡족했다. 그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가리지 않는 편이었다. 대부분 쉽고 편한 방법을 선호했지만, 필요하다면 회유책도, 기만책도 즐겨 썼다.
마도 시대가 끝나고 신의 숨결이 옅어지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마법이 쇠락하고 마력도 예전만 못해지면서 디비티에의 존재의 의미도 그 뜻이 변질되었다. 마도 시대에도 디비티에의 취급은 제각각이었다. 비천한 노예로, 값비싼 예물로, 신성한 반려로, 그리고 가장 소중한 존재로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모했다.
수많은 디비티에에 관한 이야기를 보며 카시어스가 깨달은 것은 정말로 귀하다면 아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진짜 보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제 의지와 감정을 가진 인간을 노예처럼 취급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마도 시대의 수많은 대영주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바보 같은 실수를 반복 했다.
카시어스는 그들을 반면교사 삼았다. 린델과 같이 심성이 올곧은 자의 환심을 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스승에게 안부를 전하고 편지를 받아 오는 것으로 신뢰를 얻었으니 이제는 흥미로운 것으로 현혹할 차례였다.
“젊으신 도련님을 너무 집에만 가둬두는 게 아니냐고 애쉰 부인에게 한 소리를 들었어. 나이가 이만큼이나 먹었는데도, 유모에게 잔소리를 듣기는 싫단 말이야.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혼자 외출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어. 대신 나와 함께 돌아다니도록 해. 닐르는 꽤나 볼거리가 많은 곳이지. 어디가 좋을까?”
“밖에 나간다고요?”
“그래.”
외출을 하자는 말에 린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곳에서 지낸 14일 동안 저택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조용한 거리에 위치한 저택은 아주 컸고 정원도 넓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그래도 담장 밖이 어떤 세상인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꽃의 도시라고 불리는 닐르였다. 대륙에 가장 번성했다는 제국의 수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다.
“축제 기간이니 서커스가 있군. 델라도르의 꽃이라는 재주꾼이 기가 막히지.”
“서커스가……. 광대와 재주꾼이 등장하는 공연이죠?”
“비슷해. 규모가 좀 더 크지. 분명 마음에 들 거야.”
“예. 굉장히 재미있다고 들었어요.”
말로만 들어왔던 서커스였다. 기대감을 숨기지 못한 린델은 편지를 두 손에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애쉰 부인은 린델이 서커스를 보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감히 폐하께 잔소리를 한 보람이 있다고 뿌듯하게 웃으면서 린델의 외출 준비를 도와주었다.
집안에서 손님을 맞이할 때의 예복과, 바깥 외출복은 서로 달랐다. 전자는 하늘색 비단 천에 금사가 수 놓여 있었고, 후자는 짙은 색 옷감에 장식이 간소했다. 크라바트도 좀 더 점잖은 것으로 바뀌었다.
“도련님께서는 뭘 입으셔도 잘 어울리세요.”
“그래요?”
“이대로 길을 걸어가신다면 레이디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거예요. 이렇게 잘생긴 청년은 쉽게 볼 수 없으니까요.”
“자꾸 그렇게 칭찬하시면 제가 정말 잘생긴 건가 하고 착각해 버릴 수도 있어요.”
“마음껏 착각하셔도 되요.”
애쉰 부인은 린델의 겸손한 태도에 웃으며 착각해도 괜찮다고 더욱 칭찬했다. 카시어스의 유모였던 애쉰 부인은 경력이 많은 노련한 하녀였다. 그녀는 린델의 출신이나 사연을 몰랐지만 며칠 같이 지낸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파악했다.
카시어스가 귀한 손님으로 모시라고 한 린델은 어질고 착한 청년이었다. 그에 더해 보기 드문 미남이기도 했다. 누구처럼 압도적인 미모를 뿜어내지는 않았지만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눈시울이 길어서 웃을 때면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린델은 애쉰 부인의 칭찬이 의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린델은 자신의 유약해 보이는 외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사내다운 큰 키와 넓은 어깨를 동경하는 린델은 알렉스나 카시어스와 같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다 되었습니다.”
프록코트의 매듭을 정리한 애쉰 부인이 뒤로 물러났다. 린델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옷차림을 점검했다.
거울 속에 비친 청년은 자신이 아닌 것 같아 조금 어색했다. 뻣뻣한 린넨 셔츠 위에 회색 튜닉의 종사복을 입을 때와 비교하니 더욱 그랬다. 카시어스 말대로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옷이란 자고로 튼튼하고 편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린델은 아름답고 멋진 옷에 감동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음을 실감했다. 여름에도 목을 감싼 크라바타를 매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린델은 단단히 조여멘 크라바트의 매듭을 살짝 잡아당겼다. 카시어스는 영화롭게 살게 해 주겠노라 했다. 그의 약속대로 모든 것이 과하게 주어졌다. 신전의 종사로서 평생을 검약하고 청빈하게 살아온 탓에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들이 얼마의 값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귀족이나 가질 법한 물건이라는 것쯤은 눈치 챘다. 스스로를 망가뜨리지 말라는 경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린델은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망각하지 않았다. 귀하신 분께 도움을 받았지만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적어도 누명이 벗겨질 때까지는 무조건 납작 엎드려서 하라는 대로만 하는 것이 현명했다.
그렇게 다시금 마음을 다잡은 린델은 애쉰 부인이 건네주는 장갑을 착용하며 메인 홀로 향했다.
그곳에는 망토를 두른 검은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린델은 한순간 누구인가 싶다가 그가 카시어스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카시어스 경?”
“응?”
“머리가……. 염색하셨어요?”
카시어스에게 다가간 린델은 그의 머리가 진짜 검은색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놀랐다. 불꽃처럼 화사했던 붉은 머리가 검은색으로 변하자 카시어스의 인상도 바뀌었다. 좀 더 어둡고 차가워 보였다.
황금빛 눈동자는 변함이 없지만, 검은색과 대비되는 탓에 더욱 사나워 보였다. 성화 속의 천사가 아니라 무서운 늑대 같은 느낌이었다.
“마법구(魔法具)의 도움을 받았지. 머리색이 달라지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네?
“서커스를 찾은 손님 중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여러모로 귀찮아져.”
“아니, 그게 아니라 마법구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셨잖아요. 마법이 걸려 있는 건가요?”
린델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를 물었다. 마법구. 그게 뭔지 대충 짐작이 가지만 무엇이 어떻게 사람의 머리색을 바꿀 수 있는지 궁금했다.
“아아, 마법구. 이거야.”
카시어스가 오른손을 내어 보이면서 소매를 살짝 걷어 올렸다. 그의 팔목에는 매듭 무늬가 섬세하게 투조한 백금팔찌가 걸려 있었다.
“마도 시대에 만들어진 마법구지. 머리색을 바꿔줘.”
카시어스가 왼손으로 팔찌를 풀어냈다. 그러자 그의 머리칼은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돌아왔다. 신기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린델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굉장해요.”
“암행을 다닐 때 편리하지. 내 머리는 너무 눈에 띄어서 너무 쉽게 알아본단 말이지.”
“그야 카시어스 경의 머리색은 굉장히 예쁘니까요.”
“그래?”
팔찌를 다시 채우던 카시어스는 예쁘다는 소리에 린델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