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어지럽지 않습니다. 아픈 곳도 없고요.”
“기분은?”
“조금……. 아니, 많이 민망해요.”
“민망해?”
“그렇잖아요.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서……. 카시어스 경은 괜찮으세요? 저기, 그러니까 어젯밤에 좀……. 저 때문에 곤란하셨을 텐데요.”
처음이라고 말하면서 얼굴이 다시금 홧홧해졌다. 말을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미혼약에 중독된 자신을 끝까지 보살핀 것은 카시어스였다. 그런데 카시어스가 애매하게 얼굴을 굳혔다. 왠지 모르지만 화가 난 것 같았다.
“내가 몹쓸 짓을 했어.”
“카시어스 경?”
“미안. 관대한 마음으로 용서하길 바라.”
카시어스의 사과에 린델은 당황했다.
“아니,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그저…… 사고였어요. 여러모로 말이죠.”
“내 부주의였어. 린델. 너는 샴페인을 마시지 말아야 했어.”
“모르셨잖아요.”
“너무 착하기만 해선 안 돼.”
린델은 카시어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카시어스의 굳은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이대로는 네게 화를 낼 것 같군. 그것이야 말로 적하반장이지. 동침을 하고도 아침에 깨어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사라지는 것은 몹쓸 놈이나 하는 짓이라 지금까지 기다렸어. 멀쩡하다니 됐다. 황궁에서 보자.”
제 할 말만 한 카시어스가 휑하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을 나가버렸다. 조심해서 가라는 인사조차 하지 못한 린델은 멍하니 카시어스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카시어스가 화가 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린델은 자신이 깨어난 방이 카시어스의 침실이라는 것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뭐라도 먹기 전까지는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는 애쉰 부인의 엄명 때문에 한동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새벽마다 연습하던 승마도 오늘은 건너뛰게 되었다.
대신 세투아의 진찰을 받았다. 치유마법을 쓸 수 있는 세투아는 의학에도 정통하다고 했다. 그는 미혼약의 후유증은 없을 거라고 했다. 다만 미약과 음약 종류에 약한 체질이니까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오늘은 물을 많이 마시는 게 좋다고 한 세투아는 피곤한 얼굴을 하고 돌아갔다.
다음은 애쉰 부인이었다. 애쉰 부인은 침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린델 앞에 깔끔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를 대령했다. 린델은 애쉰 부인의 감시 하에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서야 차를 마실 수가 있었다.
“폐하께서 정말 많이 걱정하셨어요. 린델 님께서 좀처럼 깨어나지 않으셔서 큰 일 나는 줄만 알았어요.”
“아.”
식사를 마치고 찻잔을 들어 올리던 린델은 잠시 멈칫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세투아와 애쉰 부인을 비롯한 저택의 하인들이 모두 알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은밀한 사생활을 들킨 것 같아서 아주 부끄러워졌다. 그래도 아닌 척하며 차를 마셨다. 적당히 식은 차는 맛있었다.
“이번 일은 폐하께서 잘못하셨어요. 린델 님이 몹쓸 약에 취하는 것도 막지도 못한 데다, 정신을 잃은 린델 님에게 그러셨으니까요. 그건 분명히 잘못하신 거예요.”
애쉰 부인은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찻잔을 내려놓던 린델은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린델의 생각으로는 카시어스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카시어스 본인도 그렇고 애쉰 부인도 그렇고 그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애쉰 부인. 폐하께서는 잘못하신 게 없어요. 미혼약이야 거기에 들어있는지 폐하께서도 모르셨고, 제가 그런 약에 민감할 줄은 저도 몰랐어요. 그러니까 운이 나빴던 것뿐이었어요. 또 어젯밤엔……. 폐하가 아니셨으면 제가 정말 곤란했을 거고요.”
린델은 필사적으로 카시어스를 변호해주었다. 오히려 그에게 그런 일까지 하게 만들어서 자신이 미안했다.
“어젯밤에 폐하께서는 린델 님의 보호자였고, 린델 님의 안전을 책임지셔야 했어요. 린델 님의 체질과 별개로요.”
“하지만.”
“괜찮다고 할 게 아니라 용서한다고 하셔야 되는 거예요. 설마? 폐하께서 용서를 구하시지 않으신 건가요? 그런 거예요? 세상에나. 아무리 폐하시라도 그러시면 안 되죠.”
“그게 아니에요. 용서해 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그러질 않았어요. 사과하실 필요 없다고. 그냥 사고였다고……. 설마, 그것 때문에 화가 나신 걸까요?”
차분히 설명하던 갑자기 강경해지는 바람에 린델은 당황했다. 그게 아니라고 하다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시어스는 용서를 구했는데도 자신은 끝까지 괜찮다고만 했다. 그게 잘못일까 싶었다.
“폐하께서는 엄격하신 분이죠. 아마 스스로에게 화가 많이 나셨을 거예요.”
애쉰 부인은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카시어스의 젖유모에서 보모로 지냈던 애쉰 부인은 자신이 키운 황제께서 어떤 성격인지 잘 알고 있었다.
더 없이 강대한 힘 때문에 카시어스는 언제나 이성적이었다.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일도 없이 여유를 가졌다. 그런데도 어제는 달랐다. 정신을 잃은 린델의 곁을 지킨 카시어스는 더없이 날카로웠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여덟 살의 그때와 비슷했다.
두 사람은 진짜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카시어스에게 린델은 아주 소중한 존재인 것만은 맞았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셨다고요?”
“그럴 때 있잖아요. 달걀 바구니를 들고 가다가 엎어졌는데, 달걀은 다 깨지고, 무릎은 까져서 아픈데, 그게 내 잘못이라서 어디 화낼 곳도 없을 때 말이에요.”
너무 리얼한 비유였다. 달걀 바구니가 아니라 빨래 바구니를 들고 가다가 넘어진 적이 있던 린델은 애쉰 부인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깨끗하게 빤 빨래가 흙바닥에 뒹굴어서 엉망이 된 것을 보고는 스스로 바보라고 소리쳤다. 다시 빨래를 하면서 조금 울기까지 했다.
“뭔지 알 것 같아요. 그런데 폐하께서는 왜……?”
“피후견인을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오늘 폐하께서 기분이 꽤나 저조하실 거예요. 조심하세요.”
애쉰 부인의 충고는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도 황제의 길을 정비하지 못했다니. 짐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일로아나 백작?”
덥고 건조한 닐르의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황제의 싸늘한 음성이 회의실 안에 울려 퍼졌다. 활짝 열어 놓은 창문 너머는 화창한 여름이었지만 분위기는 사정없이 얼어붙은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황제의 지목을 받은 일로아나 백작이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폐하. 남부에 거미줄처럼 얽힌 황제의 길이 장대하여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자네에게 황제의 길을 정비하라고 한 것이 지난 겨울이었다. 한 달 전에는 돌을 깔 거라고 하더니, 그런데 손을 놓고 있어?”
“폐하. 아시다시피 지난봄에 큰 화재로 피해를 받은 탈봇항을 재건하느라 가용 인력이 모두 그쪽에 집중하였습니다. 항만이 불타버린 탈봇과 달리 남부의 공도는 험하기는 하나 제 몫을 하고 있으니 급한 게 아니라고 판단하여-.”
“신의 사랑을 받는 짐은 참으로 고결한 신하를 두고 있군. 스스로의 무능함을 고백하다니. 고작 탈봇항 때문에 건설청이 마비되었다니 말이야. 일로아나 백작. 자네 입으로 말하고도 부끄럽지 않나.”
“폐하.”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은 갸륵하나, 우선순위를 망각하지 말았어야지.”
“죽여주십시오!”
차갑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한 질책에 일로아나 백작이 조아린 머리를 들지 못하고 외쳤다. 죽여주십시오. 신하가 황제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반항인 동시에 항복 선언이었다.
회의실에 동석하고 있던 제국의 관료들은 일로아나 백작의 모습에 저마다 혀를 찼다. 그들은 일로아나 백작이 탈봇항을 우선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백작의 외가가 탈봇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국사 사업의 선후가 바뀌는 것은 종종 있었지만, 이번에는 일로아나 백작이 제대로 실수를 했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남부 공도를 정비할 예산 대부분을 탈봇항에 쏟아 부어버린 것이다.
집권 초기부터 행정 전반을 재상에게 맡긴 황제는 감사와 감찰로 국정을 장악했다. 고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었다. 일로아나 백작이 탈봇항을 위해 예상을 썼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군주로서 무자비한 황제는, 행정가로서는 실리를 따졌다. 한 달 전에 백작에게 실수를 만회할만한 기회를 줄 정도로 합리적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수습하지 못한 일로아나 백작을 그냥 둘 리 없었다.
“짐은 신하가 무능하다고 죽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올해가 가기 전까지 데셀라드와 아스캄을 잇는 공도를 정비하지 못하면 그 자리를 내 놓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음을 명심해라.”
“명심하겠나이다.”
파면이 예고된 일리아나 백작은 죽었다 살아난 기분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렌드릭 장군. 라만숲의 잔당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하라.”
황제는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는 티를 팍팍 내며 렌드릭 장군을 호명했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분위기 속에 회의가 계속 이어졌다.
그 광경을 회의실 한 쪽에 서서 가만히 치켜보고 있던 린델은 카시어스가 진짜로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제의 배행 마법사가 되어 시종단에 섞여든 지 딱 10일이 지났다. 3일에 한 번씩 겨우 네 번의 입궁으로 배운 것은 얼마 없었다. 아직 황제의 정궁에 있는 방과 계단의 위치를 못 외웠고, 미로처럼 얽힌 정원도 헷갈렸다. 대신에 황제의 목소리만으로 그의 기분이 어떤지는 대충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드나카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것은 곧 황제의 시종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제국의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의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두 지켜보았다. 황제의 사생활부터 국가 중대사까지 있었다.
카시어스의 요구는 명확했다. 고관 대작들의 성명과 직위와 가문을 익히고, 성격과 성향, 이해관계를 살피라는 것이었다. 정치적 이슈도 놓치지 말라고 덧붙였다. 정무 회의에서 오가는 나라의 대소사에도 귀를 기울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면서 그날 있었던 주요 의제나 사건에 대해 의견을 묻기도 했다. 그건 일종의 정치 수업과 비슷했다. 보고 들은 것에 대한 의견을 내놓으면 카시어스가 차근히, 혹은 제멋대로 설명해주는 형식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이드나카와 세투아 역시 린델에게 가능한 많은 것을 알려주려고 했다. 덕분에 린델은 대충이나마 제국과 황궁의 권력 구도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제국의 중심인 황궁 라드라비그는 하나의 작은 도시라고 해도 무방했다.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많은 갈등도 있는 법이었다. 황제와 고관들이, 그리고 황족과 귀족들이 필요와 이해에 따라 뭉치고 대립했다.
린델은 황제 폐하께서 대신들과 함께 제국을 잘 다스리고 계시다고만 생각하던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달았다. 아름다운 황궁의 이면은 저잣거리의 다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규모가 크고 은밀하긴 하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지난 세 번의 정무 회의 동안 심각한 사안도 몇 있었지만 카시어스는 큰 소리 한 번 낸 적 없었다. 가끔 카시어스가 빈정거리기는 했어도 대체로 분위기는 부드러운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일로아나 백작이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기 전에, 해인커 육군 원수 역시 남부군의 재정비 문제로 황제의 강도 높은 질타를 들었다. 거기다가 싸늘한 호통 끝에 건설청 장관의 파면을 예고해버리기까지 하자 다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빅토리아 황태녀마저 황제를 말리지 못하고 굳은 얼굴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애쉰 부인의 말대로 카시어스의 기분은 저조했다. 회의실에 자리한 사람들 중, 황제 폐하께서 까칠하신 이유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린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이 자신인 것 같아 왠지 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