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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30/137)

-30화-

“폐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어려운 요구를 하는 카시어스를 향해 린델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대로 카시어스에게 절을 한 린델은 사실을 나섰다. 대기하고 있던 빅토리아에게 황제께서 들라 이른다고 알리고는 이드나카를 찾아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섰다.

튤립의 방 옆에 붙은 작은 대기실에는 근위 시종들과 접견 신청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근위 시종의 경우 시선을 잘 갈무리 했지만 대기 중인 접견인들은 노골적으로 린델을 쳐다보았다.

린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들의 시선을 무시했다. 궁중인들은 가십에 너무나도 열광했다. 특히 황제의 사생활에는 관심이 끊이질 않았다. 그들의 수다는 로벅의 장터 아주머니들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약점을 물고 뜯으며 바닥으로 떨어지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상대가 황제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지고의 존재이신 황제께도 여러 종류의 적이 존재했다.

린델은 황제의 피후견인이었고 그의 실수는 곧 황제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카시어스의 약점이 될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던 린델은 허리에 힘을 주고 바로 섰다.

뒷짐을 쥔 두 손을 마주잡았다가, 카시어스의 입술이 닿았던 손등이 간지럽다고 생각하자마자 어젯밤의 기억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가 사라졌다.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린델은 살짝 입매를 당겼다. 너무나 강렬한 경험이었다. 쉽게 잊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튤립의 방은 대대로 황제의 취향대로 꾸며졌다. 카시어스가 좋아하는 푸른색이 가득한 튤립의 방에 들어선 빅토리아는 속으로 빙긋 웃었다.

회의 내내 까칠하게 짝이 없었던 황제께서 기분이 좋으신 듯 웃고 있었다. 시종장은 황제께서 아셰리드엘과 단둘이 계시다면서 방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셰리드엘은 방을 나왔고 황제께서는 까칠함이 사라지셨다.

인과 관계는 명확했다. 

빅토리아의 작은 할아버지이자 황제이신 카시어스는 유능했다. 얼마나 유능했냐면 며칠씩 황궁을 비우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신하들을 가루가 되도록 쥐어짰다. 무능은 죄악이라고 여기는 황제 밑에서 대부분의 신하는 소처럼 일했다.

그렇다고 카시어스가 게으름을 부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책임감이 강했고 그만큼 성실하기도 했다.

여섯 개나 되는 마력 제어 반지를 착용할 정도로 강력한 마력을 타고난 카시어스는 감정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이었고 자기 절제력이 강했다. 그러나 그도 사람이었고 한 번씩 싸늘하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살벌하게 굴었다

그런 의미에서 빅토리아는 위험한 사자를 조련한 황제의 비공식 애인에게 멋진 선물을 한아름 안겨다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무궁하신 광영의 폐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인사를 한 빅토리아는 카시어스의 눈짓에 따라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기분은 괜찮으신지요.”

“그래.”

“일로아나 백작이 멍청하게 굴긴 했어요.”

“그에게 사촌 동생이 해 처먹은 것을 메꿔놓으라고 귀띔해줘라. 오랜 명가가 제 놈의 대에 풍비박산 나는 꼴을 겪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협박을 하라는 지시에 빅토리아는 웃었다. 제국의 후계자로 배워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신하를 장악하는 방법이었다. 카시어스는 신하들의 약점을 쥐고 흔들어댔다. 그건 매우 효과적이었고 빅토리아도 본받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도 아직 따라가려면 멀었다.

“용건이 무엇이냐?”

“재상께서 고할 게 있는데, 폐하를 뵙고는 심장마비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셔서요. 제가 정찰차 왔습니다.”

“시아크 공작이 무엄하군. 감히 짐의 후계자를 부려 먹다니 말이야.”

“폐하께 사자처럼 으르렁거리셨으니 재상께서 몸을 사릴 수밖에요. 그래도 심기가 밝아지셨으니 한시름 덜었습니다. 재상께서 아셰리드엘 경을 찬양할 거예요.”

흥겨운 목소리로 린델을 언급하는 빅토리아 때문에 카시어스는 웃었다. 자신의 후계자는 명석하고 맹랑했다. 좋은 자질이었다.

카시어스는 빅토리아의 말을 받아주지 않고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내일 그가 동행할 거야. 빅토리아. 먼저 알고 있어.”

“진심이세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짐의 마법사에게는 경험이 필요해.”

“폐하의 애정법은 독특하세요.”

황제께서 제 사람을 자기 방식대로 아끼신다는데 빅토리아가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아는 황제는 편애가 심했다.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아낌없이 퍼주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빅토리아 자신이었다.

제국의 하나뿐인 후계자로서 세상에 없을 부귀와 영화를, 그리고 제왕이 되기 위한 완벽한 교육을 받았다.

당금의 황제께서 사람을 아끼신다는 것은 무한정 애정을 베푸시는 게 아니라,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엄청난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주는 것이었다. 무능함을 용서치 않는 황제의 아주 독특한 애정법이었다. 그래도 연인에게 몬스터를 확인시켜주겠다는 것은 좀 너무했다.

빅토리아의 야유 아닌 야유에도 카시어스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래서 빅토리아는 좀 더 유용한 정보를 알리고 물러나기로 했다.

“오늘 가든 파티에 평소보다 많은 인원이 참석할 거랍니다. 특히 태후 마마의 친구분들이 잔뜩 오실 거예요.”

“아하?”

카시어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태후 마마의 친구들은 하나 같이 미인을 밝혔다. 꿍꿍이야 뻔했다.

“태후께서도 너무하시는군.”

“폐하께서 유난히 구셨으니까요. 할머님들이 궁금해 하실 수밖에요.”

뒤센트 자작이 했던 말을 빅토리아가 똑같이 했다. 어제처럼 오늘도 부정할 수 없었다.

“짐을 놀리고 싶은 거구나. 알아서 할 테니 그만 물러가라.”

“물러갑니다.”

빅토리아가 웃으면서 물러났다. 뜻밖의 정보에 카시어스는 입매를 끌어올렸다. 유난히 굴었으니 시선을 끄는 건 맞았다.

린델을 강하게 훈련시키겠노라고 계획하긴 했다. 그러나 물가에 내 놓은 어린애를 지켜보는 듯한 기분에, 그 사실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6월의 여름밤, 황태후 궁의 파티장은 꽃과 향초, 그리고 샴페인 향기로 뒤섞였다. 식탁에는 산해진미가 넘쳤고, 활짝 열린 창 너머로 네 박자 춤곡이 흘렀다. 비단과 보석으로 치장한 귀부인과 신사들이 저마다 우아하게 웃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불을 환하게 밝힌 정원의 분수 주위로 여름밤의 열기를 식히려는 사람들이 걸어 다녔다.

린델은 어젯밤의 비밀 정원과 태후의 가든 파티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화려한 샹들리에, 산해진미, 향기로운 술. 가면이 없다는 것만 빼면 거의 비슷했다. 여인들의 화려한 야회복과 값비싼 보석 장식, 살랑거리는 부채는 그대로였다.

물론 비밀 정원에 비해 이쪽이 훨씬 더 차분하긴 했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간간히 울려 퍼지는 와중에 노골적인 눈빛이 오가던 비밀 정원과 달리 태후의 가든 파티는 점잖았다. 파티의 주인이신 태후 마마의 취향 탓이었다.

린델은 슬쩍 고개를 돌려 빅토리아 주변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황태후를 찾았다. 레스텔 황태후는 빅토리아의 할머니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젊어 보였다. 모래색 머리를 깔끔하게 빗겨 넘겨 치장한 모습은 다른 귀부인들처럼 빈틈이 하나도 없었다.

황태후에게서 눈을 돌린 린델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황실 사교계를 여왕이라고 불리는 태후의 가든 파티에는 유명한 수도 귀족들이 잔뜩 참석했다. 그 중에는 정무 회의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대신들도 여럿이었다.

얼굴이 익은 사람의 이름을 한 명씩 기억해 내던 린델의 시선이 멈춘 곳은 한 무리의 젊은 귀족들이었다. 정확히는 그들 중에 갈색 머리를 한 청년이었다.

갈색 머리 때문인지 알렉스 도련님과 비슷하게 생긴 것 같았다. 큰 키와 체격도 닮았다.

“어.”

웃는 얼굴까지도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그의 주변에 뭔가가 날아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나비였다. 작고 빨간 나비의 날개 가루는 사람에 따라 심각한 발진을 일으키곤 했다.

나비는 남자의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날아다녔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데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잠시 놀라더니 곧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던 린델은 따라 웃지 않았다. 하지만 빨간 나비가 계속 신경 쓰여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지.

조용히 황제 곁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와 그를 돕고 싶다는 양심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던 린델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가봐야겠다 싶어 옆에 선 이드나카를 조용히 불렀다.

“세뤤 남작님.”

“말씀하십시오.”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멀리 가지는 않습니다. 저기 계시는 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제라르 경께요?”

“예.”

“아셰리드엘.”

이다드카에게서 남자의 이름을 알아내고 있는데 카시어스의 부름이 뒤따랐다. 카시어스는 파티장 상석에 앉아 있었다. 배행 마법사로 황제의 옆에 서 있었던 린델은 부름을 받고 가까이 다가갔다.

카시어스는 제라르 경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린델은 사실대로 답했다. 나비 날개 가루 때문에 발진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자 카시어스는 웃음을 터트리고는 가서 도와주라고 했다. 허락이 떨어졌기에 린델은 거침없이 제라르에게 다가갔다. 그가 계속 이쪽을 보고 있어서 말을 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아셰리드엘 페르난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린델은 개의치 않고 제라르를 보았다. 그가 활짝 웃었다.

“유명하신 분이 먼저 말을 걸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제라르 가르데니안 위스하텔입니다. 제라르라고 불러주십시오.”

“제라르 경. 잠시만 가만히 계십시오.”

“?”

“경의 주위에 날아다니는 나비를 잡겠습니다.”

린델은 오른손을 뻗어 제라르의 오른쪽 귓가에서 소리 없이 팔락거리는 나비를 살짝 잡아챘다. 나비가 다치지 않게 양손으로 감싼 린델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제라르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나비 날개의 가루가 피부의 발진을 일으키곤 합니다. 얼굴을 씻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린델은 테라스 창으로 가서 나비를 풀어주었다. 휴게실에서 손을 씻고는 파티장으로 돌아와 황제 옆에 섰다.

그 일련의 과정을 앉은 자리에서 고스란히 지켜본 카시어스는 커다랗게 소리 내어 웃고 싶은 것을 참았다. 나비를 잡아준 것이야 린델의 선의였다. 카시어스가 도와주어도 좋다고 허락한 것은 린델이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린델은 군더더기 없이 나비를 처리하고는 돌아왔다. 그의 행동은 여러 사람의 시선을 끌었지만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의 옆에 섰다.

그 와중에 웃긴 것은 제라르의 반응이었다. 그는 재상의 늦둥이 막내아들로 호통한 성격 탓에 남녀 가리지 않고 인기도 많았다. 린델이 다가갈 때만 해도 눈을 빛내던 녀석이, 린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자 마치 뺨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세수를 하고 돌아온 지금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린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 꼬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걸.

카시어스는 자신의 피후견인이 가진 뜻밖의 재능에 감탄하며 쓴웃음을 삼켰다. 사내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아셰리드엘.”

“예. 폐하.”

“이제 돌아가도 된다. 어디 딴 데 가지 말고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거라.”

카시어스가 헤어질 때 하는 충고는 언제나 한결 같았다. 한눈팔지 말고, 딴 데 가지 말라는 소리에 린델은 어린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조금은 민망해도 그것이 배려라는 것을 알기에 고개를 숙였다.

“물러가옵니다.”

린델은 이드나카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파티장을 빠져나온 린델은 이드나카의 뒤를 따르면서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길고 길었던 하루가 드디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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