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37)

-26화-

말을 타고 당당히 행진하는 사내들은 고대 영웅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팔과 다리를 훤히 드러낸 새하얀 튜닉을 튼튼해 보이는 가죽 허리띠로 고정했다. 머리에는 날개가 달린 황금 써클렛을 쓰고, 한 손에는 황금 방패를 들고, 허리에는 역시나 황금 칼을 찼다.

별이 반짝이는 검은 하늘 아래, 썬스톤으로 불을 밝힌 정원은 마치 보석처럼 빛났다.

웅장한 북소리와 박수, 한호, 그리고 쏟아지는 색종이와 꽃잎들은 영웅들의 행진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었다. 영웅들이 손을 흔들고 미소를 지을 때마다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이 울렸다.

린델은 지금 자신이 어느 시대에 서 있는지 의심해야 했다. 말을 타고 커다란 분수를 돌며 행진하는 8명의 사내들도, 그리고 그들의 말고삐를 잡고 이끌고 펄럭이는 깃발을 들고 있는 시종들도, 옆에서 발랄하게 꽃잎과 종이를 뿌리고 여인들도 모두 성서의 삽화에서나 본 듯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도 시대의 복식이었다.

영웅들의 행진에서 눈을 돌린 린델은 슬쩍 옆을 보았다. 자신의 주위에 선 사람들은 모두 친숙한 차림이었다.

린델은 옆에 선 카시어스를 향해 슬쩍 물었다.

“저게 뭐하는 것이죠?”

“가장 행렬이야. 마도 시대의 영웅들의 모습을 따라했어.”

“가장 행렬은 처음 봤어요.”

가장 행렬은 큰 도시의 축제에서나 하는 거라고 들었는데 그걸 저택 안에서 볼 줄은 몰랐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엄청나게 공을 들여서 꽤나 멋졌다.

“저들이 격투 대회의 주인공들이지. 저 중에서 한 명 골라봐.”

“골라요?”

“우승자가 될 사람에게 돈을 걸어야 하니까. 이곳은 판돈이 꽤 크거든.”

린델은 카시어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가 가장 행렬로 눈을 돌렸다. 격투대회, 우승자, 판돈. 그것을 종합하면 하나의 결론이 나온다. 우승자를 맞추는 도박이었다. 이것도 이야기만 들었는데 직접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누가 마음에 들어?”

“다 비슷해서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어깨에 걸치고 있는 망토 색깔로 구분하면 돼. 실력은 다 비슷비슷할 테니까 아무나 골라.”

그제야 린델은 사내들이 한쪽 어깨에 걸친 망토가 저마다 색깔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던 린델은 마음 가는 대로 푸른색을 골랐다.

“카시어스 경. 격투라면 싸우는 거죠? 저 칼로 싸우나요?”

“아니. 저건 장식용. 칼은 너무 위험하거든. 마력이 없는 일반인들이 맨손으로 싸우는 게 규칙이야. 승리 조건은 상대를 기절시키거나 항복을 받아내는 거지. 꽤나 치열하게 싸울 거야. 판돈만큼이나 우승 상금도 대단하거든.”

“아…….”

린델의 작은 신음성을 들으며 카시어스는 또다시 아주 작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했다. 정말 순진한 동생을 타락시키는 기분이었다.

후작 부인의 비밀 정원이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격투였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검투 경기와 달리 맨손으로 싸우는 격투는 나라의 허가가 없이도 대회를 열 수 있었다. 그리고 무기가 없는 만큼 이쪽이 좀 더 치열하고 원시적이었다.

특히 검투 경기장에 가는 것을 꺼려하는 귀부인들에게는 엄청난 인기였다. 우승자와의 하룻밤을 차지하기 위해 물밑에서 또 다른 경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을 린델에게 알려주면 어떻게 반응할까.

카시어스는 린델이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저택 서재에 꽂혀 있는 이야기책을 하나씩 독파해 나가고 있는 린델이 연극을 보고 열렬하게 박수를 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가 피와 폭력이 난무하는 격투를 좋아할지는 미지수였다.

“격투나 검투를 관람한 적 있어?”

“아니요.”

“싸움 구경은 좋아해?”

“모르겠어요. 싸움 나면 보통 말렸거든요.”

린델은 자신이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잘 몰랐다. 어렸을 때부터 싸움이 나면 말리기에 바빴다. 구경 같은 것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이들은 프로야. 거리의 부랑배들이 뒤엉켜 싸우는 것과는 격이 다르지. 다만 네가 그걸 좋아할지는 나도 모르겠군.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걸 보고 기절하는 귀부인들도 꽤 있거든.”

“저는 귀부인이 아닌 걸요.”

“야만적인 행위라고 눈살을 찌푸리는 신사들이 있다고 정정하지.”

“그건 보고 나서 결정하겠습니다.”

제대로 된 검투나 격투 경기는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을 좋아할지 싫어할지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었다. 사실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제대로 된 격투가 뭔지가 궁금했지만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진다면 끔찍할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심장이 뛰었다. 긴장한 것과는 다른 고양감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에 가슴을 꾹 눌렀다. 머리에 열도 오르는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목을 만졌는데 이상하긴 했다.

“린델? 왜 그래?”

“조금……. 목이 마른 것 같아요.”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카시어스가 지나가는 시종에게서 잔을 받아 건네주었다. 펀치가 아니라 샴페인이었지만 목이 말랐던 탓에 린델은 단숨에 들이켰다.

“린델. 마시지 마.”

“?”

마지막 한 모금까지 삼킨 린델은 카시어스를 보았다. 그는 샴페인을 마시다 말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가면에 얼굴이 가려져 있었지만 낭패의 기색이 역력했다.

“물을 마셔야 해. 이쪽으로 와.”

“카시어스 경?”

“내 실수야. 오랜만에 와서 룰이 바뀐 걸 몰랐어.”

“네?”

린델은 카시어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이끄는 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 나왔다. 정원에서 저택 본관까지는 금방이었다. 하지만 몇 걸음 안 되는 거리를 걷는 동안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머리가 어지럽다 못해 발이 공중에 둥둥 뜬 것 같았다. 너무 이상했다.

“린델.”

카시어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린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흔들렸다. 열이 오르고 심장이 뛰었다.

왜 이러지?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육신도 정신도 제어되지 않았다. 꼴사납게 넘어질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카시어스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그에게 매달렸다. 다행히 앞으로 고꾸라지기 전에 그가 안아주었다.

“죄송해요. 어지러워서…….”

“괜찮아. 약 때문에 그래.”

사과를 하는데 카시어스가 머리 위에서 으르렁거렸다.

약?

무슨 약을 먹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독감이라도 걸린 것처럼 머리에 열이 올라서 멍해졌다.

“무슨 약이…….”

린델을 끌어안다시피 한 카시어스는 대답 대신에 얼굴을 굳혔다. 비밀 정원에는 쾌락을 돕기 위한 약이 돌아다녔다. 약간의 흥겨움을 위해 펀치에는 정신을 일깨우는 카페인이, 은잔에 담긴 포도주에는 미혼약이 규칙이었다. 유리잔에 담긴 샴페인에 미혼약이 섞여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실수도 이런 실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린델의 반응이 이상했다. 후작 부인이 보장하는 파티인 만큼 미혼약의 양은 적당히 즐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린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은 물을 많이 마시고 토해내면 대충 수습이 가능한데, 린델은 그럴 시간조차 없이 몸을 떨었다. 징조가 나빴다.

“의사를 불러.”

린델을 안아 든 카시어스는 가까이에 있는 시종에게 명령을 내리고 휴게실을 찾았다. 격투 경기 때문에 휴게실은 텅 빈 상태였다. 카시어스는 린델을 반쯤 끌어안은 채 긴 의자에 앉았다. 물을 마시게 했지만 린델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더워…….”

린델이 크라바트를 풀려고 손을 움직였지만 아무래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자꾸 미끄러졌다. 카시어스는 린델을 대신해 크라바트를 풀어주며 인상을 썼다. 린델의 얼굴과 목은 물론이고 손끝까지 붉게 상기된 상태였다.

아무래도 이건 미혼약의 중독 증상이었다. 하지만 린델이 마신 것은 겨우 샴페인 한 잔 뿐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가볍게 흥분할 정도인데 린델은 제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이상해요.”

“괜찮아.”

“독감에 걸린 것 같은데…….”

린델이 열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괜찮다고 해 주는데 의사가 헐레벌떡 도착했다. 늙은 의사는 린델을 보자마자 단번에 증상을 알아차렸다.

“미혼약에 중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리잔의 샴페인만 한 잔 마셨어. 그런데 왜?”

“체질이 그러신 분이 있습니다. 최음제나 미혼약에 민감하게 반응하시죠.”

“진짜 더워…….”

대화중에 린델의 앓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가느다란 목소리는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이런. 우선은 가면부터 벗게 하시는 게―.”

“치워라.”

린델을 끌어안고 있던 카시어스가 의사의 손을 단호하게 쳐냈다. 그 기세가 흉흉하기 짝이 없어서 늙은 의사는 그냥 고개만 조아렸다.

“해독제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미혼약은 해독제가 없습니다.”

“물을 마시게 해서 토해내는 것은?”

“본질적인 도움은 안 됩니다. 약 자체는 안전한 것이니, 그 본디 효용을 다하게 하면 크게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미혼약의 본디 효용이란 섹스를 하게 하라는 소리였다. 해독제를 찾거나 토하게 할 필요 없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카시어스는 열이 오른 목소리로 덥다고 중얼거리는 린델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비밀 정원에는 특별한 순간을 위해 멋진 여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이라면 린델을 달래줄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카시어스는 그대로 린델을 안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

카시어스는 당황해하는 늙은 의사를 지나쳐서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암사자들에게 린델을 넘기라고? 무슨 짓을 당하라고.

벌거벗은 여인이 린델의 위를 타고 오른 장면을 상상하자 심장이 식었다. 실수를 수습하는 방법치고는 너무 고약했다. 무엇보다 린델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곤란했다. 황제의 피후견인이 비밀 정원에서 즐기는 거야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문을 린델이 견딜 리 만무했다. 린델의 숨이 넘어간다 하더라도 이곳에 둘 수 없었다.

“미안해요.”

“젠장.”

품안에 안겨 있는 린델이 진짜 숨넘어가는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카시어스를 잇소리를 냈다. 린델이 미안할 건 하나도 없었다. 이런저런 변명거리를 만들어내도 결국 잘못한 것은 자신이었다. 제대로 수습하고 책임도 져야했다.

카시어스는 린델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