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정무 회의를 끝낸 황제는 집무실이 아닌 사실을 찾았다. 황제의 기운은 여전히 냉랭했고 눈치 빠른 시종장 율라이가 재빨리 시중을 들었다.
“차가운 음료를 올리겠습니다.”
“됐다. 아셰리드엘만 남고 다들 물러가라.”
의자에 앉은 황제가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시종장은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확인차 황제를 보았다가 차가운 눈짓에 고개를 숙였다.
현재 황제의 총애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황제는 10일 전에 임명한 배행 마법사를 무척이나 아꼈다. 아셰리드엘이 배행 마법사로 입궁한 것은 오늘까지 네 번. 그 중에 한 번은 단둘만 점심 식사를 했고, 또 한 번은 동대륙에서 온 값비싼 가운을 하사하셨다. 산책은 매일 했는데 그때마다 시종들을 멀리 물렸다.
황제는 아셰리드엘을 애첩이나 정부로 인지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은 성실한 후견인이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황제는 아셰리드엘과 단둘이 한 공간에 든 적은 없었다. 침전에도 부르지 않았다. 물론 아셰리드엘이 황제의 사가라고 할 수 있는 벨룬드 공작 저택에서 지내고 있고, 어제도 황제가 그곳을 방문하고 오늘 아침에야 돌아왔지만 어쨌거나 그건 비공식적인 일이었다.
황제가 그의 피후견인과 황궁에서 단둘이 있겠노라 공공연히 알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기까지 단숨에 생각한 시종장은 황제의 심중을 넘겨짚지 않았다. 황제는 관대한 주인이었지만, 때에 따라 사정없이 까칠해지곤 했다.
지금 황제의 기분은 틀어질 대로 틀어졌다. 살벌한 기운을 퍼트리고 있는 탓에 등줄기에 소름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셰리드엘이 으르렁거리는 사자를 다독여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물러나옵니다.”
시종장은 대기하고 있던 다른 시종들과 함께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린델이 의자에 앉아 있는 카시어스에게 다가갔다.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카시어스는 피곤한 것 같기도 했다.
“손을 잡아.”
카시어스의 명령은 3일 전과 다름없었다. 린델은 그의 손을 잡다가 깜짝 놀랐다. 손이 차가웠다.
린델은 서커스 공연장에서 카시어스의 손을 잡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보다 더 심했다.
“괜찮으십니까?”
“등 뒤에 칼이 꽂혀 있는 것 같아.”
“폐하.”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린델은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의 등 뒤는 멀쩡하고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것은 알지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카시어스의 황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늘 넉넉하게 미소를 짓던 카시어스는 무서울 정도로 진지했다. 황금색 눈동자는 늑대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애쉰 부인의 예상대로 카시어스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했고 그래서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자신의 부주의로 린델이 미혼약에 중독되었다. 거기까지는 어떻게든 수습을 할 수 있었다. 린델의 말처럼 그건 우연이 겹친 불행한 사고였다. 당사자인 린델은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했으니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카시어스가 진짜 용납할 수 없는 것은 린델에게 욕정을 느꼈다는 사실이었다. 미혼약을 먹어 정신을 잃은 상대에게, 그것도 도와주고자 옷을 벗겨 놓고는 한순간 넋이 나가고 말았다.
난잡하고 방탕한 연애에도 분명 매너와 룰이 있다. 정신을 잃은 상대에게 그런 감정을 품어버린 건 욕을 먹고 비난을 받아도 변명거리가 없었다. 몹쓸 놈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속상한 것은 린델의 반응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해놓고는 본인은 눈치를 못 챘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냥 운이 나빴다며, 괜찮다고, 별 것 아닌 식으로 굴고 있었다. 아침에는 빨개진 얼굴을 들지도 못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카시어스는 입매를 당겼다. 결백한 린델에게 책임 전가를 하려는 꼴이 우스웠다.
“한심하군.”
“?”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하자 린델이 얼굴을 굳혔다. 심각한 분위기에 린델은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 있었다. 눈치는 없지 않는데, 무심하고, 또 대책 없이 착하기까지 했다.
카시어스는 온기가 느껴지는 린델의 손을 잡은 채 살짝 힘을 주었다. 아까까지는 정말 기분이 최악이었다. 그나마 린델의 손을 잡고 있어서 제대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린델을 알게 된 지 겨우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시간과 경험이 부족한 신인이었다. 보살피고 돌봐줘야 할 순진한 피후견인을 유혹하고 침대에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의 보호자를 자처했으니 더더욱 그랬다. 이건 자존심과 명예의 문제였다.
욕정 따윈 개나 줘버리라지.
속으로 거창하게 욕설을 내뱉은 카시어스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대부분의 인간이 그러하듯, 나 역시 실수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
“너는 내 옆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울 거야. 댄스부터 정치적 처세까지. 핵심은 무엇을 배웠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배웠느냐가 중요해. 아셰리드엘. 어제의 사고를 그저 운이 나빴다고 웃어넘기면 안 돼.”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선은 날 용서해. 아주 관대한 마음으로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른 멍청하고도 바보 같은 후견인에게 다시 기회를 줘.”
카시어스는 다정하고도 강력하게 간청과 애원을 했다. 린델은 제대로 화를 내고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린델은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카시어스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애쉰 부인은 괜찮다고 할 게 아니라 용서한다고 해야 하는 거라고 말했다.
“저는……. 다 용서하겠습니다.”
“그렇게 쉽게 용서하는 거 아니야.”
“그럼요?”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불같이 분노하겠노라고 해야지.”
카시어스의 가벼운 너스레에 린델은 웃었다. 그제야 자신이 아는 카시어스로 돌아왔다.
제국의 황제, 자신의 후견인이자 보호자.
쉽게 용서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선의로 시작한 일이라도 결과가 늘 좋을 수 없다는 걸 압니다. 서커스 공연장에서 제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에요. 그때 폐하께서는 제 사과를 받지 않으셨죠. 앞으로 어젯밤과 비슷한 일이 또 있더라도……. 저는 괜찮다고 할 거예요.”
린델은 아침부터 생각해 왔던 것을 찬찬히 말했다. 어젯밤의 일이 계속 떠올라서 민망한 것 외에는 딱히 아무 문제없었다. 그러니까 괜찮다고 하는데 카시어스가 웃었다.
“짐의 마법사는 그 혓바닥으로 출세를 하겠지만, 축재는 못하겠군. 아침에도 말했지만 그렇게 양보하기만 해서는 안 돼.”
“폐하께서는 저를 너무 좋게만 보세요.”
“욕심이 없는 짐의 마법사에게 검과 금화를 한 상자 하사하지. 커다란 상자로.”
“폐하?”
“감사하다고 해.”
“감사합니다.”
린델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카시어스의 말을 따라했다. 이게 검과 금화를 하사받을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짐의 과오로 총신이 힘든 일을 겪었으니 그에 사의해야지. 그 입이 무겁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카시어스가 린델의 의문에 답해주었다. 황제의 과오에 신하가 피해를 입었다면 사의를 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신하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그리고 남부끄러운 실수에 대해 입을 다물라는 의미로 말이다. 눈치 빠른 궁중인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받아내려고 아부를 했을 것이다. 물론 린델은 그럴 주변머리가 없으니 자신이 챙겨줘야 했다.
“제 입은 무겁습니다.”
“네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 이참에 확인하는 것도 좋겠지. 내일, 새벽 일찍 부르겠다. 같이 가야 할 곳이 있어. 어디를 가는 건지 물어봐.”
“어디를 가게 됩니까?”
“몬스터를 보러 갈 거야.”
“?!”
“마도 시대의 생물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아.”
“황공합니다.”
몬스터를 두 눈으로 보게 해주겠다는 황제의 배려 또한 선물이었다. 린델은 배운 대로 감사의 인사부터 했다.
“좀 더 놀고 싶은데, 빅토리아가 기다리고 있군.”
“황태녀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빅토리아가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에 린델은 깜짝 놀라 입구 쪽을 보았다. 단단히 닫힌 문은 꽤나 멀었고 그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린델은 진짜 그러느냐는 눈빛으로 카시어스를 보았다. 그러자 카시어스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종장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그게 들리십니까?”
분명 같은 장소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린델은 확인차 물을 수밖에 없었다.
“컨디션이 좋으면 꽤 많은 것들이 들리지.”
“와.”
린델의 작은 감탄사와 선명한 표정 때문에 카시어스는 훨씬 더 기분이 좋아졌다. 발소리를 구분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본궁을 돌아다니는 모든 인간의 기척을 읽을 수 있었다.
평소라면 마력을 억누르는 제어 반지의 제약을 받겠지만 린델의 손을 잡고 있는 지금이라면 손쉽게 해낼 수 있을 터였다. 끝없는 자신감과 단단한 안정감을 선사하는 디비티에는 이름 그대로 보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찬탄 어린 시선을 더 즐기고 싶었지만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였다.
“빅토리아만 들라고 일러. 아셰리드엘.”
카시어스는 린델의 또 다른 이름을 부르며 손등에 살짝 입맞춤을 하고는 잡은 손을 놓았다. 스스럼없는 친애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린델이 쑥스러운 듯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어젯밤의 일은 잊어버려.”
“?!”
인사를 하며 막 자리에서 일어서던 린델이 그대로 멈췄다.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에 카시어스는 짓궂은 마음이 일었다.
“그래도 그대는 짐의 비밀 연인이니까 이런 가벼운 스킨십에는 익숙해져. 매번 얼굴이 빨개져서야 짐이 어린 피후견인을 희롱하는 호색한이 되어버리니까.”
어젯밤을 언급되는 바람에 민망했던 순간을 한꺼번에 떠올려야 했던 린델은 카시어스의 농담에 할 말을 잃었다.
이미 희롱하고 계시잖아요.
린델은 차마 진실을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목구멍 뒤쪽으로 삼켰다. 훌륭하고 멋진 어른인 카시어스는 짓궂은 농담으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린델이 경험한 타인과의 접촉이란 손을 잡는 게 아니라면 어린 시절에 잉그란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것이 전부였었다. 어젯밤의 일을 잊어버리라고 한 것은 다행이지만, 스킨십이 익숙해지라는 명령은 무리였다.
“왜 말이 없어.”
“그냥 수줍음 많은 피후견인이 되겠습니다.”
“하하하. 그것도 방법이겠군.”
뺨을 붉힌 린델의 재치 있는 대답에 카시어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말재주는 제법 있단 말이야. 그래도 얼굴에 모든 게 드러나면 안 돼. 지금이라도 당장에 문 밖을 나서면 사람들이 널 쳐다볼 거야. 황제가 비공식 연인이랑 무엇을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눈을 빛내겠지. 머리칼은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입고 있는 옷은 구겨지지 않았는지 말이야.”
“?!”
“웃지 않는 냉철의 마법사도 좋지만, 더 능숙하게 감출 수 있어야 해.”
카시어스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린델의 표정은 풍부한 편이었다. 온전한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자라온 흔적이었다. 지금도 그의 눈빛은 복잡한 심정이 어려 있었다. 그건 좋은 일이었지만 황궁에서는 제 감정을 능숙하게 숨기는 재주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