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소문의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알현장 앞은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상태였다.
“어머나, 생각보다 어린데요?”
“열아홉 살이라잖아요. 폐하께서 여인을 안 찾으시는 이유가 있었어요.”
“저 정도면 한 눈에 반하셨다는 소문이 진짜일 것 같지 않아요?”
바쁘게 움직이는 부채로 입술을 가린 귀부인들이 저마다 품평을 내쏟았다. 소문의 청년은 미모로 유명한 황제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레몬색 금발과 투명한 피부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선이 고운 얼굴 역시 우아했다.
“얼마나 긴장하고 있을까요?”
“글쎄요. 웃지를 않는 걸 보면 아주 바보는 아닌 모양이죠.”
“평민이라는데, 기절을 하지 않을까 몰라요.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잖아요.”
소문의 주인공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피는 눈빛은 열혈하고도 냉철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온 몸으로 느낀 린델은 얼굴이 따갑다고 생각했다.
이러다가 구멍이 날지도 모르겠어요. 사제님.
태연한 척하며 화려한 기둥 장식만 바라보고 있던 린델은 버릇대로 잉그란을 찾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고귀하신 분들의 눈빛은 노골적이기 짝이 없었다. 단순한 흥미에서 적의에 가까운 혐오까지 다양한 감정이었다. 뼈째 씹어 먹힐 거라는 카시어스의 경고가 말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났다.
린델은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들 앞에서 완벽하게 해내야 했다.
무릎이 아프도록 연습했잖아. 괜찮을 거야.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면 충성 맹세가 자동으로 흘러나올 할 정도였다. 카시어스까지도 도와주었다. 그런데도 실수를 했다간 억울할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근위 시종이 다가와 입장을 알려왔다. 그를 따라 알현장으로 들어서자 호명관이 커다랗게 외쳤다.
“아셰리드엘 페르난. 신을 받드는 마탑의 종이 들었습니다.”
천공의 홀이라고 불리는 알현장 안은 바깥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린델의 얼굴에 아프게 꽂혔다.
린델은 앞만 바라보았다.
커다란 독수리가 일곱 신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성화문양에게 감싸인 황금색 태피스트리가 알현장을 장식했다. 숨 막히도록 화려한 공간 끝에, 당당히 서 있는 카시어스가 눈에 들어왔다.
성화 속의 오만한 천사가 아닌 황제의 모습을 한 남자는 홀로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는 미소가 걸렸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했다. 하지만 충성만큼은 진실이지 않냐고도 했다. 그러니까 실수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심장이 귀에 울리고 있는 이 순간에는 위로도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저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있는 것만이 다행스러웠다.
린델은 카시어스에게 집중하며 앞으로 걸었다. 뒤따르던 마탑의 원로들이 어느 순간에 멈춰 섰지만 린델은 계속 나아갔다. 자신이 서야 할 곳은 황제의 발아래였다.
제 자리를 찾아 선 린델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절을 했다.
“더없이 빛나는 길에 서서, 신의 축복을 받은 위대한 불꽃의 지배자이시며, 열하나의 강과 일곱 산맥의 군주이시며, 법과 정의의 수호자이신 황제 폐하께 아셰리드엘 페르난이 일곱 신께서 허락하신 미천한 재주를 바칩니다. 변치 않는 충성과 빛나는 영광을 맹세합니다.”
“다르헬트의 대영주이자 두 탑의 지배자가 아셰리드엘 페르난을 가호하며 제국의 법사로 임명하노라.”
“신을 공경하며, 법을 준수하고,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심장도 목소리도 떨렸지만 완벽하게 인사를 해냈다. 황제의 커다란 손이 머리 위에 닿았다.
린델은 곧 그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것으로 짧았던 충성 의식이 끝났다.
튤립의 방이라고 불리는 황제의 화려한 사실(私室)에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두 명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새처럼 떠드는 것은 황태녀였고, 황제는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게 예쁜 금발은 오랜만에 봤어요. 엠드란으로 시집 간 텐샨 영애의 머리가 그랬었죠. 흐음. 그이는 머리를 기르면 어울릴 것 같은데,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카시어스는 옆자리에 앉아 흥겹게 종알거리는 빅토리아를 보았다. 그녀는 카시어스의 후계자였다.
빅토리아 황태녀.
얼마 전에 열여덟 살이 된 그녀는 레이스가 잔뜩 달린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와 구두로는 마음껏 뛰어다닐 수 없다면서 남장을 즐겨했다. 시집을 가지 않은 숙녀의 취미 치고는 고약했지만, 빅토리아는 제국의 후계자였다. 지금도 드레스가 아니라 보라색 프록코트를 입고는 탐스러운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상태였다.
카시어스는 어른스럽고도 유능한 후계자가 금발 머리를 동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빅토리아는 자신도 금발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리를 종종 했었다.
편의에 의해 남장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다니는 지금에도 그 마음은 변함없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가발을 써. 빅토리아.”
“예전에 써 봤는데, 안 어울렸어요. 애석하게도요. 그래서 머리가 길면 어울릴 것 같죠?”
씩씩하게 대답한 빅토리아가 다시 화제를 되돌렸다. 카시어스는 머리가 긴 린델을 떠올려보았다. 잘 어울릴 것 같긴 했다.
“잘 어울리긴 하겠군.”
“폐하께서 한 번 길러보는 게 어떠냐고 말씀해 보세요.”
“그가 기르고 싶으면 기르겠지.”
“그러니까 넌지시 언질만 주세요.”
제국의 황태녀가 황제에게 하는 부탁치고는 괴상했다. 하지만 카시어스도 빅토리아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저 카시어스가 빅토리아의 청에 대한 답을 했을 뿐이었다.
“짐의 마법사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
궁중에는 중의적인 화법이 만연했다.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는 작은 제스쳐, 관례적인 행동과 오랜 격언이 암시하는 복선은 또 다른 언어였다. 황궁에서 나고 자란 빅토리아는 궁중 화법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황제의 대답이 간섭을 하지 말라는 꽤나 직접적인 경고라는 것을 당장에 알아차렸다.
“폐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따라야지요. 그래도 아쉽긴 아쉬워요.”
빅토리아는 진심으로 아쉬워했지만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경고의 의미는 명확했다. 간단하다면 간단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정도로 그 마법사가 특별하다는 뜻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황제라고 불리는 카시어스였지만 빅토리아에게는 너그럽기 짝이 없는 보호자였다. 사소한 부탁은 물론이고 조금 무리한 청이라도 모두 들어주었다. 물론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엄격한 조건이 붙긴 했지만 말이다.
이런 식으로 경고를 듣는 것은 정치적 논의를 할 때가 대부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은 확실히 이례적이었다.
빅토리아는 알현장을 가로질러 걸어오던 청년을 떠올렸다. 반짝이는 금발과 마법사의 순백의 로브에 빛나는 햇살이 더해지자, 그의 모습은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봄의 하늘빛을 닮은 눈동자는 황제만을 향했다. 올곧은 시선은 아주 좋은 느낌이었다.
그가 정말 작은 할아버지를 사로잡았단 말이지.
황제의 피후견인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뜬소문이라고 여겼다. 황제는 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인간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황제라고 목석은 아니었다. 가볍게 연애를 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정부를 두기도 했지만 오래 간 적도 진심인 적도 없었다.
열 살부터 지금까지 8년 동안 지척에서 황제를 지켜보았던 빅토리아는 자기 방어 본능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짜증을 사전을 차단한 것이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공무로 인한 스트레스만으로도 차고 넘친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셨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황제의 손가락에 끼어 있는 여섯 개의 반지는, 강력한 힘을 상징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까칠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귀부인과의 밀고 당기는 연애를 가볍게 즐기기는 해도 진심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 황제께서 공식화 하지 않은 연인을 두었다. 남자인 것보다는 황제가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게 핵심이었다.
열심히 짝사랑 중인 빅토리아는 황제를 응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싫어하실 것 같아 입을 다물고는 다른 주제를 언급했다.
“할마마마께서 아셰리드엘 경을 가든파티에 초대하시고 싶으시대요. 꼭 참석하시기를 바라신다는데, 폐하의 가부를 여쭙는 것이 먼저겠지요?”
“태후께서 고귀한 전령을 두고 계시군.”
“유능한 전령이기도 하지요.”
카시어스는 잠시 생각했다. 태후가 린델을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뻔했다. 소문의 주인공이 정말로 사내인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카시어스의 혼인을 가장 반대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고, 다음이 태후였다.
어린 손녀의 목숨만 부지하길 원했던 황태후는 이제 차기 황제가 될 빅토리아의 위협이 되는 것은 모두 경계했다. 린델이 남장을 한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황태후의 반응은 예상된 것이었다.
의심 많은 행동파인 태후의 불안을 불식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신 주는 게 있으면 받아야 하는 것도 있었다.
“빅토리아. 태후께 너도 근위 기사단과 함께 몬스터 사냥에 참가할 거라고 말씀드려.”
“정말요?”
“태후마마를 설득하는 것은 네 몫이야.”
“오, 그거야 말로 자신 있어요. 맡겨주세요.”
빅토리아는 황제와 태후가 무엇을 주고받으려는지 깨달았다. 그 사이에 껴서 이득을 보는 것은 자신이었다. 전쟁터는 경험했지만 몬스터는 처음이었다. 고대의 괴물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렇게 들떠 있는 사이에 아셰리드엘 경이 도착했음을 시종이 알렸다. 충성 서약을 하고 마탑에 들러 정식 입회식을 마치고 온 그는 여전히 백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무궁하신 광영의 폐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사석이었기 때문에 린델은 무릎을 살짝 굽혀 반절만 했다. 황제가 눈짓으로 옆을 가리켰다.
“빅토리아를 소개시켜 주지. 짐의 후계자다.”
“아셰리드엘 페르난이 황태녀 전하를 뵙습니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근위시종에게서 황태녀가 동석하고 있다는 것을 언질 받았다. 인사법은 배워두었기 때문에 당황하는 일 없이 정중하게 절을 했다.
탐스러운 흑발을 땋아 내린 빅토리아는 남장을 하고 있었다. 워낙 미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여인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았지만, 당당한 태도는 귀부인의 그것과 달랐다.
눈동자는 카시어스와 닮은 황금색이었다. 골격도 비슷해서 검은 머리로 변했던 카시어스를 떠올리게 했다.
“반가워요. 아셰리드엘 경. 그거 알아요? 금발이 매우 예쁘다는 거. 반짝반짝 거려요.”
“과찬이십니다. 전하.”
“뭐. 사실인걸요.”
린델은 활짝 웃는 빅토리아의 미소에서 호의를 느꼈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는 터라 따라 웃지 못했다. 대신 생각도 못한 칭찬에 뺨이 붉어지는 것도 막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