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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18/137)

-18화-

언제 온 거야. 왔으면 왔다고 기척을 낼 것이지.

린델은 덥다고 문을 활짝 열어 놓은 것을 후회하며 인사를 올렸다.

“카시어스 경을 뵙습니다.”

“왜? 연습하던 대로 하지 않고.”

“아셰리드엘 페르난이 신의 축복을 받은 위대한 불꽃의 지배자이시며, 열하나의 강과 일곱 산맥의 군주이이며, 법과 정의를 수호하시는 황제폐하께 인사드립니다. 빛나는 영광이 무궁하길.”

이제부터 자신의 이름을 아셰리드엘이라고 말해야 했던 린델은 실수 없이 절을 올렸다.

“일어나도록.”

“예. 폐하.”

“잘 하고 있는데 무슨 연습이냐?”

카시어스가 린델 옆을 지나쳐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린델은 그의 손짓에 따라 맞은편 의자에 앉아 답을 했다.

“혹시나 실수할까 봐서요.”

“실수 좀 하면 어때. 기절하는 놈도 있었다는데 뭘.”

“완벽하게 해내고 싶습니다.”

린델은 진심이었다. 자신이 망신당하는 거야 무섭지 않았지만, 후견인인 황제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런 멍청한 녀석을 황제가 보살피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야 면목이 없었다.

기억을 잃은 고아로 로벅에 왔을 때도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비실비실하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꼬맹이를 데리고 온 것은 잉그란 사제님의 실수라는 소리도 들었다. 잉그란 사제님께 너무 미안해서 열심히 일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린델이 노력파에다가 완벽주의자라는 것을 파악한 카시어스도 딱히 말리지는 않았다. 성격은 쉽게 바뀔 수 없으니 의욕이 넘칠수록 좋은 법이었다.

“오늘 입회서에 서명을 했다는 소리는 들었다. 늙은이들이 괴롭히지는 않았고?”

“설마요. 모두 친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마탑의 늙은이들이 보통 꼬장꼬장한 게 아니거든.”

카시어스는 아침부터 꼬장꼬장한 마법사들을 불러 특별히 주의를 주었다. 욕심 많고 눈치 없는 놈들이 신입 마법사이자 황제의 피후견인을 어떤 식으로든 회유하려고 할 것은 뻔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가는 예산을 반 토막 낸다는 경고가 잘 먹힌 모양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린델은 카시어스가 웃는 것을 보며 따라 웃었다. 서커스 공연장에서 자신이 마법사라는 게 밝혀진 후 카시어스는 매일 같이 찾아와 주었다. 오늘은 무엇을 배웠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내일은 어떤 스케줄이 있는지 물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주변에 적지 않게 있었다. 애쉰 부인도, 세투아도 모두 친절했다. 그래도 가장 믿음직스러운 것은 카시어스였기 때문에 그의 방문은 반가웠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카시어스가 황제라는 사실이 걱정이었다. 해야 할 일이 많으신 분이 이렇듯 자신에게 시간을 써도 괜찮은가 싶었다.

린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매일 이렇게 찾아오셔도 됩니까? 바쁘시지 않으세요?”

“황제라고 늘 바쁘지는 않아.”

황태녀와 재상이 들었다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눈을 흘겼을만한 발언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하루 밤낮이 모자라도록 일을 할 수 있는 게 황제자리였다. 그러나 카시어스는 황태녀와 재상을 굴렸다. 특히 행정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재상은 야근이 일상이었다. 

카시어스는 여러 가지 의미로 무자비한 지배자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린델이 알 리 없었다.

“그러면 다행이고요.”

“사실 오늘은 좀 더 특별한 볼 일이 있기는 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재미있는 이야기요?”

린델이 눈을 빛내며 경청할 자세를 갖추자 카시어스는 짓궂게 미소 지었다. 정확히는 아주 얄궂은 소문을 들었다. 린델을 놀라게 할 자극적인 소문 말이다.

“아주 얄궂은 소문이 퍼졌어. 네가 나의 디비티에라고 말이야.”

“설마…… 들통 난 건가요?”

“아니. 그 뜻 말고 다른 뜻.”

그 뜻이 아니라고 다른 뜻이란다. 린델은 다른 뜻을 떠올리고는 사색이 되고 말았다. 보석이라는 뜻의 디비티에는 정부라고 불린다고 했다.

정부? 자신이 그의 정부라고? 남자인데?

린델은 진짜 그렇냐는 눈빛으로 카시어스를 보았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동성의 연인을 디비티에로 둘 수 없으니 피후견인으로 삼았다고 하더군.”

“세상에…….”

창백하게 질린 채 탐식을 내뱉는 린델을 보며 카시어스는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제 딴에는 심각할 텐데 여기서 웃었다가는 괴롭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성격이 나빠도 악취미까지는 없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을 거야.”

“카스어스 경? 아니, 폐하!”

“내가 널 유난히 아끼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어야지. 아무 이유도 없이 황제가 후견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

카시어스는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때 비웃지도 않았다. 궁중 귀족들이 흥미성 가쉽에 열광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렇게 소문이 퍼지도록 유도한 측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황제의 총애가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는 언제나 민감한 사항이었다. 집요한 작자들은 늘 이유를 찾았고, 그들의 관심을 돌릴만한 그럴듯한 스토리가 필요했다.

확실히 숨겨둔 애인이라면 별달리 해명을 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권력의 단물을 바라는 벌레들이 달라붙겠지만 어차피 그건 예견된 수순이었다.

린델이 디비티에라는 것만큼은 숨겨야 했다. 그의 쓸모가 들통 나면 적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마도 시대의 디비티에들은 종종 암살로 목숨을 잃곤 했다.

“폐하의 명성에 누가 됩니다. 다른 방도가 있을 거예요.”

“디비티에인 건 맞잖아.”

“폐하. 전혀 다른 뜻입니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린델 때문에 카시어스는 흥겨워졌다. 누명만 벗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한 린델은 무리한 요구에도 싫다는 소리를 한 번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의 명성을 걱정하고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군주라고 일컬어지는 자신의 명성에 뭐가 더해지든 상관이 없는데도 말이다.

심성이 착한 녀석을 잘 주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너는 그런 게 아니라고 부인해도 돼. 친절하신 은인이 황제이신 걸 몰라서 당혹스럽고도 황공하다고 하면 그만이야. 나 혼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하면 되는 거니까.”

그들이 꾸며낸 이야기는 단순했다. 암행 중이던 황제는 여행 중에 도적떼에 쫓기고 있던 아셰리드엘을 구해준 것을 인연으로 가까워졌다. 신분을 숨긴 황제는 남부 내전으로 모든 것을 잃은 아셰리드엘이 학자가 되기까지 후견인이 되어주기로 했다.

여기서 거짓은 린델의 신분과 학자가 되기로 했다는 것뿐이었다. 거짓은 죄악이라고 믿으며 자란 린델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아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 황제가 자신에게 열을 올리고 있다는 거짓을 더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폐하께서 제게 열을 올리다니. 그거 아무도 안 믿을 겁니다.”

“왜?”

“그야……. 제가 사내기도 하고, 그리고……. 음, 그런 식으로 아끼실만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자신의 못남을 주장하는 린델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카시어스는 결국 커다랗게 웃고 말았다. 녀석은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하하. 믿을 거야. 장담해.”

“진짜요?”

“내 심미안을 의심할 이는 아무도 없을 거야.”

카시어스는 확신을 담아 이야기했다.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은 달콤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섬세하고 우아한 외모는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디비티에라는 효과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화사한 미청년이었고, 황제의 숨겨진 애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늑대들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제대로 된 가디언을 붙여야겠군.

순진하고 경험이 없는 데뷔탄트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거기다 황제의 총희라는 이유만으로 린델을 노릴 놈들은 산더미처럼 생길 터였다.

그러나 린델은 제대로 납득을 못한 듯 시무룩하기만 했다. 카시어스는 괜찮다는 말을 하는 대신에 주제를 바꿨다.

“얼마 후에 필로나 남작 일가가 상경할 게야. 황궁에 출입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길을 걷다가 마주치면 놀라지 말고 모르는 척해.”

“!!”

“늦어도 겨울이 지나기 전까지 마무리 될 거니까, 조바심 내지 말고 기다려.”

기다리는 명령에 린델은 충성 맹세도, 얄궂은 소문도 모두 잊어버렸다.

린델은 결백을 밝혀주겠노라 한 카시어스를 재촉하거나 어떻게 되고 있냐고 묻지 않았다. 그를 믿고 있기는 했지만 혹시나 높으신 분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조심한 것도 있었다. 

기다리니까 답이 왔다.

1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얼마든지 기다릴 작정이었는데 겨울이 가기 전이란다.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면서도 기뻤다.

“감사합니다.”

“이중 신분으로 살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건 미안해.”

“아닙니다. 어차피 카시어스 경이 아니었으면 평생을 쫓기면 살았어야 했습니다. 아니, 그 전에 숲에서 죽었을 테지요. 괜찮아요. 정말.”

울 것처럼 웃으며 성실하게 답하는 린델을 보며 카시어스는 쓴웃음을 삼켰다. 이렇게 나온다면 어디까지 해낼지 궁금했다.

카시어스는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을 즐겼다. 한계까지 쥐어짜면 결국 바닥이 드러난다. 그걸 뛰어넘을지 주저앉을지는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물론 린델을 망가뜨릴 수는 없었지만 녀석이 여기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알고 싶어졌다.

“황궁에서 네가 할 만한 일을 찾아야겠군,”

“무엇이든지요.”

“좋아. 아셰리드엘. 짐을 상대로 연습할 영광을 주도록 하지.”

카시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일어나는 린델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든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이지.”

완벽주의자인 피후견인을 위해 이정도 수고스러움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환하게 웃는 린델을 보며 카시어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커다란 유리창에 부딪혀 눈부시게 산란한 햇살 아래 마법사를 상징하는 백색 로브를 입은 무리들이 서 있었다. 알현장에 입장하기 전에 대기하는 넓은 홀에는 화려하게 꾸민 귀족들로 가득했다. 그 중에서 백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은 단연코 눈에 띄었다.

비단 부채를 펄럭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마법사들을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그들 중에 가장 젊은 마법사를 보았다.

그가 바로 황제의 피후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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