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모든 준비를 끝내고 마차에 타기까지는 금방이었다. 적당히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린델은 가면을 얼굴에 대었다가 벗기를 반복했다. 입 주위를 빼고 얼굴 대부분을 가릴 수 있는 검은 가면은 얇은 비단으로 되어 있어서 부드럽기는 했지만 시야가 조금 가려져서 어색했다.
“왜? 불편해?”
맞은편에 앉은 카시어스가 물었다.
“가면 같은 건 써본 적이 없어서 조금 어색해요.”
“괜찮아. 잘 어울려.”
잘 어울린단다. 괜히 들뜬 마음에 린델은 가면을 쓰고 고정시켰다. 가면 파티는 오래 전부터 유행이라고 했다. 우아하게 차려 입어야 했지만, 신분을 감출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분위기라는 것이 카시어스의 설명이었다. 연극이나 연주회, 뱃놀이, 맨손 격투까지 다양한 것을 구경할 수 있다는 말에 린델은 조금 들떴다.
장갑을 낀 손으로 가면의 위치를 살짝 조정하던 린델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카시어스를 보았다. 은실로 수놓은 짙은 남색의 예복을 입은 카시어스는 검은색 머리와 가면 때문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마치 화사한 불꽃처럼 너울거리던 황제는 어디 간 데 없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이 눈앞에 있었다. 지금의 모습만 보면 제국의 황제라는 것을 알아볼 사람이 없을 게 확실했다.
그래도 그는 황제였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돌아다녀도 되는가 싶은 의문이 들었다.
“카시어스 경.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저기, 경께서는 황제시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밤늦게 돌아다니셔도 괜찮으세요?”
“응? 뭐가?”
“너무 무방비하신 것 같아서요. 경을 지킬 호위도 얼마 없고……. 좀 걱정이에요.”
린델은 정말 진지했다. 황궁에서 황제를 뒤따르는 근위 시종과 근위 기사가 10명이 넘었다. 대신들까지 어울리면 엄청난 인원이 복도를 쓸었다. 그런데 지금 카시어스 곁에서는 마부 1명과 시종 1명이 전부였다. 생각해보면 서커스를 보러 갈 때도 그랬다.
신과 영웅의 위업을 기록한 성서에는 군주와 왕, 황제의 업적도 가득 남아 있었다. 성서의 내용을 달달 외우고 있는 린델은 지배자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떠올려야 했다. 야밤에 신전에 안치한 성물을 훔치다가 떨어져 죽은 왕자나, 역시나 야밤에 애인을 만나러 가다가 다리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 죽은 왕과 같은 이야기는 꽤 많았다.
8년 전, 내전의 시발점도 서커스를 구경하던 황위 계승자의 암살에 의해 시작된 걸 생각하면 카시어스의 암행은 꽤나 위험한 것이었다.
그런데 카시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웃음이었다.
“하하하하. 이런, 내가 그렇게 미덥지 못하느냐?”
“그게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부끄럽지만 저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테니까요. 호위가 더 있어야 해요.”
진지하다 못해 심각하기까지 한 린델 때문에 카시어스는 진짜 웃고 말았다. 린델에게 어떻게 사실을 전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제어 반지를 여섯 개나 끼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의 강력한 힘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대인 전투에 특화되어 있는 카시어스는 칼만 잡으면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마력의 강점은 힘의 우위뿐만이 아니었다. 육신은 쉽게 지치지 않으며, 상처도 빠르게 나았다. 단숨에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꿰뚫리지만 않는다면 어떤 혼란 속에서도 빠져나올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린델만 있으면 폭주의 위험 없이 마음껏 힘을 쓰는 게 가능했다.
카시어스는 자신이 엄청 강하다고 설명해야 하는 것이 조금 구차해졌다. 제 입으로 할 자랑이 아니었다. 그래서 적당히 말을 돌렸다.
“괜찮아. 내게 무슨 일이 생겨도 빅토리아가 있으니까.”
“카시어스 경.”
린델이 난감한 목소리로 불렀지만 카시어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를 측근으로 데리고 다니려면 이딴 작은 일탈 따위야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
“내가 비밀을 하나 이야기해주지.”
“?!”
“난 원래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어. 진짜야. 신의 대리인이고 가장 고귀한 자리고 간에 일이 너무 많아. 해야 할 일은 넘쳐나고, 대신들은 무능하고, 욕심쟁이들을 두들겨 패는 대신에 중재해야 하고. 다들 고개를 조아리면 뭐 해. 예법과 규율 때문에 하품조차 제대로 못하는데. 그래서 빅토리아가 스무 살이 되면 모든 것을 넘겨주고는 은퇴할 거야.”
카시어스는 자신의 계획을 흥겹게 이야기했다. 선선대 황제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카시어스는 황위와는 전혀 관련이 없이 살아왔다. 우연과 필연이 겹친 끝에 결국 황제가 되기도 했고 의무를 다 하고 있었지만, 그 자신이 황제가 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그는 얼른 빅토리아에게 양위를 하고 은퇴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정당한 후계자에게 황위를 물려줄 거라는 이유로 빅토리아를 후계자로 삼고, 혼인을 하지 않겠다고 공표한 이유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은퇴라면…….”
“양위를 말하는 거지.”
“…….”
린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은퇴. 양위.
그건 카시어스가 황제의 자리에서 자의로 물러난다는 뜻이었다. 린델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역사서를 뒤지면 황제와 왕이 양위를 한 사례는 분명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국사에 전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먹었거나 병환이 깊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카시어스처럼 젊은 황제가 물러나는 경우는 반란 이외에는 없었다.
그런데도 카시어스는 양위를 하겠단다. 마차 내부는 어두웠고 가면을 쓰고 있는 카시어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농담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은퇴를 하면 제일 먼저 로킬드의 설산에 오를 계획이야. 그 다음에는 배를 타고 동대륙으로 건너갈 생각이고.”
“?!”
“그리고 그때는 너도 함께 가야해.”
“제……가요?”
카시어스의 은퇴 계획을 듣던 린델은 같이 가야 한다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충성을 맹세했잖아. 내게 말이야.”
린델은 첫 번째 맹세를 떠올렸다. 그때 분명히 황제가 아니라 벨룬드 공작에게 충성을 서약했었다.
“마법사는 국외로 나갈 수 없다고 들었어요.”
“황제의 허락을 받으면 괜찮아. 그래서 나랑 같이 가기 싫어? 동대륙에 볼 게 얼마나 많은 줄 알아? 하늘탑이랑 노래하는 폭포도 동대륙에 있어. 그리고 에메랄드로 만든 궁전도 말이야. 세상의 신비를 보러 가야지.”
카시어스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마치 사탕을 흔들며 아이를 꼬드기는 것처럼 들렸다. 린델은 얼떨떨했다.
하늘탑, 노래하는 폭포. 에메랄드 궁전.
모두 책에서나 읽은 것들이었다. 동대륙에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걸 직접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카시어스가 그걸 보러 가자고 한다. 정말 끔찍하게도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린델의 바람은 단순했다. 존경받는 사제가 되어 마을 사람을 돕고 사는 것이었다. 거의 그럴 뻔도 했다. 그러나 1개월 만에 자신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다.
동대륙이라니.
머리가 멍한 와중에도 정말 동대륙에 갈 수 있는 걸까 하고 기대감에 심장이 떨렸다. 평소에는 느껴보지 않은 낯선 욕심이어서 더 그랬다.
“싫어?”
“아니요. 좋아요. 가고 싶어요.”
카시어스의 부추김에 린델은 욕심껏 진심을 말했다. 정말 가고 싶어졌다.
열망이 담긴 목소리는 솔직했고 그래서 카시어스는 웃고 말았다. 자신이 사람 하나는 잘 꼬드기는 편이었다.
원래 은퇴를 하면 조용히 은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린델이 있으면 폭주를 걱정해도 되지 않으니까 얼마든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로킬드의 설산이든, 동대륙이든. 남대륙이든.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세상을 돌아다니는 거야.”
“예.”
그렇게 약속을 하는 사이에 마차가 멈췄다. 시종이 문을 열자 카시어스가 먼저 내렸다.
“잡아.”
카시어스가 린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린델은 휘황찬란한 불빛에 할 말을 잃었다. 멋진 저택은 밤이 아니라 낮이라도 된 것처럼 사방이 빛나고 있었다.
“여긴 어디예요?”
린델은 옆에 걷고 있는 카시어스에게 물었다. 손을 놓지 않은 그가 대답했다.
“비밀 정원.”
“?”
“재미있을 거야.”
린델은 재미있을 거라는 카시어스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너를 죽이고, 너와 함께 지옥으로 걸어들어 가겠다. 천국에 있는 그녀를 위해서!!”
커다랗게 외친 남자가 크게 칼을 치켜 올렸다. 그는 지금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비참하게 죽었다. 그녀를 살해한 범인이 바로 동생이었다. 동생은 바로 눈앞에 있고 그의 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들려 있었다.
린델은 다음에 이어질 장면을 상상하며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칼날이 번쩍거리는 것과 동시에 범인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붉은 피는 셔츠를 적시고 바닥으로 흘렀다.
관객석에서 비명과 감탄이 터져 나왔다. 린델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연극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붉은 피의 비릿한 냄새는 진짜 같았다.
“피가…….”
“가짜 피야.”
옆에 앉은 카시어스가 손을 잡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그 사이에 독백을 마친 형이 제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다. 그의 셔츠 자락을 따라 피가 흐르는 것을 린델은 멍하니 지켜보았다.
“예. 알아요. 그런데…….”
그런데 진짜 같았다. 피를 흘리는 남자가 억울한 죽음을 맞아서 더 놀랐다. 연극 내용은 간단했다. 아름다운 여인을 사이에 두고 두 형제가 싸웠다. 여러 가지 일이 꼬이면서 동생은 형의 오해 속에 칼을 맞아 죽었고, 형은 자살하는 것으로 극이 끝났다.
막이 내리고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지만 린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놀란 모양이군.”
“마지막에는 너무 진짜 같았어요.”
린델의 한숨 섞인 감상에 카시어스는 피식 웃었다. 최근 닐르에서는 피가 난무하는 연극이 유행하고 있었다. 치정, 불륜, 폭력, 배신과 살인은 연극의 단골 소재였다. 셀 수도 없이 난립한 소극장에서는 자극적인 내용의 연극이 연일 상영 중이었다.
그 중에서 칼을 휘둘러 리얼하게 피를 튀는 것을 보여주는 연극이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특히 옷이 아니라 맨살에 피를 흐르게 하는 것은 몇몇 장인의 독점 기술이어서 경쟁이 치열했다.
칼부림으로 피가 튀고 유혈이 낭자하는 장면이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실전 경험이 있는 카시어스의 눈에는 그저 장난처럼 보였다. 배우의 연기는 꽤나 그럴듯했다. 발성도 좋았다. 그래도 마지막 장면은 어설펐다. 극적으로 보이기 위해 너무 과장스럽게 쓰러졌다.
“진짜는 저렇게 쓰러지지 않아.”
“그런가요?”
“피가…… 어떻게 튀는지 설명하기에는 상황이 안 좋군.”
커튼콜을 위해 막이 오른 것을 확인한 카시어스가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피를 흘리고 쓰러진 배우들이 웃으면서 나타났다.
이번에는 린델도 열심히 박수를 쳤다. 카시어스는 혹평을 했지만 연극 자체는 훌륭했다. 자극적인 내용과 훌륭한 연기력에 화려한 의상까지 더해진 수작이었다. 아낌없이 박수를 쏟아낸 관객들이 극장 옆에 붙은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연회장은 이미 가면을 쓴 손님들이 가득했다. 거기에 연극을 보고 나온 관객들까지 더해지자 더욱 북적거렸다.
“비밀 정원이라고 하셔서 좀 더 비밀스러운 일이 있을 줄 알았어요.”
린델이 연회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뭔가 은밀한 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가면을 쓴 것만 빼면 영주님의 파티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 훨씬 화려하고, 규모가 크고, 연극이 아주 재미있다는 것도 달랐지만 어쨌든 그랬다.
“비밀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이렇게 환한 곳에서요?”
“네 눈에만 안 보일 뿐이지.”
“그래요?”
비밀스러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소리에 린델은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