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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137)

-14화-

“빛을 받으면 마치 불꽃이 일렁이는 것처럼 예뻐요. 거기다가 카시어스 경께서는 보기 드문 미남자시니까, 당연히 알아볼 수밖에요. 처음에 저는 성화 속의 천사님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어요.”

낯간지러운 찬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린델 때문에 카시어스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린델의 칭찬이 순순한 칭찬이었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말았다.

성화 속의 천사님이란다.

제국의 황자로 태어나, 평생을 권력자로 살아온 탓에 아부와 찬사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제 본심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사교계에서의 칭찬은 온전한 칭찬이 아니었다. 아부이기도 했고, 비아냥거림이나 비난이기도 했다. 순수한 진심이 담긴 감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아주 드물었다.

그 아주 드문 경우를 마주한 카시어스는 권력과 지위로 린델을 찍어 누르지 않은 스스로를 칭찬했다. 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아니라 카시어스라는 한 인간으로서의 호의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귀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낯간지러운 칭찬은 오랜만이군. 예쁜 머리를 자랑하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검은 머리로 만족해.”

“검은 머리도 잘 어울리세요.”

“이런, 칭찬에 약한 레이디처럼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아. 이제 가야지.”

달콤한 칭찬에 만족한 카시어스는 린델을 이끌었다.

자신의 붉은 머리칼 외에도 린델을 감탄시킬 것들은 아직 잔뜩 있었다.

“우아아아.”

재주꾼이 매달린 그네가 공연장 천정 끝에 닿을 만큼 높이 치솟을 때마다 린델은 감탄을 내뱉었다. 그리고 재주꾼이 공중제비를 하며 반대편 그네로 옮겨갈 때면 비명을 내지르며 박수를 쳤다.

번쩍이는 조명, 화려한 의상, 요란한 음악, 아슬아슬한 곡예가 어우러진 공중 그네 공연에서 린델은 눈을 떼지 못했다.

마차를 타고 오면서 카시어스에게 서커스가 뭔지 대충 들었던 린델은 델라우드 백작의 연회에서 봤던 예인들의 공연에서 좀 더 규모가 큰 정도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의 짐작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불타는 탑을 뛰어넘는 사자, 모자에서 튀어나온 수십 마리의 비둘기, 인간 탑 쌓기, 인간을 표적으로 한 칼 던지기, 익살스러운 광대의 재주넘기 등등.

모든 것이 린델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하이라이트는 공중 그네 기예였다. 위태로운 그네와 그네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묘기를 보여주는 재주꾼은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굉장해.”

떨어질 듯 말 듯하면서 반대편 그네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재주꾼의 팔을 잡는 광경에 린델은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그렇게 넋을 잃고 공연에 빠져 있는 린델을 지켜보고 있던 미소를 짓고 있던 카시어스는 살짝 피로함을 느끼며 살짝 눈을 감았다.

“와아아아.”

또다시 굉장한 곡예가 있었는지 린델의 감탄사와 박수소리가 어울렸다. 서커스 공연은 확실히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좋은 아이템이었다. 

제국은 오래 전부터 민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행사를 동원했다. 각종 축제와 대규모 검투 경기, 근위 기사단의 가두 행진, 서커스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전통적으로 인기가 많은 것은 바로 검투 시합이었다. 훈련받은 검투사들이 우글거리는 검투 시합은 사병 조직을 금지한다는 칙령에도 불구하고 민심을 고려해 폐지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인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실력 있는 검투사들이 늘어났고, 귀족들의 이권사업이 된 검투 시합은 하나의 거대한 무장조직이 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검투 시합을 폐지할 수 없었던 제국은 다른 방법을 찾았다.

무분별하게 열리던 검투 시합을 제한하는 여러 법규를 만들면서 동시에 서커스를 지원했다. 공식적으로 황제의 후원을 받는 서커스단이 생겨났다. 길목 좋은 도심에 상설 공연장을 짓고는 매 시간마다 정기적으로 서커스가 열리도록 했다. 그렇게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서커스의 세가 커지자 상대적으로 검투 시합의 세는 약해졌다.

태생이 그러한 서커스 공연장은 대대로 여러 암투의 현장이 되곤 했다. 암살과 폭력 시위, 그리고 패싸움까지. 크고 작은 사건들은 어떤 식으로든 제국의 정세에 영향을 미쳤다.

반란이 시작된 것도 이곳이었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카시어스는 혀를 차며 눈을 떴다. 공연장 최상층에 자리는 오페라 극장처럼 박스석으로 되어 있었다. 양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공연장 대부분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서커스가 인기 절정이라는 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내부에는 빈자리 하나 보이지 않고 사람들도 꽉꽉 들어차 있었다.

8년 전, 다섯 황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역모에 닐르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 시작이 바로 서커스 공연장이었다. 3순위 왕위 계승자인 넷라스 공작이 2순위 황위 계승자였던 워챠스 공작을 암살하면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미쳐 날뛰던 시기였다. 빅토리아의 목숨까지 위협을 받고 나서야 자신에게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제국을 수호하고 지키겠노라고 맹세했다.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제멋대로 굴러가는 거대한 생물인 제국의 고삐를 잡고 여기까지 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생각 끝에 도달한 카시어스는 머리가 지끈 거리는 것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정말 물리적으로 머리가 아팠다.

빌어먹을 마력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마력을 억누르는 마력 제어구 때문이었다.

지금에 이르러 마력이란 고대처럼 산을 가르는 강력함이 아니었다. 그저 귀족들의 특별함의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 기사가 되어 제 힘을 과시하고 군대에서 출세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그러나 폭주의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그것을 막이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 바로 마력 제어구였다.

과거의 대영주들처럼 강력하고도 불안정한 마력을 타고난 카시어스는 마력 제어구를 주렁주렁 달고 다녀야 했다. 불안정한 마력이 그의 신경을 한없이 날카롭게 만들 때마다 6개나 되는 마력 제어구가 반응했다.

마치 물속을 걷는 것처럼, 폭설 속을 헤매는 것처럼 몸이 무겁고도 차가워졌다.

감각은 예리해 지는데 몸은 둔해지는 느낌은 불쾌하다 못해 짜증이 치솟았다. 이럴 때면 제어구를 집어 던지고 제멋대로 날뛰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다행히 자신에게는 디비티에가 있었다. 그것도 바로 옆에서 느껴졌다.

“카시어스 경?”

카시어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어느새 공중 그네 공연은 끝나있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린델과 시선이 닿았다. 그가 자신의 디비티에였다. 이런 순간에도 그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단순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머리가 아프십니까?”

린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스석 내부는 어두운 편이었는데, 그래서 카시어스의 하얀 얼굴이 도드라지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조금 전까지 눈을 감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손을 잡아. 장갑을 벗고.”

느슨하게 앉아 있던 카시어스가 피식 웃으면서 장갑을 벗고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뜻밖의 요구에 고개를 갸웃거린 린델은 순순히 장갑을 벗고 카시어스의 손을 맞잡았다. 커다란 손은 왠지 차가웠다.

“카시어스 경. 손이 차갑습니다. 체하면 손이 차가워지는데. 속이 안 좋으신 건가요?”

“제어되지 않는 마력이란 지랄 같아.”

“?!”

“때때로 모든 것을 다 때려 부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곤 해. 그랬다간 닐르의 절반이 날아가겠지만, 충동은 쉽게 가라앉지 않아.”

카시어스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는 린델의 손을 좀 더 힘주어 잡았다. 따뜻하고 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손은 귀부인들처럼 보드랍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떤 제의도, 주문도 필요하지 않았다. 피부가 닿는 단순한 접촉만으로도 날카로워지던 신경이 가라앉았다. 동시에 그를 옥죄는 마력 제어구의 힘도 사라졌다.

정신도 육신도 더 없이 완벽해지는 감각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고대의 대영주들이 디비티에를 노예로 대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렇게나 소중한 존재라면 귀하게 아껴야 했다. 이름 그대로 보석처럼 말이다.

“이렇게 손을 잡으면 제정신으로 돌아와. 네가 필요한 이유지.”

카시어스는 린델의 쓸모를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린델이 고개를 다시 한 번 더 갸웃거렸다.

“그것뿐입니까? 손을 잡아드리기만 하면 되요?”

“그래.”

“다행이네요. 좀 더 어려울 줄 알았는데.”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된 린델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손을 잡아주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

“손을 잡는 게요?”

“너는 내가 누군지 잊어버린 것 같아.”

“설마요. 카시어스 경이 누군지 잊어버리다니. 그런 일은 없습니다.”

잊을 리 없었다. 할엔라드의 황제 폐하. 거기다가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엄청나게 잘생긴 미남을 잊어버리다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카시어스는 잊어버린 게 맞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는 제국의 황제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를 모르는 것이었다.

린델은 자신을 마음씨 좋은 귀족 후견인쯤으로 대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하도록 자신이 의도하기는 했다. 그러나 린델의 존재가 바깥이 알려지면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황제를 후원자로 둔 시골 청년은 물어뜯기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가능하면 그의 존재를 감출 생각이지만 그게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다. 언젠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할 때가 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린델은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야 했다.

카시어스는 린델을 자신의 수행원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자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며 조언을 해야 하는 수행원은 디비티에에게 딱 어울리는 자리였다.

권력자의 수행원에게는 여러 가지 것들이 요구되었다. 적당한 신분, 지혜로움, 매끄러운 말솜씨, 눈치 빠름.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암투에 휩쓸리지 않는 능력이었다. 린델은 그 모든 것을 훈련받아야 했다.

물론 이러한 사정을 린델이 당장에 알 필요는 없었다. 천천히 익숙해지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네가 나의 디비티에라는 것을 명심해.”

“그야 물론이죠.”

린델의 확답을 받은 카시어스는 손을 놓아주었다. 그때 마침 음악 소리가 끝나면서 누군가가 커다랗게 외쳤다.

“아슬아슬한 곡예가 즐거우셨습니까? 후욱 하고 떨어지는 순간에 속바지를 적신 분은 안계시죠? 오, 제 눈에는 어느 점잖으신 신사께서 당황하신 게 보입니다. 지금 저랑 눈이랑 마주치면 바로 그분입니다. 하하하. 다들 고개를 돌리시는군요. 어기적거리며 나가셔야 하는 분들을 위해 이것을 가져 왔습니다. 이것이 뭔지 아십니까?”

서커스 공연장 한 가운데 선 광대가 커다란 자루를 흔들어보였다. 그러자 객석에서 환호성이 일었다.

“오오, 다들 아시는 군요. 이것이 바로 마탑(魔塔)의 반딧불이입니다. 이걸 받아내려고 제가 마탑의 영감탱이……. 흠흠. 말은 곱게 써야 하겠죠? 정정합니다. 마탑의 마법사님들을 얼마나 졸랐는지 모릅니다. 무대가 어두워질 겁니다. 지갑이랑 귀중품을 잘 챙기십시오. 밤새들에게 빼앗겨도 저희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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