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37)

-17화-

“오스카는 돌아가도 좋다. 세투아는 따라 오도록.”

세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카시어스의 뒤를 황급히 뒤따랐다. 외조카인 오스카에게는 소리 없이 눈인사만 하고 방을 나섰다.

“지금 린델을 찾아가서 네가 스승이 될 거라고 소개하겠다. 기초는 내일 알려주고, 오늘은 마탑에 입단하기까지 과정을 설명해 줘. 생각이 많은 녀석이라 내버려 두면 밤잠을 설칠 거야. 해야 할 것만 정확하게 일러두면 돼.”

“알겠습니다.”

“너는 오늘 그를 처음 만난 거야.”

“물론입니다.”

노회한 마법사인 세투아는 카시어스가 오늘 만난 거라고 일부러 말한 뜻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챘다. 황제의 심복이란 입이 무거워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전후 사정을 따지면 카시어스가 서두르는 건 이해가 갔지만 그래도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세투아는 린델을 처음 만난 순간을 떠올렸다. 라만숲에서 총상으로 어깨가 박살난 청년은 피투성이인 채로 카시어스 품에 안겨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때부터 이상했다.

카시어스가 청년을 치료하다 못해 닐르까지 데려왔다. 며칠이나 재워두고는 뒤를 캤다. 살인범으로 쫓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청년을 손님으로 극진히 대접했다. 거기다가 황제가 청년의 후견인을 자처했단다.

그러니까 왜?

생각 끝에 튀어나온 것은 의문이었다. 그랬다. 청년은 특별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카시어스는 청년을 특별하게 챙기고 있었다.

세투아는 카시어스를 너무 잘 알았다. 카시어스가 누군가를 챙기고 대접하는 것은 그만큼 효용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황제의 심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황제의 젖유모의 남동생이어서도 아니고, 그의 어머니에게 걸렸던 저주를 풀어주었던 인연 때문도 아니었다.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의 마법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중용되었다.

빅토리아 황태녀만 해도 그랬다. 카시어스는 사랑스러운 황녀님을 무척이나 아꼈다. 그러나 그건 차기 황제가 될 하나뿐인 후계자를 올바르게 양육하기 위한 방도 중에 하나였다.

신뢰와 믿음이 쌓이는 것은 나중의 문제였다. 쓸모가 없다면 아예 가까이 두지를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라만숲에서 구한 청년이 카시어스에게 효용이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청년이 마법사인 것이 밝혀진 것은 오늘이니까, 마법사라는 건 이유가 되지 못했다.

설마.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카시어스는 누군가에게 빠질 성격이 아니었다. 가까이하는 여인들 역시 필요에 의한 관계가 대부분이었다. 손을 뻗기만 하면 제국 제일의 미녀와 미남들이 발치에 엎드릴 텐데, 시골 출신의 청년을 가까이 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카시어스는 지금껏 남색을 한 적이 없었다.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세투아는 카시어스와 함께 린델을 찾았다.

“카시어스 경? 어쩐 일이세요?”

놀란 얼굴을 하고 카시어스를 반기는 린델을 보며 세투아는 혹시나 하는 의심을 다시 했다. 10일 만에 깨어나는 바람에 힘없는 얼굴을 하고 있던 청년은 놀라울 정도로 변모한 상태였다. 분명 같은 사람이 맞는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갈색이었던 머리칼은 레몬색으로 변한데다 꽤나 길어져 있었다. 그리고 선이 고운 얼굴과 늘씬한 체형이 어우러져 눈길을 끌었다.

황실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을 외모였다.

“이거 받아. 너의 새로운 신분이야.”

“?!”

“간단한 신상명세를 적어 놓은 거니까, 내일까지 모두 외우도록 해.”

“알겠습니다.”

카시어스에게서 서류를 받아든 린델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이름은 아셰리드엘이야. 마탑의 입회식은 2일 후에 있을 테니, 그때까지 익숙해져야 해.”

“그렇게 빨리요?”

“지금 당장 끌려가지 않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

“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세투아는 혹시나 하는 의심을 지워버렸다. 카시어스의 말투는 드바이크 성을 함락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와 다름없었다.

결국 청년을 아끼는 이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세투아는 이미 만났지? 그가 네 스승이 되어 줄 거야. 마탑의 입회에 관한 것들을 듣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도록 해.”

“안녕하세요.”

조금은 겁먹은 것처럼 보이던 린델이 곧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세투아는 의문도 의심도 모두 지워버렸다.

황제가 먼저 말해주지 않는 이유를 파고 들어봤자 좋은 게 없었다. 자신이 황제의 심복으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단시 실력이 뛰어나서만은 아니었다. 적당한 눈치도 필요했다.

“세투아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 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황제의 피후견인은 얼굴만 준수한 게 아니라 예의가 바르기까지 했다. 좋은 징조였다.

세투아는 이것이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청년은 마법사였고, 잘만 키워놓으면 황제가 청년을 데리고 다닐 수도 있었다.

그럼 은퇴였다.

희망에 들뜬 세투아는 이루어지지 않을 꿈을 꾸었다.

황제의 피후견인.

최근 황실 사교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소문의 주인공을 지칭하는 단어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청년은, 사실 청년인지 아닌지조차 확인되지 않은 미지의 인물이었다.

은밀한 소문은 마탑에서 시작되었다. 서커스 공연장에서 마법사인 것이 밝혀진 청년의 후견인이 황제라는 것이었다. 살롱과 파티장에서 반신반의 하며 퍼져나가던 와중에 치안대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서커스 공연장에서 종이 반딧불에 반응한 미등록 마법사가 붙잡힌 게 맞으며, 미등록 마법사와 동행한 고귀한 분의 입김으로 인해 풀려났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사교계는 온통 황제의 피후견인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마법사가 유력 귀족의 비호를 받는 것이야 흔했다. 하지만 상대는 황제였다. 제국의 지배자가 후견인이 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황제가 불로불사의 마법에 심취하시면 큰일이라며 악의를 담아 웃었다. 눈치가 빠른 누군가는 명석한 황제께서 마법사인 것을 알고도 서커스 공연장에 데려갔을 리는 없다고 따졌다. 또 다른 누군가는 남몰래 서커스 공연장에 데려간 것 자체가 총애의 증거라며 떠들어댔다.

신원을 밝힐 수 없는 목격자의 입에서 황제의 동행인이 훌륭한 미청년이라는 증언이 새롭게 퍼지자 소문은 걷잡을 수 없어졌다. 

황제 본인이 직접 피후견인이라고 밝혔다는 것은 확실했다.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법적인 관계는 오해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사교계에서는 좀 더 다른 의미로 쓰인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특히 동성의 어린 애인을 두는 경우에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빅토리아 황태녀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황제는 황후는커녕 후궁조차 두지 않았다. 그 흔한 정부나 애인도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 황제가 어린 미청년을 피후견인으로 두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들 궁금해 할 수밖에 없었다. 살롱에서도 파티장에서도 온통 황제의 피후견인 이야기뿐이었다.

그렇게 2일이 지났다. 소문의 주인공이 황제의 개인 사저에서 마탑의 입회식을 치렀다는 것과, 다음날 충성 서약이 있을 거라고 알려졌다.

가쉽을 좋아하는 궁중인들은 황제의 피후견인이 소문만큼이나 미청년이기를 바라면서 내일을 기다렸다.

늦은 저녁, 황실 사교계를 들끓게 한 소문의 주인공인 린델은 열심히 무릎을 꿇고 있는 중이었다.

“더없이 빛나는 길에 서서, 신의 축복을 받은 위대한 불꽃의 지배자이시며, 열하나의 강과 일곱 산맥의 군주이시며, 법과…… 법과 정의의 수호자이신 황제 폐하께 아셰리드엘 페르난이 일곱 신께서 허락하신 미천한 재주를 바칩니다. 변치 않는 충성과 빛나는 영광을 맹세합니다.”

저택의 서재에 깔아둔 커다란 쿠션 위에 한쪽 무릎을 꿇은 린델은 거창하게 한숨을 쉬었다.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충성 맹세를 연습 하는 도중이었다. 애쉰 부인의 지도에 따라 멋지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방법을 배웠다. 충성 맹세만 하면 그만이었는데, 10번에 1번쯤은 중간에 더듬었다.

“바보 멍청이도 아니고.”

린델은 진지하게 화를 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머리가 나쁘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잉그란 사제님께는 똑똑하다고 칭찬도 많이 받았고, 가정교사도 기초가 탄탄하다고 했다. 외우는 것은 특히 자신 있었다.

그런데 충성 서약은 무슨 일인지 몇 번이고 더듬었다.

원인을 모르지 않았다. 바로 심장이 떨릴 정도로 긴장했기 때문이었다.

애쉰 부인은 알현장에서 황제께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큰 영예라며 좋아했다. 애쉰 부인의 남동생이라는 세투아는 좀 더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제국의 부와 권력이 과시하는 황제의 알현장은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고 무시무시하다고 했다. 높으신 권좌에는 황제가 계시고 마법사의 충성 맹세를 지켜보는 귀족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른 나이에 충성 맹세를 한 마법사들 중에는 혼절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며, 평생 놀림을 당하지 않으려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충고였다.

솔직히 린델은 별 거 아니라고, 침착하기만 하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알현이 내일로 다가오자 심장이 떨렸다.

“이러다가 큰일 나는데.”

자신이 이렇게 겁쟁인 줄 몰랐다.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날, 카시어스가 내민 새로운 신분의 신상명세는 금방 외웠다. 어제, 스승이 된 세투아가 가르쳐 준 기초 마법도 어렵지 않게 익혔다. 그리고 오늘 낮에 저택을 찾은 마탑의 마법사 앞에서도 떨지 않고 입회서에 서명을 했다.

그 모든 것을 해냈는데 황제께 예를 올리는 순간을 떠올리자 입안이 말랐다. 숨도 좀 막혔다. 몇 번 말을 더듬자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결국 연습밖에 없었다.

린델은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황궁이다. 알현장이다. 눈앞에 황제가 계시다. 자신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더없이 빛나는 길에 서서, 신의 축복을 받은 불꽃의 지배자이시며, 열하나의 강과 일곱 산맥의 군주이시며, 법과…… 정의의 수호자이신 황제 폐하께 아셰리드엘 페르난이 일곱 신께서 허락하신 미천한……. 아, 관둬. 몰라. 진짜 바보야. 왜 거기서 더듬거려. 법과 정의. 법과 정의라고.”

이번에도 매끄럽게 말을 하지 못한 린델은 무릎을 꿇은 그대로 엎드리고 말았다. 그런데 등 뒤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린델은 설마 싶은 마음에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카시어스가 서재 입구에 서 있었다.

“카시어스 경?”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린델은 의아함을 느끼다가 얼굴을 붉혔다. 엎드린 채로 추태를 부리는 모습을 카시어스가 지켜봤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마자 부끄러움에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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