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할엔라드의 황제, 카시어스는 가끔씩 궁을 비우고 훌쩍 여행을 떠나는 고약한 버릇의 소유자였지만 기본적으로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군주였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정무회의와 알현, 접견을 빼먹지 않았다. 날마다 집무실로 밀려드는 서류를 처리하면서도 관원들을 만났다.
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간단한 행정업무부터, 국가 중대사까지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카시어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정보였다. 그가 귀족들과 대신들을 한 손에 쥐고 찍어 누를 수 있는 것은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시어스는 자신의 눈과 귀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뒤센트 자작을 신뢰했다. 과묵한 사내는 유능하기 짝이 없었고, 그래서 뒤센트 자작의 입에서 루미아나 대공주의 이름이 나왔을 때는 카시어스는 인상을 찡그려야 했다.
“루미아나 대공주가 아셰리드엘의 뒤를 캐고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저택에 식료품을 공급하는 상인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아셰리드엘 경의 고향에 사람을 보냈다고 합니다.”
루미아나 대공주이자 쥴란 공작 부인인 그녀는 이제 제국에 몇 남지 않은 직계 황족으로 카시어스의 누님이기도 했다. 황실 사교계를 휘젓고 다니는 그녀는 암투에 특화된 귀부인이었다.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은 없었지만 황태후를 매우 미워해서 사사건건 서로 대립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 불똥이 황제인 카시어스에게 튈 때도 종종 있었다.
트러블 메이커인 루미아나 대공주는 6순위 황위 계승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카시어스의 감시 대상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런. 욕심쟁이 누님께서 또 무슨 일로 그러실까.”
“황송하오나, 폐하께서 유난히 구시긴 하셨습니다.”
“부정할 수가 없군.”
뒤센트 자작의 가감 없는 지적에 카시어스는 한쪽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확실히 자신이 유난스럽게 굴긴 했다. 린델이 디비티에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숨겨진 애인이라고 해버렸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황제의 숨겨진 애인이란 공공연한 약점을 의미했다. 사교계에 데뷔한 적도 없는, 배경이 전무한 청년의 뒤를 캐기 위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은 넘쳤다. 그래도 그 중에 루미아나 대공주가 있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대공주가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별로 없을 겁니다. 그의 가족이 모두 사망한 것은 확실하고 친인척이라고 불릴만한 관계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외동이었고, 어머니는 고아 출신이었거든요. 거기다 불센부크가 워낙 큰 도시라 몇몇 이웃 말고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 없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카시어스는 가볍게 의자 팔걸이를 두드렸다. 린델의 신분이 가짜라는 것이 밝혀져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필요에 의해 신분 세탁을 했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가 살인 혐의로 쫓기고 있는 수배자라는 것이 드러나도 비호해줄 자신이 있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루미아나 대공주였다. 그녀는 고약한 귀부인의 전형으로 사람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보통이라면 린델이 파티에서 누군가의 발에 걸려 넘어지거나 하는 정도겠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좀 더 질 나쁜 장난이 될 수도 있었다. 루미아나 대공주 때문에 인생 망친 이들이 여럿이라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글쎄. 겨우 뒷조사를 했다고 놀랄 건 없지.”
반역이라도 일으킨다면 모를까, 겨우 가짜 애인의 뒷조사를 했다고 대공주의 목을 조를 수는 없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린델을 괴롭힌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계속 지켜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뒤센트 자작이 집무실을 나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던 카시어스는 입매를 당겼다.
선선대 황제의 막내아들이었던 카시어스에게는 모두 13명의 형제가 있었다. 그 중 2명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고, 황제가 되었던 큰 형은 8년 전에 숨을 거두었다. 그 후 내전으로 7명이 죽었고, 2명은 병사했다. 카시어스에게 남은 형제는 유일한 누이였던 루미아나 대공주뿐이었다.
두 번의 내전 동안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킨 대공주는 꽤나 처세에 능한 편이었다. 사교계의 여왕 노릇을 하며 만족하고 사는 대공주를 쳐낼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린델을 건드린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하나 남은 형제라고 하더라도 해가 된다면 굳이 끌어안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 주면 좋으련만.”
카시어스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미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욕심쟁이들은 만족을 몰랐다.
다시 내전을 치를 생각은 없었다. 두 번의 내전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덕분에 이미 황권은 강해질 대로 강해져 있었다. 대공주가 덤빈다면, 이번에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처리해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던 카시어스는 문득 린델을 떠올렸다.
린델 시어드,
자신의 디비티에.
마지막으로 그의 손을 잡은 것이 바로 어제였다. 3일에 한 번, 린델이 황궁을 떠나기 전. 그 순간은 아주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목이 마른 줄도 모르다가 물을 마시고 나서야 깨닫는 느낌이었다.
그건 마치 중독과 비슷했다. 마력의 영향으로 술에 잘 취하지도, 약도 잘 안 통하는 체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갈의 쾌락은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해지는 순간은 특별하기 짝이 없었다.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야.”
비할 데 없는 쾌락과 별개로 카시어스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린델의 효용성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를 잃어버렸을 때의 타격도 예상해야 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최고가 무엇인지 알아버렸다.
“어떻게든 지켜야 되는군.”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사막을 헤매는 부랑자가 되지 않으려면 보석을 잘 지켜야 했다.
카시어스가 벨룬드 공작 저택을 찾은 것은 해가 지고 난 다음이었다. 목이 마르다고 생각하자 물을 마셔야겠다는 충동에 진 결과였다. 웃는 얼굴로 반겨준 애쉰 부인에게서 낮에 있었던 작은 사고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서재로 향했다.
“넘어졌다고?”
“예. 왼쪽 팔꿈치에 멍이 들었어요.”
“재주가 없는 모양이군.”
“너무 열심히라서 그러세요. 다리에 힘이 풀렸거든요.”
열심히 린델을 비호하는 애쉰 부인을 돌려보낸 카시어스는 지난번처럼 기척을 내지 않고 서재 앞에 섰다. 린델은 이번에도 자신이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을 등지고 소파에 반쯤 눕다시피 한 상태로 책을 읽고 있는 그는 셔츠와 바지만 입고 있었다. 받침대에 올려둔 다리 끝은 맨발이기까지 했다.
무방비한 모습에 카시어스는 소리 없이 웃었다.
린델이 배행 마법사로 자신을 따라다닌 것은 겨우 세 번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별칭이 붙었다.
웃지 않는 냉철의 마법사.
달콤하고도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지고도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는 차가운 표정을 짓는 린델과 어울리는 별칭이라고 했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동감하지 않았다. 린델의 본모습은 꽤나 허술한 노력파였다.
“린델.”
카시어스는 조용히 린델을 불렀다. 그의 반응은 며칠 전과 마찬가지로 극적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가 받침대에 다리가 걸리는 바람에 휘청거렸다. 춤 연습을 하느라 다리가 풀린 게 맞는 모양이었다.
“카시어스 경?”
허둥지둥하며 자리에 선 린델은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곧 볼을 빨갛게 물들였다. 이런 녀석에게 어떻게 냉철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카시어스는 별칭을 붙인 이름 모를 누군가를 비웃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거기 앉아라.”
“네.”
방금 전과 달리 린델이 반듯한 자세로 소파에 앉았다. 카시어스는 맞은편에 자리했다.
“저기……. 의복을 갖추고 오겠습니다.”
린델이 꾸물거리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셔츠에 바지뿐인 차림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황제 앞에 있기에는 무례한 모습이긴 했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 달리 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뭘.”
“감사합니다.”
“춤 연습을 하다가 넘어졌다며?”
“별 거 아니에요. 그냥 발이 꼬여서…….”
부끄러워서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다는 고사를 떠올리며 린델은 슬쩍 시선을 빗겼다. 빙그레 웃는 카시어스가 괜히 미워졌다. 충성 맹세를 연습한 것을 들킨 것도 그렇고, 카시어스에게는 변변찮은 모습만 보여주는 것 같아서 좀 그랬다.
“멍든 것 좀 보자.”
“괜찮아요. 약도 발랐어요.”
“어서.”
카시어스가 손까지 내밀며 재촉했기 때문에 린델은 소매를 걷어 보였다. 넘어지면서 모질게 부딪힌 팔꿈치가 멍이 들었다. 상처를 살짝 건드린 카시어스가 혀를 찼다.
“이런, 많이 아팠겠는 걸.”
“조금이요.”
린델은 카시어스의 손짓에 소매를 바로 했다. 꾹 누르지만 않으면 아프지 않았다.
“처음 배우다 보면 손과 발이 따로 움직이긴 하지. 발도 꼬이고.”
“카시어스 경도 그러셨어요?”
“그래. 아주 고약했지. 그래도 누구처럼 넘어지지는 않았어. 일곱 살이었는데 말이야.”
카시어스의 미소는 능글맞았고 목소리는 가벼웠다. 놀리는 게 분명했지만 그래서 린델은 같이 웃을 수 있었다.
“일곱 살 때부터 배워요?”
“보통은.”
“경께서 저랑 춤추시려면 한참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일곱 살 때부터란다. 까마득히 오랜 시간을 헤아리며 린델은 미리 경고했다. 자신의 상태로 보건데 수확제 전까지 미뉴에트를 익히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그런데 카시어스가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았다.
“난 기다리는 거 안 좋아해.”
“열심히 해도 결과가 나쁠 수 있어요. 라우델리우스 성인의 말씀이시죠.”
“린델. 한 곡이면 돼.”
“네.”
불가능의 확률 따위는 생각지도 않으시는 황제 폐하께서 한 곡이면 된다는데 못한다고 할 수가 없었다. 린델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카시어스가 웃었다.
“오늘 밤, 같이 갈 곳이 있어.”
“혹시…… 서커스요?”
밖에 나가는 일이라면 언제나 환영이었다. 다시 서커스에 가도 상관없었다. 마탑에 입회하면서 받은 반지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종이 반딧불이가 날아오지 않았다.
“서커스는 나중에. 오늘은 더 근사한 곳이야.”
“어딘데요?”
“옷을 잘 차려 입어야 하는 곳이지.”
카시어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린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껏 옷을 잘 차려입지 않은 적은 없어요.”
“좀 더 잘 차려 입어야 해.”
지금보다 더 잘 차려 입어야 하는 곳이란다. 린델은 그곳이 어디인지 상상할 수 없었다.
카시어스의 지시에 따라 린델은 여름용 흰색 비단에 황금실을 수놓은 최고급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황궁에 출입할 때보다 훨씬 화려한 차림이었다. 마법사를 상징하는 흰색 망토는 두르지도 않아도 된다고 한 카시어스는 그제야 목적지를 말해주었다.
가면무도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