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이쪽에 앉도록 해.”
린델은 황제가 눈짓으로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빅토리아가 흥겨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기뻐요. 서커스 공연장에서 마법사라는 게 밝혀지다니. 기록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대처럼 극적으로 마법사가 되는 경우는 없을 거예요.”
가벼운 인사말 끝에 질문이 쏟아졌다. 알현장에서 떨리지는 않았느냐, 백색 로브에 마법이 걸려 있어서 때가 잘 타지 않는다는 것은 아느냐, 닐르에 온지는 얼마나 되었느냐, 황제 폐하는 어떻게 만났느냐.
카시어스가 빅토리아를 제지하지 않았고 그래서 린델은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대답했다. 빅토리아의 훌륭한 화법 때문에 전체적인 분위기는 꽤나 화기애애했다.
“화담을 나누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네요. 그럼 두 분이서 대화를 나누고 계세요. 저는 폐하께서 하명하신 일을 마무리하러 가야겠어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빅토리아가 퇴실을 청했다. 카시어스는 그녀가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린델은 카시어스의 눈짓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 빅토리아를 소리 없이 배웅했다.
린델은 빅토리아가 방을 나서고 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빅토리아를 만나본 소감은 어떤가?”
“활달하시고 아주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카시어스의 물음에 린델은 아주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카시어스 경이 황제 폐하라는 것을 인지한 것과 동시에 지금껏 그에게 허물없이 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궁은 숨 막히도록 으리으리했고, 사람들의 시선은 따가웠다. 지금도 시종들이 방 곳곳에 대기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계속 일깨웠다.
그런데 카시어스가 웃음을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래서야 오해를 받아.”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평소대로 반문하고만 린델은 급히 해명의 말을 덧붙였다.
오해라니? 무슨 오해?
자신이 오해 받을 짓을 한 건가 급히 머리를 굴리던 린델은 카시어스의 손짓에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린델의 옆에 앉아 있던 카시어스 역시 몸을 기울이고는 손으로 가리기까지 하며 귓속말을 했다.
“황제가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고 알려진 네가 황태녀의 미모를 칭찬하면 다들 무슨 생각을 할까?”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아주 멋졌지만 내용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린델은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카시어스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자신이 이런 일에 무지하다지만 카시어스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아들었다.
천천히 의자에 기대어 앉은 카시어스가 여전히 즐거운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아주 고전적인 소재지. 안 그래?”
“저는 결단코 그런 뜻으로―.”
“그대의 충정이야 내가 잘 알지. 그러니까 이건 내가 속 좁게 심술부리는 거야.”
카시어스가 한 번 더 손짓을 했고 린델은 의심 없이 몸을 기울였다. 이번에도 귓속말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부드러운 것이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린델은 멀어지는 카시어스의 얼굴을 보고서야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렸다.
입맞춤이었다.
카시어스와 입술이 닿았다는 사실에는 꽁꽁 얼어붙었다가, 방 안에 시종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을 때는 사색이 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손으로 입을 막으려고 하려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폐…하?”
“왜?”
얼굴이 빨갛게 변한 린델이 더듬더듬 카시어스를 불렀다. 그리고 카시어스는 멀뚱한 얼굴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시침을 뗐다.
그런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시종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웃음을 참았다. 황제의 사실에서는 별별 일들이 일어났고, 훈련된 시종들은 당황하지 않을 정도로 노련했다.
황제와 그의 피후견인은 소문대로 꽤나 사이가 좋아보였다. 귓속말은 아무도 들을 수 없었지만 그 후에 오간 대화와 몸짓은 연인들의 그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황제는 파락호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순진한 피후견인을 놀려댔다.
좋은 이야기 거리였다. 그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저마다 끈이 닿아 있었다. 끈 저쪽에 있는 귀인들은 황제의 피후견인에 대한 정보를 목말라 했다. 방금 있었던 일들을 알려주면 주머니가 두둑해질 것이다.
카시어스는 그런 시종들의 생각을 꿰고 있었다. 입맞춤을 한 것은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자극적인 소문을 적당히 확인시켜줘야 했다. 린델의 반응이 극적이라서 흥겨운 것은 덤이었다. 무어라 입술을 달싹거리던 린델이 아무 말도 못하고 억울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다시 흥이 난 카시어스는 한 번 더 손짓을 했다. 린델이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순순히 몸을 숙였다. 이번에는 귓속말이었다.
“잘 하고 있어.”
짧은 응원에 린델의 눈빛이 또 변했다. 사기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아서 카시어스는 웃었다. 이곳에서는 황제도 함부로 믿으면 안 되는 법이라고 가르쳐 주는 대신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을 한 명 불렀다.
“이드나카.”
카시어스의 부름에 대기하고 있던 중년의 시종이 다가왔다.
“아셰리드엘. 짐의 배행 마법사로서 황궁 출입을 허락한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3일에 한 번씩 입궁하고, 이드나카 뒤만 따라다니도록 해. 그림자처럼.”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드나카. 내일부터 아셰리드엘의 입궁을 도와라. 혼자 돌아다니지 않도록 해.”
“명심하겠습니다.”
린델은 이드나카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싱긋 웃어 보인 그는 곧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미 카시어스에게서 적당한 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언질을 들은 린델은 당황하지 않았다. 사람을 따라다니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 당장은 카시어스 얼굴 보는 게 힘들었다. 정확히는 자꾸 그의 입술에 시선이 가려고 해서 난감했다.
“날도 좋으니 같이 걸으면서 정원을 구경할까?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찾아가지 못할 테니까,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야지”
카시어스는 산책 준비를 하라고 손짓을 하면서 의미심장한 암시를 보란 듯이 뿌려댔다. 황제와 단 둘이 정원을 걷는 것은 특별한 총애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오늘밤에는 찾아가지 못한다고도 해 놨으니까 오늘 저녁에 귀부인들의 부채를 넘어 오갈 이야기는 뻔했다. 넘쳐나는 정보를 소화시키다보면 관심이 식어버리는 것은 한순간이 될 터였다.
“예. 알겠습니다.”
어떤 이유로 산책을 하자고 하는지 알아챈 듯 린델이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답을 했다. 눈치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연기는 별로였다. 어차피 경험이 쌓이면 해결되는 문제이니 조바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가쉽 거리를 던지면서 아끼는 피후견자의 성향까지 파악한 카시어스는 여유로웠다. 그래도 린델이 필사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 하지 않았다.
그는 한 번 더 린델을 손짓으로 부르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자꾸 그렇게 짐의 입술만 보면 진짜 오해할 수밖에 없어.”
스스로가 듣기에도 얄미운 농이었다. 린델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변했다. 또다시 억울함이 눈가에 매달렸다. 그러나 조금 전과는 달랐다.
“잠시만 부탁드립니다. 폐하.”
카시어스는 린델의 부탁에 기꺼이 몸을 숙여 주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크라바스로 감싼 목덜미까지 빨개진 린델이 떨림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아주 작게 말했다.
“앞으로 미리 언질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게요.”
부탁을 하는 린델의 뺨과 목은 빨갛고 표정은 비장했다. 카시어스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웃음을 짓고 말았다.
“누구의 부탁이라고 거절할까. 다음부터는 꼭 그러도록 하지.”
목적어가 빠진 확답을 알아듣는 사람은 린델 뿐이었다. 시종들은 그저 소문의 진위를 새삼 확인할 뿐이었다. 두 사람의 좋은 분위기는 산책까지 이어졌다.
그날 오후, 살롱과 파티장에서 황제와 그의 피후견인 이야기가 가득 넘쳐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깃털 베개는 폭신했고, 커다란 침대는 안락하기 짝이 없었다. 해살의 향기가 나는 시트는 부드럽기만 했다. 숙면을 위한 최고의 것들이 린델을 둘러쌌다. 밤의 어둠이 더해지자 모든 것이 완벽해졌다.
그런데도 린델은 쉬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린델은 어느 장소에서도 쉽게 잠드는 재주가 있었다. 맨바닥에서도 모포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침대에 눕고도 계속 정신이 맑았다.
왼쪽으로 웅크려 누워 있던 린델은 베개를 고쳐 쥐고는 몸을 반대쪽으로 틀었다. 가능하면 편한 자세를 잡으려고 꿈틀거리며 시트를 어깨까지 잡아당겼다.
엄청난 하루였다.
아침부터 애쉰 부인의 도움을 받아 잔뜩 치장을 하고, 마차를 타고 닐르의 거리를 달렸다. 그리고 제국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황궁 라드라비그에서 황제께 충성을 맹세했다. 소문만 무성하던 마탑에도 들어가 봤다.
특히 충성을 맹세하던 순간은 영광 그 자체였다. 눈을 감으면 찬란하기 짝이 없던 감동과 함께 함께, 따갑게 꽂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금 느껴졌다. 넋이 나갈 정도로 눈부신 황궁은 놀랍도록 차가웠다.
잠을 설치는 이유는 명확했다. 어제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조여들었다. 뭐든 하겠다고 각오를 했지만, 정말 잘 해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뼈 째 씹어 먹힐 거라는 경고가 불쑥 솟아오를 때마다 불안감도 커졌다.
무엇보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카시어스가 문제였다. 다정하고도 배려심이 넘치던 후견인께서는 지금까지와 달리 꽤나 심술궂게 굴었다. 예고도 없이 입술을 훔치고는 뭐 어떠냐는 식으로 놀려댔다.
순간 입술에 닿았던 감촉을 떠올리고 만 린델은 인상을 쓰고는 다시 몸을 뒤척거렸다.
존경의 의미로 사제님들의 손에 입을 맞춘 적은 꽤 많았지만 직접 입술끼리 맞댄 것은 처음이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민망하고, 간지럽고, 부끄러웠다. 솔직히 입맞춤도 충격이었지만, 그걸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더 민망했다.
얄궂은 소문이 진짜라고 믿게 만들기 위한 최선의 방도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청빈과 순종을 맹세한 종사의 삶을 살다가 하루아침에 황궁 한가운데서 낯부끄러운 연기를 하려니 심란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황제는 남자였다. 사교계에서는 남자들끼리도 연애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정말 다른 세상이었다.
“모르겠다.”
린델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모르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제멋대로인 운명이 어디까지 자신을 끌고 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누명을 벗길 수 있다면 뭐든 해야 했다. 입맞춤이든 뭐든 간에 완벽하게 해내야 했다.
린델 시어드라는 이름을 되찾을 수 있다면. 잉그란 사제님을 당당히 만날 수 있다면.
겨울이 지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날을 상상하자 또다시 심장이 울렁거렸다.
“잠은 다 잤네.”
하루 종일 스케줄이 빡빡했다. 몸이 피곤한 건 분명한데, 흥분과 긴장이 가라앉지 않아서 정신은 또렷한 상태였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잠을 설칠 것 같았다. 내일 입궁을 해서 황제를 따라다닐 생각을 하면 아득했다.
린델은 한 번 더 뒤척거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제와 같다면 계속 누워있어 보았자 소용이 없었다.
맨발로 침대를 빠져나온 린델은 적당한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계절은 이제 여름이었다. 창을 넘어든 달빛은 로벅의 침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방은 고요했고 바람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감사드립니다.”
린델은 눈을 감아 기도를 올렸다.
지금까지의 행운에는 감사를 올리며, 그리고 앞으로의 평안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