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썬스톤으로 불을 밝힌 샹들리에는 몇 개인지 셀 수가 없었다. 그 아래 물결치는 드레스와 보석들은 눈부시기 짝이 없었다. 제각각의 가면을 쓴 귀부인과 신사들이 춤을 추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흥겨운 음악 소리가 끊이질 않는 연회장 안에서는 비밀이라고 불릴만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안 보이는데요?”
“눈치가 없군. 바로 코앞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잘 모르겠어요. 뭔지 가르쳐주시겠어요?”
코앞에서 일어나고 있다는데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다. 린델은 항복의 뜻으로 카시어스를 올려다보았다.
린델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린델의 하늘색 눈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그에게 사교계의 은밀한 놀이를 가르쳐주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았다.
수도 닐르에는 온갖 비밀 클럽이 난립해 있었다. 대부분 섹스와 음주, 도박과 관련이 있었는데, 정체가 모호한 탓에 고귀하신 귀족들이 출입하기에는 위험이 컸다.
그러던 와중에 유명한 살롱의 여주인인 엘클린 후작부인이 비밀 정원을 하나 만들었다. 다른 비밀 정원과 달리 고귀한 귀부인들에게 안전하고도 자극적인 연극과 도박을 제공하는 것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후작부인의 비밀 정원은 한 달에 겨우 두 번만 열렸지만 언제나 성황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비밀 정원이 그렇듯이 이곳도 은밀한 만남을 위한 장소였다. 불륜 상대나, 혹은 하룻밤의 쾌락을 보낼 상대를 찾았다. 남녀가 팔짱을 끼고 사라지는 것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게 아니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린델은 눈치를 못 챘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녀석을 타락시켜야 하는 게 괜히 양심에 찔리면서도 짜릿했다. 카시어스는 자신의 성격이 나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카시어스는 살짝 허리를 숙여 린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기. 불빛이 닿지 않는 정원으로 사라지는 남녀가 무엇을 할 것 같아?”
“?!”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게 맞아.”
“!!”
카시어스는 믿을 수가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린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가볍게 잡아끌었다. 린델이 가볍게 굳어 있는 게 느껴졌다.
“검은 가면은 육체적 쾌락이 필요 없다는 뜻이지. 네가 붉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면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을 거야.”
“카시어스 경…….”
린델은 난감함을 감추지 못하며 카시어스를 불렀다. 정원이 은밀한 만남을 가지는 장소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영주님의 정원에서 민망한 장면을 두어 번 목격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육체적 쾌락을 운운하는 카시어스 때문에 머리가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정결과 금욕이 기본인 신전에서 자랐다. 이런 음담패설은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저 정원 너머로 사라지고 싶으면 말을 해. 나는 아주 관대한 후견인이니까.”
“지금 놀리시는 거죠?”
“응. 놀리는 거 맞아.”
웃으면서 당당하게 놀리는 게 맞다고 하는 카시어스 때문에 린델은 폭력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그러나 상대는 황제였다. 개구쟁이 꼬맹이의 머리통을 때리고 귀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만 말이다.
린델은 카시어스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저 너머로 사라지고 싶으면 꼭 말씀드릴게요.”
“정말?”
“네.”
마냥 입 다물고 있는 건 억울해서 용기를 쥐어짰다.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가면이 뺨을 가리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거기 가려면 아직 멀었어. 목까지 빨개졌단 말이야.”
“?!”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목을 가린 린델은 억울한 기분에 카시어스를 올려다보았다. 놀림만 당하는 것 같아서 억울했다. 카시어스가 얄밉게 웃고 있어서 더 그랬다.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건 아는데, 기분이 괜히 좀 그랬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시 주위를 둘러봐.”
카시어스의 지시에 따라 린델은 연회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제야 사람들이 쓰고 있는 가면의 색깔이 검정과 빨강뿐이라는 것과,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허술한 가면을 쓴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몸짓과 함께 으슥한 곳으로 사라지는 남녀도 눈에 들어왔다.
정말 바로 코앞에서 비밀 아닌 비밀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놀라고 있던 린델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연회장 반대편에 서 있는 검은색 가면을 쓴 숙녀분이 매우 눈에 익었다.
“카시어스 경?”
“왜?”
“경의 후계자께서 여기 계시는 것 같아요.”
황태녀 전하라고도 하지 못하고, 빅토리아라고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던 린델은 우회적으로 그녀를 지칭했다. 탐스러운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린 그녀는 남장이 아니라 제대로 된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눈썰미는 그럭저럭 괜찮군.”
“아시고 계셨어요?”
“아까 우리 반대편에 앉아 있었어.”
“여기서 만나기로 하신 건가요?”
“우연이야.”
우연이라고 했지만 필연이기도 했다. 빅토리아는 비밀 정원의 단골이었다. 카시어스는 빅토리아를 강하게 키우려고 했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빅토리아도 이쪽을 알아보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아가씨께서도 호위가 없으신 것 같아요.”
“다섯이 있어.”
“다섯이요?”
“양옆의 둘이 모두 호위야. 그 중 하나는 그녀의 수호 기사지.”
아무리 경험이 좋다고 해도 후계자의 안전과 바꿀 수는 없었다. 빅토리아의 호위는 무조건 다섯 이상이었다.
“그럼 저 분이 제라드 경이신가요?”
“그에 대해 알고 있나봐?”
“세투아 님께 들었어요.”
린델은 황궁에 가지 않는 2일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마법 이론과 기초를 가르쳐주는 세투아는 황실 비사와 사교계의 가십을 꿰고 있었다. 어쩌다가 황태녀 전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가 수호 기사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호 기사인 제라드는 그걸 알고도 모른 척하고 있다는데, 알만 한 사람들 눈에 두 사람은 이미 연애 중이나 다름없는 것이랬다.
“저것도 연애라고 하고 있으니, 아직 애야.”
“정말…… 짝사랑 중이신건가요? 그 분께서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 린델.”
“그럼요?”
“빅토리아는 그와 혼인을 할 거야. 그리고 행복해지겠지. 그녀는 무엇이 행복인지 알거든. 제 것을 뺏기는 것도 싫어해. 그러니까 방해하지 않는 게 좋아. 잠시 앉아서 기다려. 마실 것을 가져 오지. 아무나 따라가지 마. 그리고 아무거나 받아먹지 말고.”
마치 어린 아이에게나 할 법한 주의를 준 카시어스가 다과 테이블로 갔다. 린델은 쓴 웃음을 지으며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까지 못 미더운가 싶은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자가 되셨습니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붉은 가면을 쓴 남자가 옆에 서 있었다. 가면은 얼굴의 왼쪽만 가리고 있었고 나머지 오른쪽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짙은 갈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의 미남이었다.
“저는 동행이 있습니다.”
“오. 알고 있습니다. 그 분께서 돌아오실 때까지만 환담을 나누도록 하죠. 연극에 집중하시던데, 재미있으셨습니까?”
“재미있었어요.”
린델은 적당히 대꾸했다. 따라가지 않고 먹지 말라고 했지만 대화를 나누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사실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성격적으로 힘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다과 테이블에서 지켜보던 카시어스는 혀를 찼다. 예상은 했지만 혼자 남겨두니 여인이 아니라 사내가 붙었다. 딱 봐도 바람둥이처럼 보였다. 게다가 린델은 놈을 냉정하게 쳐내는 대신에 상대를 해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경계하더니 결국 웃으면서 말을 받아준다.
저러다가 잡아먹히지.
극성스러운 보호자가 된 심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아무리 경험이라고 해도 아직 비밀의 정원은 너무 빠른 건가 싶었다.
“연인이 딴 남자랑 시시덕거리고 있는데, 그냥 지켜만 보고 계시네요.”
바로 옆으로 다가온 빅토리아가 웃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카시어스는 옆을 돌아보는 대신에 린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 눈을 팔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곳이 바로 비밀 정원이었다.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착한 연인은 아니시군요.”
“내가 착하다고 누가 그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철혈이라고 불렸다. 착한 연인도 어진 군주도 아니었다.
“당연히 그러시죠. 이런…….”
빅토리아가 옆에서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카시어스는 다시금 혀를 찼다.
린델은 옆에 선 남자가 앞머리를 만지는데도 가만히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들리지는 않았지만, 뭔가 있다고 수작을 부린 건 분명했다. 남자의 손끝은 가면 끝도 슬쩍 건드렸다. 린델이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다음을 허락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린델은 그런 규칙을 몰랐다.
“얼른 가보셔야겠네요.”
가까이 다가온 빅토리아가 펀치가 담긴 유리잔을 내밀어보였다. 카시어스는 잔을 들고 린델에게 다가갔다.
남자가 막 린델의 턱 끝을 만지려고 할 때였다.
“린델.”
이름을 부르자 린델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웃음 짓는 하늘색 눈동자에는 신뢰가 어려 있다.
“카시어스 경.”
“이것 받아.”
“감사합니다.”
린델에게 펀치를 들려준 카시어스는 아직도 옆에 선 남자를 노려보았다. 붉은 가면을 왼쪽만 쓴 남자는 낭패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런 놈들은 기가 막힐 정도로 순진한 데뷔탄트를 잘 찾아냈다.
감히 내 것을 넘보다니.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한 번 더 그를 노려봐주자 별 말 없이 순순히 물러났다. 바람둥이가 되려면 매너가 좋아야 했다.
남자를 쫓아냈으니 이제 린델을 교육시킬 차례였다.
“너는 경계심이 너무 없어.”
“네?”
카시어스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올려다보는 린델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빅토리아를 가르칠 때도 이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았다. 물가에 애를 내놓은 심정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누가 만지려고 하면 피해.”
“아, 그거요? 머리카락에 꽃잎이 붙어 있다고 해서 그랬어요.”
“그게 유혹의 첫 단계야.”
“유혹이라고요?”
펀치를 삼키던 린델이 눈을 크게 떴다. 카시어스는 린델을 마주한 채로 손을 들어 그의 앞머리를 살짝 건드렸다. 그리고 테리안이 했던 것처럼 가면 끝을 살짝 눌렀다.
“이 다음이 뭔지 알아?”
“아……니요.”
린델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러자 카시어스의 손끝이 턱에 닿았다. 왜 이러나 싶어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였다. 카시어스의 엄지가 아랫입술을 살짝 쓸었을 때는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아무리 바보여도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거절은 고개를 돌리거나 물리면 돼.”
린델은 홀린 듯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얼굴이 또 달아올랐다.
“신사분이…… 그런 의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네 스캔들 상대가 누군지 생각해야지.”
“아…….”
“여인이든 사내든 정말 마음에 드는 상대가 아니면 만지지 못하게 해. 알겠지?”
“네.”
착실한 학생인 린델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린델의 진지한 반응에 카시어스는 만족했다. 충격 요법이 꽤나 효과적으로 먹힌 모양이었다.
그때마침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연회장 안의 사람들이 저마다 환호성을 올렸다.
“비밀 정원 최고의 공연이 열린다는 신호야.”
카시어스는 눈빛으로 이게 뭐냐고 묻는 린델에게 친절히 답했다. 린델에게 귀족의 고약하고도 우아한 취미생활에 대해 알려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