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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21/137)

-21화-

어려서부터 신전의 종사로 자란 린델은 다목적 일꾼이었다. 청소와 빨래는 수준급이었다. 요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년 농번기가 되면 낫을 들고 밀을 수확했고, 양털을 깎았으며, 심지어는 도축도 했다. 사제님을 도와 시신을 염하기도 했었다.

린델은 언제나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황궁에서 황제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근위 시종들과 함께 알현실 한쪽에 자리 잡고 선 린델은 솔직히 이렇게 하는 일이 없어도 되나 싶었다. 황제의 배행 마법사라는 근사한 직책이 주어졌지만 특별한 임무 같은 건 없었다. 카시어스는 이드나카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눈으로 보고 익히라는 명령을 내렸다.

린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화려한 황궁과,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과, 또한 화려한 미사여구로 황제에게 환심을 사려고 하는 이들뿐이었다.

눈부시도록 화려하다는 것만 빼면, 그 모양새는 매년 하례 인사를 하러 영주님을 찾은 양치기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양치기의 손에 양털이 들려 있는 것과 달리 상인의 손에 들린 것은 아름답기 짝이 없는 비단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동부의 거상이라는 슈웨라 남작은 동대륙에서 온 특별한 비단을 알현실에 늘어놓았다.

“이것은 동대륙의 여인들이 천사의 날개처럼 팔에 걸고 다니는 것입니다. 아주 가볍고 아름다운 비단이지요.”

슈웨라 남작이 들어 보인 것은 잠자리 날개마냥 뒤가 비쳐 보이는 푸른 비단이었다. 특별한 비단의 모양새에 알현실이 술렁거렸다. 비단에 별 관심이 없던 린델도 세상에 저런 비단이 있나 싶어 감탄했다.

그 사이 시종들이 커다란 족자를 펼쳤다. 할엔라드 제국의 채색 기법과는 전혀 다르게 그려진 여인의 초상화였다. 동대륙의 전통복장을 한 여인은 마치 꿈결처럼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동대륙에서 유명한 공주님의 초상화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만, 그림만으로도 한숨이 나올만한 미인이지 않습니까.”

“이런. 미인은 위조가 가능한 그림으로 보는 게 아니야. 슈웨라 남작. 실물을 봐야지.”

카시어스가 가볍게 농담을 하자 알현실이 웃음이 넘쳤다.

“초상화가 중요한 게 아니지요. 공주님께서 남기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남작의 손짓하자 시종들이 상자 안에서 비단을 펼쳐보였다. 정확히는 비단 가운이었다. 뒤가 비쳐 보이는 연분홍과 연노랑, 그리고 하늘색 가운에는 크고 작은 꽃들이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린델 역시 알현실 한 가운데 꽃이 피어난 듯한 광경에 놀라고 말았다. 장미, 모란, 작약, 이름 모를 꽃들은 무척이나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여름의 정원을 그리워하는 태피스트리에 비할 수 없는 화사함이었다.

“일급 장인들의 혼이 들어간 작품입니다.”

“여름의 꽃을 담았군.”

“고귀한 귀부인들을 위한 것이지요. 그리고 달콤한 연인을 위한 선물이기도 합니다. 동대륙의 왕족 사이에서는 필수적인 혼수품이지요.”

카시어스의 칭찬에 슈웨라 백작이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확실히 아름다운 여인들을 위한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던 린델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어제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린델을 따라다녔다. 황제의 배행 마법사가 된 첫날인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사를 상징하는 약식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 황제를 따라 복도를 걷자 시선과 수군거림이 함께했다. 하지만 알현장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는 것은 단연코 황제인 카시어스였다. 알현장 한 구석에 서 있는 자신은 입장 때만 빼고는 한 톨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시선에 린델은 자신이 뭔가 실수라도 했나 싶었다. 그러다가 한 박자 늦게 슈웨라 남작이 칭한 달콤한 연인이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자신을 힐끗 거리는 사람들의 눈빛이 묘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런.

린델은 입술을 깨물고 싶은 것을 참았다. 당황했다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바보나 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린델의 얼굴은 바람대로 무표정했고, 남작의 의미심장한 말을 카시어스가 적당히 받아주었다.

“훌륭해. 남작의 사업이 더없이 번창하겠군,”

“망극하옵니다. 폐하. 소인의 보잘 것 없는 봉납품이 폐하를 조금이나마 기쁘게 해드렸기를 바랍니다.”

정중하게 절을 한 슈웨라 백작이 뒷걸음질을 치며 퇴실했다. 시종들의 손에 알현실에 놓인 상자와 비단들이 재빠르게 치워졌다. 귀부인들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화사한 여름꽃의 가운을 따라 움직였지만 린델은 다음 내방객에 집중했다.

아무리 화려하고 멋진 것들이 눈앞에 있어도 린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망각하지 않았다.

알현이 끝났을 때, 린델은 동대륙에서 왔다는 여름꽃의 가운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카시어스가 세 벌 중에 하나는 네가 가져야 한다고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제가 그걸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카시어스와 함께 분수 주변을 걷던 린델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혹시나 분수의 물소리 때문에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종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 세 벌 중에 하나는 황태후께, 하나는 빅토리아에게 갈 거야. 그럼 남은 하나는 네가 받아야지. 하늘색이 좋겠지?”

빙그레 웃는 카시어스의 목소리는 확실하게 들렸다. 남은 하나는 네가 받아야 한다고 한 게 맞았다.

“전 남자인데요?”

“너는 내 애인이잖아. 다른 여인에게 줬다가는 문제가 생겨.”

“폐하께서 가지지면 됩니다. 분명히 저보다 더 어울리실 겁니다.”

린델은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보다는 카시어스에게 더 어울렸다.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카시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서야 아무 소용이 없어. 장단을 맞춰줘. 가운이야 장식용으로 써도 되니까. 이왕 소문이 났는데 제대로 총애를 해줘야지.”

“네.”

장단을 맞춰 달라는데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린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운 가운은 애쉰 부인에게 맡겨야 할 것 같았다.

나름 심각한 린델을 보며 카시어스는 쓴웃음을 삼켰다. 사내라서 그런지, 아니면 물욕이 없어서 그런지, 꽃무늬 가운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심성이 착한 녀석이 황제의 선물을 받고도 감사의 인사를 올릴 생각을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슈웨라 백작이 봉납한 비단 가운은 그의 말대로 왕족들이나 쓸 만한 것이었다. 알현장 한 가운데 던져두면 남녀 불문하고 서로 가지려고 혈안이 될 만한 물건이었다. 그런데도 린델은 좋아하질 않는다.

욕심쟁이가 아니라는 것은 축복이었지만 그래도 눈치는 키워야 했다. 주변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면 무례하다고 책잡히기 딱 좋았다.

“어떠냐? 황궁에서 하루를 보낸 소감이.”

카시어스는 당장에 뭐라고 하는 대신에 걸음을 옮기며 좀 더 근원적인 것을 물었다. 린델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좀 더 화려하고 격식을 차렸지만……. 음, 비슷했어요.”

황궁은 화려하고, 격식을 차리고, 뭐든 규모가 컸다. 그럼에도 로벅에서 영주님의 홀을 찾던 소작농과 양치기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네가 아는 그들보다는 훨씬 더 욕심이 많을 거야. 그리고? 다른 건?”

“폐하께서 많이 바쁘신 것 같았어요.”

“내가?”

“회의도 길었고, 알현도 2시간이나 넘게 하셨어요. 식사 시간에도 사람을 만나셨고요. 그들이야 폐하를 뵙고 자리를 뜨면 그만이지만, 폐하께서는 내도록 그들을 상대하셨잖아요. 읽어야 할 서류도 많으시고. 오늘만 이러신 것도 아니신 것 같아서. 그래서 많이 바쁘시구나 했어요.”

린델은 꽤나 진지했다. 겨우 반나절뿐이었지만 린델은 황제가 얼마나 바쁜지 체감했다. 오전에는 대신들과 회의를 했고, 점심을 먹으면서도 누군가를 만났고, 오후의 절반은 알현으로 시간을 보냈다. 거기다 틈틈이 서류를 읽고 사인도 했다. 하루 스케줄이 빡빡한 게 눈에 보였다.

“이런. 너는 그 말재주만으로도 출세했을 거야. 그것도 아주 높은 곳까지.”

“제가요?”

“그래. 내가 보장하지. 아주 감동받았어.”

린델은 카시어스가 뭐에 감동받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린델을 보며 카시어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아부도 이런 아부가 없었다. 사실만 열거했지만 그 기저에 깔린 것은 바쁘니까 힘들어 보인다는 연민이었다. 본인이 의식하지 않은, 선한 마음에서 우러러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카시어스는 꽤나 감동을 받고 말았다.

이렇게 착한 녀석이라니.

진짜 제대로 출세를 시켜줘야 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출세를 하려면 그 전에 배워야 할 게 많았다. 카시어스는 가장 시급한 것부터 떠올렸다.

“열흘 후에 황태후의 가든파티에 참석할 거야. 정식으로 데뷔하는 게 아니니까 오늘처럼 내 뒤만 따라다니면 돼.”

“네. 알겠습니다.”

간단한 명령이었기에 린델은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황제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제대로 데뷔를 하라면 춤을 배워야 해.”

“춤……이요?”

카시어스와의 이야기는 언제나 제멋대로 튀었다. 린델은 이번에도 걷다 말고 카시어스를 보았다. 차양이 만들어낸 그늘 아래였지만 카시어스의 미소는 화사하기만 했다.

“그래. 춤. 신사의 덕목이지. 짐의 아끼는 피후견인이 무도회에서 벽 꽃이 되는 꼴은 볼 수 없지.”

“제가 춤을 춰야 합니까?”

“당연하지. 데뷔탄트에서 춤을 못 추면 되나. 그리고 때가 되면 나랑도 춰야 해.”

“?”

“왜? 나랑은 싫어?”

린델은 한 번도 춤을 춰 본 적은 없지만 그게 뭔지는 알았다. 음악에 맞춰 남녀가 약속된 동작을 하는 것이었다. 청빈과 정결, 순종을 기본으로 하는 삶을 살아왔기에 여인의 손을 잡고 춤을 춰야한다는 사실이 까마득했다. 그런데 그에 더해 황제와도 춤을 춰야 한단다.

카시어스가 즐겁게 웃고 있었지만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린델은 사실 확인을 위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춤이란 남녀가 함께 추는 거 아닌가요?”

“보통은 그렇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동성끼리 추기도 하지. 그러면 다들 좋아해.”

“좋아한다는 의미는 다양하지요.”

다들 좋아한다는 게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린델은 아주 약간의 항의를 담아 대꾸했다. 린델은 자신이 엄청난 유명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황제의 피후견인이자 비공식 애인. 직접 귀로 들은 바는 없지만 고귀하신 분들의 부채 너머로 자신의 이름이 오간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그럼 상황에서 자신이 황제와 춤을 추면 다들 좋아하긴 할 것이다.

린델은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심각하게 뛰었다. 크게 긴장하는 버릇은 없었는데 이곳에 와서는 소심쟁이가 된 것 같았다. 카시어스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야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으니 뻔뻔해지라고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을 즐길 수 있어야지.”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막 두근거려요.”

“벌써부터?”

“네. 원래는 안 그랬는데, 소심해졌나 봐요.”

린델은 솔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고했다. 카시어스는 심각하기 짝이 없는 린델을 보며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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