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광대가 불이라고 커다랗게 외치자 곧 내부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광대가 서 있던 자리에서 황금색의 작은 빛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우아. 반딧불이가 저렇게 많아?”
아름다운 광경에 린델은 감탄하고 말았다. 린델의 물음에 답한 것은 카시어스였다.
“반딧불이가 아니라 종이야.”
“종이요?”
린델은 옆을 보았다. 어둠 속이라서 카시어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공기 중의 마력에 반응하는 종이로 마탑의 베스터 셀러지.”
“마법구랑 비슷한 건가요?”
“비슷해. 반짝이는 것 외에는 별 소용이 없지만, 다들 좋아하지.”
“좋아할 만해요. 예쁘잖아요.”
린델은 다시 빛 무리를 보면서 감탄했다. 마치 은하수를 보는 것 같았다. 공중에서 춤을 추듯 일렁이는 모양이 몽환적이었다.
“어?”
린델은 작게 소리를 냈다. 일정한 패턴도 없이 물결이 출렁이는 것처럼 펴져나가던 빛 무리가 자신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마치 커다란 뱀과 같은 모양새를 하고는 이쪽을 향했다.
겁을 먹은 린델은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린델. 움직이지 마.”
린델은 카시어스가 경고한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객석이 술렁거렸다.
“마법사다!”
누군가가 커다랗게 마법사라고 외쳤다.
마법사라고?
린델은 그들이 지칭하는 마법사가 자신이라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 사이에 빛 무리에 완전히 둘러싸이고 말았다. 간지럽지도 아프지도 않았지만 무서웠다. 린델은 반사적으로 카시어스를 찾았다.
“카시어스 경?”
“종이 반딧불이는 마법사를 감별하는 도구야. 마법사는 외부 마력을 체내로 순환시키는 능력이 있거든. 거기에 반응하는 것뿐이니까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마.”
“예?”
반문하는 순간에 서커스 공연장 내부가 밝아졌다. 린델은 카시어스가 미간을 다시 찡그리고 있다는 것과 자신의 곁을 날아다니는 것이 정말 작은 종이라는 것을 동시에 알아차렸다.
“네 신분을 밝힐 수가 없으니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알겠습니다.”
린델은 살인 수배자가 된 처지를 망각한 스스로를 질책하며 대답했다. 서커스 공연장 내부의 웅성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내려다보지 않아도 다들 이쪽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는 상황에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어떤 양해도 없이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들 3명이 가림막을 들추고 박스석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작은 종이에 둘러싸인 린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법사는 따라 오십시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마법사를 찾았다. 린델은 미간을 구겼다.
자신이 진짜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경비원의 안내를 따라 린델이 도착한 곳은 공연장의 안쪽에 위치한 낯선 방이었다. 잠시 기다리라는 말에 순순히 자리에 앉은 린델은 잔뜩 긴장했다. 내부는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처럼 잘 꾸며져 있었지만 그를 감시하는 인원이 5명이나 되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린델은 손끝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삼켰다.
마법사란 말이지.
린델은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사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마법의 전성기였던 마도 시대가 끝나고 고왕국 시대가 되면서 마법사의 위상은 전과 달라졌다. 마법사는 인외의 존재로 규정되어 고왕국 시대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사냥을 당했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일반 백성들은 마법사라고 하면 위험하고 끔찍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법은 아직도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쓰이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스스로 발광하는 썬스톤(sunstone)이었다. 촛불이나 등불을 대신해 어둠을 밝히는 썬스톤은 마도 시대가 남긴 가장 훌륭한 유산으로, 제국의 인기 있는 수출품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제국은 철저하게 마법사를 관리했다. 마법사의 재능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모두 마탑에 소속되어 황제에게 충성을 바쳐야 했다.
다만 귀족들의 마력이 그러하듯 마법사의 재능 역시 혈통으로 이어졌다. 일반 백성들 중에 마법사가 나올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그런데 자신이 마법사란다.
살인 누명에 쫓기다가 황제에게 도움을 받는 것과, 서커스 구경을 하다가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그 두 가지 일이 모두 일어났다. 운명이 아무리 제멋대로라고 해도 너무했다.
또다시 한숨을 삼킨 린델은 옆에 앉은 카시어스를 슬쩍 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그는 왠지 화가 난 듯 했다.
린델은 알아서 하겠다는 카시어스의 말을 믿었다. 그저 그를 곤란하게 만든 것이 미안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쉬는데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2명이 더 나타났다. 이번에는 격식 있는 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들이었다.
“치안대의 안샤스 마얀라트라고 합니다. 마법사는 어느 분이십니까?”
“나는 빈센트 라 제메이네라고 하네. 그대와 할 이야기가 없으니 드라그 경을 불러오게나.”
얀사스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카시어스였다. 정확히는 답을 한 게 아니라 무례한 요구를 했다.
치안대원의 등장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린델은 당당하다 못해 오만하게 구는 카시어스를 놀란 눈으로 쳐다봐야만 했다. 다 알아서 한다는 게 치안대원을 화나게 하는 거라면 말리고 싶었다.
“드라그 경이라면, 대장님을 말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대장님은 바쁘신 분입니다. 귀하께서 누구신지 모르지만 오라 가라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할 수 있어. 빈센트 라 제메이네가 찾는다고 알려. 당장.”
이번에는 반말이었다. 발끈 한 것은 얀사스 옆에 선 젊은 치안대원이었다.
“당신 미친 거 아냐? 마법사를 숨긴 것도 큰 죄인데―.”
그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가 벽에 붙어버렸다. 발이 공중에 떴는데도 벽에 고정된 상태였다.
“한 번만 더 방종하게 굴면 옷깃이 아니라 목이 뚫린다.”
카시어스의 살벌한 경고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벽에 붙었던 치안대원이 발버둥을 친 끝에 겨우 바닥에 내려섰다. 린델은 그제야 벽에 뭔가가 꽂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걸 던진 거야?
눈으로 직접 본 건데도 믿어지지 않았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믿을 수 없는 것은 얀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검을 쥔 무인이었고 그래서 상대가 한 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더 잘 알았다.
“드라그 경을 불러 와. 그가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면 순순히 치안대까지 끌려가도록 하지.”
카시어스는 끝까지 오만했다. 얀사스는 경력이 오래된 치안대원이었고 재빠른 판단을 내렸다.
“제이슨. 드라그 경께 귀인의 성함을 알려드리도록 해. 어서.”
얀사스의 명령에 젊은 대원이 얼굴을 굳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다시금 불편하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입을 다문 린델은 사람들이 따가운 시선을 이겨내고 벽에 꽂힌 게 무엇인지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저건 예장용 지팡이의 손잡이 같았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슬쩍 옆을 보니 카시어스가 내내 들고 있던 지팡이가 보이지 않았다.
지팡이를 던져서 벽에 꽂았단 말이야? 그게 가능해? 진짜?
린델이 알고 있는 최고의 검사는 알렉스였다. 강한 마력과 뛰어난 실력으로 군에서 승승장구 하고 있는 알렉스도 저렇게는 못할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분위기도 살벌했고 무엇보다 카시어스의 기분이 너무 나빠 보였다.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저도 제가 마법사인지 몰랐다고요.
린델이 다시 손끝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상기된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선 드라그가 카시어스를 알아보고는 곧 무릎을 꿇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위대한 불꽃의 지배자이시며, 열하나의 강과 일곱 산맥의 군주이시며, 법과 정의의 수호자이신 황제폐하를 뵈옵니다. 빛나는 영광이 무궁하기를.”
안 그래도 경직되어 있던 방 안이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얼어붙었다. 당사자와 린델을 제외하고는 다들 한마음으로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의심했다.
그들이 인사를 따라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는 동안 카시어스가 드라그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라. 드라그.”
“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보고 받았겠지?”
“예. 마법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짐의 피후견인이다. 이렇게 그대를 부른 이유이기도 하지.”
“폐하…….”
드라그는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카시어스를 불렀다. 카시어스의 제위 중에 치안대장의 자리에 오른 드라그는 처세에 능한 편이었다. 카시어스의 암행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처리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덕분에 신임을 받고 출세를 했다.
그러나 마법사는 또 다른 문제였다. 불로불사의 마법에 심취했던 선황 몇몇이 광기에 미친 이후로는 아무리 황제라고 하더라도 마법사를 숨길 수는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데리고 있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수백 명의 사람이 마법사의 존재를 인지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목격자가 너무 많아서 덮을 수 없다는 건 짐도 알아. 그러니 마탑에는 짐의 이름으로 보고하도록 해. 이후의 일은 짐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지.”
마법사의 존재는 인정하되 그가 누구인지는 숨기라는 뜻을 알아들은 드라그는 카시어스 옆에 앉은 청년을 슬쩍 보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금발의 미청년이 황제의 피후견이랬다. 그러니까, 즉 황제가 그의 후견인이라는 소리였다.
후견인이 가지는 의미를 떠올리며 드라그는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물어뜯기면 모두 짐의 명령이라고 해. 그게 사실이니까.”
“황공하옵니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카시어스가 린델을 챙겨 자리를 떴다. 뒤따르지 말라는 명령에 방 안에 남은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본 게 무엇인지 되새겨야 했다.
“대장님. 정말 그 분이…… 맞습니까?”
얀사스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래. 맞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예를 올린 드라그는 순순히 긍정했다. 치안대원은 물론이고 서커스의 경비원들은 저마다 눈을 둥그렇게 떴다.
방금 자신이 본 귀인이 황제였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