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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2/137)

-22화-

소심한 성격이었다면 어제 알현장에서 기절을 하든, 말을 더듬든 했어야 했다. 그러나 린델은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 멀쩡한 얼굴로 충성을 맹세했다. 아무리 연습을 했다 하더라도 목소리조차 떨리지 않는 것은 소심함과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빨개진 얼굴을 하고도 미리 언질을 달라고 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린델은 표정이 다채로운 편이었다. 다정히 웃을 줄 알고, 쉽게 얼굴이 빨개졌다. 감탄도 잘했다. 그런 녀석이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자신의 뒤를 따랐다. 그냥 낯선 곳도 아니고 황궁 한가운데서 그러기란 쉬운 법이 아니었다.

본인은 소심하다고 여기고 있지만 그는 꽤나 강심장이었다. 그저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이었다.

“누구나 처음이 있는 법이지. 어쨌든 데뷔 첫 춤은 내 것이야.”

“네.”

자신의 첫 춤은 황제의 것이다. 린델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셰리드엘.”

“하명하십시오. 폐하.”

린델은 카시어스가 아셰리드엘이라고 부르면 정신을 바짝 차렸다. 특별히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말을 하겠다는 의미라는 것을 눈치 챘다.

“지금껏 짐이 선물을 주고도 감사의 인사를 받지 못한 적이 여럿 있기는 하지만, 그 목록에 네 이름을 넣을 생각은 없다. 그러니까 제대로 인사해.”

말투는 평이했지만 그 내용은 린델을 놀라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꽃무늬 가운을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린델은 변명을 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잘못한 건 잘못한 거였다. 지금까지 ‘나’라고 지칭하던 카시어스가 ‘짐’이라고까지 했을 정도였다.

“소신이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고도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폐하.”

“용서는 이미 했으니, 감사하다고 해야지.”

“감사합니다. 폐하.”

“황제의 선물은 특별한 법이지. 시기와 질투로 눈이 멀어버린 놈들에게 빌미를 주지 마.”

친절하기 짝이 없는 설명이었다. 고대로부터 왕과 황제의 선물은 특별하다. 린델은 권력자의 선물에 얽힌 여러 고사들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아닌 작은 선물이 분쟁의 씨앗이 되곤 했다. 이제 꽃무늬 가운은 잃어버려서도 상해서도 안 되는 것이 되었다.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한 번 입어보기는 해.”

“폐하?”

“그래야 착용감이 어땠는지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입어는 봐.”

“그냥……. 너무 소중해서 감히 입어볼 엄두도 못 내고, 고이 모셔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쑥스러운 듯 뺨을 붉힌 린델의 거절은 부드러웠다. 그래서 카시어스는 밀어붙이지 않았다. 어차피 가운은 린델의 것이 될 테니, 언젠가 입혀 볼 기회가 있을 터였다. 그렇게 한담을 나누며 분수 주변을 돌고 있는데 근위 시종이 가까이 다가왔다.

“폐하. 재상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카시어스가 손짓을 하자 그가 재상이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알렸다. 짧은 산책 시간이 끝난 것이다.

“네 말대로 짐이 꽤나 바쁜 모양이다. 아셰리드엘, 오늘 너의 일정은 이걸로 끝났다. 한 눈 팔지 말고 돌아가거라.”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짐의 집무실에서 네가 들을만한 이야기는 몇 없어. 지루하게 기다리는 것보다 편히 쉬는 게 나아.”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손을 잡아.”

뜻밖의 명령에 린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카시어스가 내민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손을 잡아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상대가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말이다.

린델은 맞잡은 손과 카시어스를 번갈아 바라보던 린델은 웃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용감하군. 애쉰 부인에게 춤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면 알아서 해 줄 거야. 부인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까지 명령을 내린 카시어스가 훌쩍 자리를 떴다. 그를 배웅한 린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드나카였다. 린델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녀야 하는 근위 시종은 오늘 아침에도 저택까지 직접 데리러 왔었다. 이번에는 배웅까지 해 줄 모양이었다.

“돌아가시겠습니까?”

“네.”

이드나카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린델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린델이 황궁에서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반겨준 것은 역시나 애쉰 부인이었다. 그녀는 린델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면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냐면서 살갑게 물어봐주었다.

“귀한 선물을 받고도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을 깜빡하고 말았어요. 엄청난 실수였는데, 괜찮다고 해주셨어요.”

“폐하께서는 너그러우신 분이라 작은 실수를 책하지는 않으세요. 그래도 제국의 황제께서 하사하신 선물은 특별하지요. 조심하셔야 해요.”

애쉰 부인도 카시어스와 같은 말을 했기 때문에 린델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실수를 고백하고 충고를 듣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면 된다.

셔츠에 소매를 꿰던 린델은 카시어스가 마지막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 그리고 폐하께서 춤을 배우라고 하셨어요. 부인께 말씀드리면 된다는데. 이러면 되나요?”

“부끄럽지만 제가 훌륭한 춤 선생을 몇몇 알고 있답니다. 멋진 신사분께 춤을 신청받는 것은 언제나 가슴 떨리는 일이죠. 숙녀를 사로잡으려면 훌륭한 춤 실력이 필요해요. 린델 님.”

“제가 숙녀분께 춤 신청을 해도 괜찮은 건가요? 폐하께 실례를 하는 것 같은데요.”

애쉰 부인은 린델과 카시어스가 소문처럼 연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녀가 숙녀분께 춤 신청을 해서 인기를 얻으라고 하는 게 이상했다. 카시어스의 젖유모였던 애쉰 부인은 측근 중에 측근이었고 거대한 연극의 가장 적극적인 동조자 중 한명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럼요. 당연하지요. 내 연인이 멋지고 훌륭하면 더더욱 반하게 되니까요. 인기가 많으면 안달나기도 한답니다. 폐하께서 반하셨다는 매력을 뽐내야지요.”

한때 열혈한 연애 끝에 사랑의 도피까지 했던 경험이 있던 애쉰 부인은 사교계의 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린델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아직 덜 여물었다. 상대를 사로잡을 사랑스러움은 갈고 닦아서 빛내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린델은 애쉰 부인의 조언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카시어스와의 소문이 성립하려면 그만큼 자신에게 매력이 있어야 했다. 카시어스는 다들 믿어줄 거라고 했지만 그건 모를 일이었다.

“폐하께서 첫 춤을 당신과 추자고 하셨는데, 발을 밟지 않으려면 당장에 연습을 해야겠어요.”

“의욕이 넘치시니 좋네요. 당장에 춤선생을 찾아야겠어요. 옷을 다 갈아입으셨으니 이제 쉬세요. 날씨가 더우니까 시원한 음료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환복을 도와주던 애쉰 부인이 옷을 챙겨 자리를 떠났다. 혼자가 된 린델은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보며 뺨을 매만졌다.

며칠 전까지 한가롭게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아니,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로벅에서 약초를 말리고 있었던 자신이 이곳에 서 있을 거라는 건 신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흐음.”

린델은 작게 한숨을 삼켰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잔뜩 있었다. 모든 것을 한 번에 해 낼 수는 없겠지만 부지런을 떨어야 할 때였다.

스스로를 몰아붙이는데 능숙한 린델은 자신이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늦은 여름. 린델은 해도 뜨기 전에 일어나 명상과 기도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면 하녀들이 챙겨 온 세숫물에 씻고, 간단한 요기를 한 다음에. 승마복으로 갈아입고 마장으로 향하는 것이 첫 일과였다.

황제의 배행 마법사로 황궁을 드나드는 때를 제외하면, 린델은 어린 귀족 자제들이 배울 법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승마, 예법, 교양, 마법, 그리고 춤까지 배웠다.

벨룬드 공작 저택에는 반질반질한 바닥을 가진 훌륭한 무도장이 있었다. 한동안 사람이 찾지 않은 무도장은 린델의 연습장이 되었다. 창과 문을 활짝 열어두고 연습용 오르골에 맞춰 춤 연습을 하는 것이 린델의 오후 일과였다.

“엇.”

오르골에서 흐르는 미뉴에트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던 린델은 손동작이 헷갈리는 바람에 발이 꼬이고 말았다. 균형을 잡을 새도 없이 휘청거리는 것을 같이 미뉴에트를 추던 톨레로가 잡아주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아. 네. 괜찮아요.”

린델은 자세를 바로 하며 멈춰 섰다. 음악에 맞춰 다음 동작을 해야 하지만 머릿속이 뒤엉켜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숨을 고르던 린델은 톨레로를 올려다보았다. 애쉰 부인이 최고의 춤선생이라고 소개한 그는 느긋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럴 때는 솔직한 게 최고였다.

“처음부터 다시 하죠. 다음 동작이 기억나지 않아요.”

“그것보다는 잠시 쉬는 게 좋겠습니다. 많이 지치셨어요.”

“네.”

린델은 톨레오의 다정한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무도장 가운데서 시종들이 대기하고 있던 곳으로 이동했다. 그 사이 시종이 오르골을 껐고, 또 다른 시종이 린넨 수건과 시원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물을 마시자 열이 가라앉으면서 어지러웠던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상태에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게 또 있나 싶었다. 알현실에서 충성을 맹세하는 연습을 할 때와 또 달랐다. 그때는 같은 말을 계속 더듬어서 바보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춤이 있었다. 카드리유, 미뉴에트, 가야르드, 바스당스, 파반, 살타렐로, 왈츠. 춤마다 스텝과 손동작이 다 달랐다. 게다가 같은 춤이라도 곡이 달라지면 동작도 달라졌다.

무도회에서 능숙하게 춤을 추려면 1년은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고 톨레로가 설명했다. 카시어스는 가장 유행하는 곡만 몇 개 익히라고 했고, 린델은 가장 기본적인 미뉴에트부터 시작했다.

오늘이 엿새 번째 수업 시간이었다. 하루에 3시간씩 연습한 덕분에 동작은 그럭저럭 다 외웠다. 하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몸 쓰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춤이 되니까 손발이, 그리고 머리가 따로 놀았다.

“내 몸인데,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네요.”

물을 한 모금 더 들이킨 린델은 한탄조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선 톨레로가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껏 한 번도 춤을 추지 않으셨다니 그럴 수밖에요.”

“실수를 하면 머리가 새하얘지는데……. 진짜 바보가 된 것 같아요.”

“초보자들은 다 그러지요.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몸으로 익히는 거니까요. 지금처럼 열심히 하시면 금방 능숙해지실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카시어스는 가을 수확제가 되기 전에는 미뉴에트를 출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톨레로는 그때까지는 충분하다고 했지만 린델은 아무래도 확신을 할 수 없었다.

괜히 조급해진 린델은 톨레로를 재촉해 다시 무도장 한 가운데 섰다. 의욕이 가득한 린델은 해가 지기 전까지 연습에 매진했다. 거의 완벽할 뻔했던 연습은 린델이 마지막에 다시 발이 꼬여 휘청거리다 못해 넘어지는 바람에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넘어진 충격으로 왼 팔에 멍이 든 것은 비극의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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